2000년 4월 30일
제목: 절망의 사람, 희망의 사람
성구: 요3:16-21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절망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는 60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슴에 절망의 무덤을 안고 살고 있는 사람과 그 절망을 극복하고 부활과 생명의 희망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절망적인 인간을 창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저버림으로 스스로 절망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이와 같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요?

첫째로,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을 사람들은 타락함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함으로 죄책의 병을 앓는 절망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죄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은 정의롭게 살지 못하고 의와 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부모와의 관계를 가지고, 부부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이란 병에 감염되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을 앓으면서도 거기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부모에 대한 죄책이란든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죄책이라든지, 자식에 대한 죄책,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의 죄책, 이웃과의 삶에 있어서의 죄책. 이런 많은 죄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죄책은 점점 많아만 지고 가슴속에 답답해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은 일생 죄악 속에 살다가 죄의 중압에 눌려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란 아득한 절망을 가슴속에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바쁘게 살면서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별 것 있느냐 자고 깨고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인생이지 그렇게 말합니다. 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낭패를 당하고 깊은 좌절과 실망을 체험할 때에 외로울 때 버림받았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에 갑자기 영혼을 뒤흔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느낌이 가슴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허무와 무의미인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이란 아무리 힘겹게 살아도 결국에는 텅 빈 공간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온 영혼을 뒤흔드는 이런 체험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가끔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3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것을 우리가 뼈저리게 마음속에 느끼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운명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갈수록 눈에 안 보이는 운명이란 강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 누우며 수고와 고생의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민속 시인이었던 이시가와 다꼬도꼬는 한평생에 너무나 가난하고 가난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남긴 시를 보면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잘 살 수 없어 나중에는 팔자인가 싶어 손금을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운명에 대한 무력감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 운명 앞에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구겨진 휴지와 같습니다. 운명에 저항해 봤자 파도를 몸으로 막으려는 것과 바위를 주먹으로 쳐서 깨뜨리려는 무모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운명에 대한 무력감의 절망이 나이가 들수록 가슴속에 깊이 쌓여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초가 되면 관상쟁이, 손금 보는 사람, 사주 팔자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왜? 운명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그 운명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운명의 거센 파도를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시편 144편 4절에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운명의 절망에 처해 있습니다.
또 인간은 죽음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종지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의식 속에 죽음이란 이 절망을 생각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죽음의 생각은 자꾸 의식 밖으로 내 버립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절대 절망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이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은 비행기 사고로, 혹은 열차 사고로, 자동차 사고로, 선박 사고로 죽어 갑니다. 혹은 공장에서, 혹은 직장에서 죽어갑니다. 혹은 갑자기 병들어서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조금 전까지도 팔팔한 사람이 심장마비가 걸려서 죽고 맙니다. 이러므로 매일 매일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종국에는 죽음이 우리를 삼키고 말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미 절망이란 불치의 병을 앓다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이 절망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가슴속에 죽음에 이르는 절망의 병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절망의 병이 치료되지 않는 이상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 아무리 있어도 기쁨과 행복은 없습니다. 기쁨이란 순식간에 지나가는 봄바람 같고 슬픔의 장막집처럼 마음속에 뿌려집니다.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알아보고 싶은 것은 이 절망을 이기려는 인간의 노력은 역사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사람들은 무시해 버리고 사는 법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절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생각하고 살자. 마치 사막에서 사냥꾼에서 쫓긴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눈에 안 보이니까 사냥꾼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한번 저희 집에 일하는 일꾼하고 같이 산비탈의 길을 갔는데 매 한 마리가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일하는 머슴이 잠깐 있어라 갔다 올테니 하고 뛰어 가보니 장끼 한 마리가 겁이 나서 머리만 숙이면 안보이는 줄 알고 머리를 수풀에 박고 엉덩이는 하늘로 쳐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슴이 그 장끼를 산 그대로 붙잡아서 왔습니다. 안 보이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절망적인 존재가 최후에 취하는 한가지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적으로 본능을 따라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절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삶 저 건너편에는 더 무서운 형태로 절망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을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절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들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삽니다. 좀더 지적인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절망을 바라보고 자기 한계를 뼛속에 느끼고 그 절망에 항복하고 체념하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 그런 것이다, 팔자다, 별 도리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방법도 됩니다. 또 어떠한 사람은 지적으로 절망을 극복하고 살아가 보려고 합니다. 철학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절망을 해석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여러 가지 인간의 노력을 합니다. 유명한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하루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집 마당에서 장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노자 양반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장구를 치고 있습니까? 오늘 좋은 일이 있습니까? 무슨 좋은 일입니까? 내 아내가 죽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아내가 어린아이로 태어났다가 처녀로 장성해서 결혼해서 살다가 이젠 자연의 법칙을 따라 죽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자연의 법이 내 아내 생애 속에 이루어지니 오늘 내가 장구를 치고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망을 극복하고 살려는 한 철학적인 인생의 발버둥에 불과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이런 초등 학문을 가지고서 인간의 절망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합니다. 얼마나 종교가 많습니까? 이 세상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가슴속에 앓고 있는 절망을 고쳐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고행을 통하여 속죄하려는 사람, 혹은 각종 신에 귀의하여 구원을 바라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로 25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고 수많은 이방신과 이방 종교를 따라서 그들이 절망을 극복해 보려는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절망은 이 모든 노력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벼랑입니다. 아무리 뛰어도 뛰어도 벼랑의 뿌리를 넘지 못하는 헛된 애씀에 불과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피할 아무런 존재도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에서 건져줄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불가능하고 타력으로 전능자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길 밖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물에 빠져 허우적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헤엄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나무나 지푸라기를 잡아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물에 뛰어 들어와서 우리를 건져 내줄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절망의 이 바다에 허우적거리면서 헤엄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모스 5장 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시편 62편 5절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 인류 가운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지 않는 가슴에 절망을 품지 않는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이 천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자로서 그는 죄의 절망을 앓지 않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대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절망을 갖고 있지 않음을 그의 생애 사역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절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절망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었습니다. 실제로 죄인을 건져내고 귀신들린 자를 치료해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돕지, 없는 자가 있는 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이 없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들 가운데 와서 도와 주셨습니다.
