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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14. 주일설교 두려움 없이 사는 길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야훼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야훼의 집에 살면서 야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야훼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야훼를 찬송하리로다”(시 27:1~6) 할렐루야~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서로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계 계신 것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만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려움 없이 사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약 75가지나 되는 공포증으로 두려워 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공이론가인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은 두려움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자신감을 꺾어버리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열성과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나태와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이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들의 마음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스트레스는 모든 평안과 행복을 빼앗고 심신을 병들게 하며 생활에 낭패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포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길은 알아야 합니다. <본론> 1.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우리가 이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빈공간이 있어요. 우리는 영혼이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인데 영혼은 집입니다. 하나님이 와서 거하실 수도 있고 사탄이 와서 거할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이 빈집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있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 빈공간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조용한 시간에 여러분 속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내 속에 빈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의 마음에는 이 빈 공간을 세상과 마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마귀가 내 세상이다. 그리고 점령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빈집의 우환에 대해서도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그 빈 공간을 점령했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마귀가 점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아가 거의 space를 다 점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빈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 자기가 드러 앉아 있어요. 자기가 그 공간을 점령을 하고 하나님도 마귀도 없다. 내가 제일이다. 자기를 우상화해서 자기를 마음속 빈 공간에 우상으로 세워놓고 경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이처럼 육체와 마음의 욕심을 따라서 자기 충심을 점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공간은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와서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 각자 마음의 공간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단호하게 이 마음의 공간에서 마귀와 세상을 쫓아내고 자기 자신도 쫓아내고 예수님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었으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나는 장사 지내고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예수님이 이제 내 마음의 빈 공간의 주인으로 점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예수님이 보는 척도로써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생각해 보고 싶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도 이 문제에 해결책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말할 필요없이 그 마음의 공간을 마귀와 세상이 점령한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거짓되고 헛된 소리를 하지만 허풍쟁이지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골리앗은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고 그 마음의 빈 공간에는 마귀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원한과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그 군대는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될 것인데 자아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자기 자신, 자기가 우상이 되어 자기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 거대한 골리앗이 마귀가 꽉 들어차서 이를 갈며 나와서 도전을 하는데 사울과 그 백성들은 자기란 인간이 마음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서 비교해 보니까 이것이야 말로 메뚜기와 같다 말입니다. 도저히 골리앗과 자기가 비교가 안돼요. 골리앗을 비교하는데 자기 속에 있는 자기와 비교를 하니까 상대가 안돼요. 그래서 골리앗이 나오기만 하면 전부 나무 뒤에 숨고 언덕에 숨고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사무엘상 17장 11절에 보니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그런데 다윗은 와서 하는 말이 사무엘상 17장 32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그때는 다윗이 초립동이니까 13살 내지 14살 정도 소년입니다. 우리 요사이로 말하면 중학교 학생 정도지요. 초립동입니다. 그런 다윗이 형들 면회 왔다가 이 상황을 보고 이렇게 베짱 있는 말을 했습니다. 역전의 용사들이 다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데 다윗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다윗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나이는 어리지만 하나님이 그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를 많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 자기와 골리앗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과 골리앗과 비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은 하나님 앞에 먼지와 티끌 같지요. 블레셋 사람이 걸어 나오면서 다윗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군복도 입지 아니하고 목재의 재고인 지팡이 가지고 물매돌을 들고 나오니까 이것 뭐 사람을 어떻게 여기냐.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그 큰 장수로 보지 않았었습니다. 허풍선이로 보았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점령하고 계셨습니다. 2. 다윗의 신앙고백 그 블레셋 사람은 다윗을 보고 저주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1절로 44절에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앳된 소년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블레셋 사람이 모욕감을 느꼈지요.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말싸움입니다. 여러분 마귀와 싸우는 것은 처음 말싸움으로 싸웁니다. 우리 환경과 싸우는 것도 말싸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말 안 해도 환경이 그런 의미를 주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는가 이것이 전쟁의 시작인 것입니다. 마귀가 꽉 들어차 있으면 마귀가 항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면 마귀의 협박과 공갈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내 속에 하나님이 점령하고 있으면 마귀를 정복하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를 발길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말싸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5절로 50절에 보면 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말싸움을 하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싸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 서서 말싸움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말씀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너는 나를 사람으로 상대하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너를 상대하고 나간다. 골리앗이 다윗을 잘못 봤습니다. 다윗을 어린 소년으로 봤는데 실상은 다윗의 마음속 공간속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골리앗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오는데 옛날에는 여러분 이 투구를 쓰면은 눈만 딱 나옵니다. 다 가려서. 그러니 쇠로써 만든 투구를 쓰는데 요 눈만 딱 나오는데 눈 사이에 여기 안 맞추면 안돼요. 다윗의 기술도 물론 좋겠지만 하나님이 요사이 현대 말하는 미사일을 주신 것입니다. 유도 미사일을 주신 것 같습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탁 나오니까 블레셋이 보니 키가 한참 작습니다. 