누가복은 4장 18절로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망을 갖지 않은 주님이 오셔서 절망한 인류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절망을 최종적으로 안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주님께서 청산해 버리기 위해서 대신 모든 인간의 절망을 다 주님이 끌어안고 십자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절망을 가득 담은 대접을 그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이 잔을 마셔라 모든 인간의 절망을 마시고 인간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거라. 예수님은 몸서리쳤습니다. 그는 죽음이 없는 분입니다. 절망이 없는 분이 절망을 마시고 죽음을 마셔야 되니 얼마나 몸서리칩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을 옮기지 않고 인류가 구원 될 수가 없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는 그 잔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절망과 죽음의 잔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 마시고 온통 절망이 되고 온통 죄가 되고 온통 저주받음이 되어서 발길에 차이고 채찍에 맞으면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서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히고 높이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인류의 버림받음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죄의 절망을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 흘려서 우리 절망적인 죄를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책을 다 청산해 버리셨습니다. 우리 예수 앞에 나오면 우리 부모와 자식간의 죄, 부부간의 죄, 형제간의 죄, 이웃간의 죄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꾸 쌓여오는 그 모든 죄가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청산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의 절망에서 해방됩니다.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 내 마음속에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죄 대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의미의 절망을 청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얼마나 처절한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든지 하나님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통곡을 했습니다. 완전히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는 무의미와 허무의 절망에서 벗어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을 십자가에서 청산해 버리고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장차 우리의 앞날에는 소망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운명에 대한 무력감의 절망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간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고 보니 아버지가 우리를 목자가 되어서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봄으로 우리는 운명의 장난의 소유물이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주시고 준비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십니다. 우리는 무슨 일어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운명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없습니다. 사주 팔자 볼 필요 없고 손금 볼 필요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과 살면 저가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날개 아래 거합니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므로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인이 내 앞에서 만인이 우편에서 넘어지나 이 재앙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합니다(시 91편). 왜?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하고 나쁜 일에도 감사합니다. 울면서 감사하고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운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따사로운 손을 잡고 우리는 마음에 큰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절망에서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안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죽여서 그는 무덤에 파묻어 버리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들이면 마음속에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넘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망은 사라지고 생명과 부활로 우리 마음속이 환하게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때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절망은 다 극복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젠 우리는 가슴앓이를 하지 않고 죽음의 병, 절망의 병의 가슴앓이를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예수로 말미암아 치료를 받아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에반스 박사가 전쟁 중 군의관이 한 말을 글로 적어 놓은 것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실려왔는데 소생 가능성이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의관이 이 환자를 두고 무심코 하는 말이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그 말을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숨을 거두게 된 이 병사가 이 군의관이 하는 말, ‘희망이 있어요.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이 말을 듣자 그 희망에 매달려서 그는 기를 쓰고 새벽까지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죽음을 저항한 것입니다. 죽음을 저항하고 기를 쓰고 몸부림을 쳤는데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넘쳐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군의관의 지나가는 무심코 한 말 한 마디가 그 사병에게 희망을 주어서 그가 그 절망적인 부상을 극복하고 살아날 수가 있었는데 하물며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에 모든 것을 지으신 그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다고 외치신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천연두가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두를 맞고 난 다음부터 그 우두의 백신 때문에 천연두가 사라졌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백일해를 앓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릴 때 다 홍역을 치뤘는데 어린아이들 요사이 홍역 주사 맞고 홍역 치르지 않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절망을 이기는 백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주사를 맞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절망의 병에서 완전히 치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을 동서양인, 아프리카인, 혹은 백인, 황인, 흑인,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남자, 여자 등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구분은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참된 구분은 살았다 하나 죽은 사람과, 살았다 하며 참으로 산 사람, 죽음에 이르는 병든 사람과 영생에 이르는 치료받은 사람, 절망을 안고 있는 사람과 희망을 안고 있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 버림받은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 등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분의 분기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의 영생의 백신, 희망의 백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절망에서 치료받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만 우리는 영생의 희망을 가득 가슴에 안고 삽니다. 절망의 고뇌 속에서 절망의 파도가 아무리 쳐와도 이 가슴속에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절망은 우리에게 부딪쳐서 깨어져 버리고 절망은 와서 우리에게 부딪쳐서 깨어져 버리고 절망에 엄몰되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절망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희망의 반석 위에 우리는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고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성공이 없고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자고 예수 그리스도로 깨고 예수 그리스도로 눕고 예수 그리스도로 사업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의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살았다하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그들은 절망의 무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진생이 아니고 가생입니다. 살았다 하면 참으로 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아버지, 예수님을 믿고 참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에 이르는 병든 사람 되지 말고 예수 믿어 영생에 이르는 치료받은 사람이 되고, 절망을 안고 절망의 무덤 속에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희망을 안고 기쁨 속에 사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원받지 못하고 살면 천년을 산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구원을 받고 살면 한 달을 살아도 참 삶을 산 것입니다. 버림받고 살지 말고 사랑 받고 살고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속에 영원한 치료제로서 영원한 백신으로서 들어가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