뭐 저런 것을 가지고서 나오냐. 창이 찌르고 화살이 와서 찔러도 꿈쩍도 안하는데 무슨 물맷돌을 가지고 오느냐. 그러나 물맷돌 돌려서 탁 놓으니까 휭 하면서 날라가서 요사이에 맞아가지고 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돌이 떨어졌다고 말 안합니다. 얼마나 이 미사일이 세었던지 구멍을 뚫고 들어가 버렸어요. 아무리 골리앗이라도 골속으로 돌멩이가 들어갔는데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뻗었어요. 그러자 다윗은 가서 블레셋 사람의 옆구리에서 칼을 뽑아내 가지고서 그 목을 베어서 그 머리채를 손에 잡고 드니까 그때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일어나서 고함을 치고 공격해 나오고 블레셋 군대들은 기가 막혀서 정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고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관이 다른 사람과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자기의 마음의 공간에 야훼 하나님이 와서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마음의 공간에 세상과 마귀가 들어와 있습니다. 인정하든 인정 안하든 세상과 마귀가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그 마음의 공간에 자기가 3분의 2 점령하였고 3분의 1쯤을 하나님께 내놓았습니다. 하나님 3분의 1쯤 밖에 그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셨는데 그를 위해서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 마음의 공간을 보면 마음의 공간의 집에 자기가 방마다 꽉 들어차 있고 저 현관에 조그마한 방에 하나님 계신 곳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서야 얘기가 안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열어 놓아야 돼요. 내 인생을 다 열어 놓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지금 앉아 있는 여러분, 제 설교를 듣고 있지만 여러분 저의 설교를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듣고 계십니다. 많은 성도들이 왜 나는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옵니까? 나는 왜 능력이 없습니까? 왜 마귀가 날 보고 쫓겨 나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속에 너무나 인간이 많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늘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우리들의 신앙고백 시편 27편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27편 같이 이런 하나님 말씀을 고백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저 사람이 마귀가 들어 있느냐. 자기가 들어 있느냐. 그리스도가 들어 있느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7편 1절로 2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가 이미 빛과 구원으로 내 속에 꽉 들어와 있으니까 내가 두려워 할 수가 없습니다.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마음에 비밀로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입술로 늘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힘이 있어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내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늘 믿지만 늘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구원의 힘으로 나를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마귀와의 싸움에서 늘 지는 것은 입술로 고백을 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편 91편 2절로 3절에 보면 기가 막힌 좋은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늘 이 다윗의 시편을 외웁니다. “내가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전능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그 손으로 너를 지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것을 입술로 고백해야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은 그 말 자체로 가지고서는 힘이 안됩니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 승리하려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워서 그것을 말하거나 잘 안 외워지거든 수시로 적어서 그것을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꼭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워 놓으면 훨씬 편리합니다. 나는 어려움만 다가오면 꼭 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요새가 되시고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니 저가 나를 새 사냥꾼의 올부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신다. 그러므로 사탄아 물러가라! 아무리 올무에 나를 집어 넣으려고 해도 못들어간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게 굉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전쟁은 눈에 안보이는 배후의 전쟁인 것입니다.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공격할 줄도 알아야 되고 방어할 줄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공격도 하나님 말씀으로 공격하고 방어도 하나님 말씀으로 방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을 말씀으로 내어 쫓아야 돼요. 시편 27편 3절에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말씀으로써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시편 56편 3절로 4절에 보면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찬송이 굉장히 좋은 것은 찬송은 곡조를 붙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 이 노래를 해서 그렇지 노래 안하면 내 주가 강한 성이요, 나의 방패와 병기가 되니 너희 원수가 어떻게 하겠느냐. 물러가라! 찬송은 바로 곡조를 붙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많은 찬송을 하면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많이 돼요. 나도 이영훈 목사처럼 목소리가 좋으면 찬송을 좀 부르겠는데 아이 설교할 때 찬송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빠서 찬송을 못해요. 그러니 우리 김성혜 총장이 저보고 하는 말이 “목소리가 나빠도 서두만 잡아라. 그러면 성도들이 따라서 올바르게 해 줄 테니까...” 이사야 41장 10절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정말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거짓말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여러분을 능력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이 세상에 평생을 사는 동안 언제나 바라는 것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환난 날에 나를 지켜주시고 원수들을 이기고 삽니다. 우리가 뭘 바랍니까? 환난을 이기고 원수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뭐 백 만 장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은 사람 별로 많지 않습니다. 병들지 아니하고 굶지 아니하고 잘 곳 있으면 만족할 수 있지요.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그런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종수 박사의 이야기를 감동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이종수 박사는 독일 본 대학의 교수로 간 이식 수술에서 세계 최초의 시술자인 것입니다. 그는 그 공로로 독일인도 되기 힘들다는 본 대학의 종신교수로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동양사람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심했었습니다. 그는 가운데 사람의 간을 떼어서 다른 사람 간에 옮겨주는 간이식 수술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하도록 했습니다. 독일의 의사들도 전부 안하려고 해요. 겁을 내서... 아무도 한적이 없으니까. 짐승의 간 이식 수술은 다 해봤어도 사람의 간이식 수술은 안합니다. 그러니까 동양 사람이고 못하면 쫓아내도 괜찮고 그러니까 이종수 박사에게 간 수술을 시켰습니다. 만약 그가 이 수술을 실패하면 본 대학에서 쫓겨나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수술실에서 간이식 수술을 마치고 환자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애타게 기도를 했습니다. 간이식 수술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시간이 그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고통을 주었는지, 이종수 박사는 그 때처럼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 번만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제발 환자를 살려주시면 다시는 의사로서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한번만요. 꼭 한번만요.” 간장이 타도록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그는 연구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보다는 연구 성과에 더 많이 집착 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수술을 해놓고 난 다음에 못 깨어나면 완전히 의사로써 파멸입니다. 그러나 당시 기도하면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의술보다는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서원하고 기도하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간 이식을 받은 환자가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깨어났습니다. 수술실에 달려온 의사들은 전부다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세계에서 피켜 스케이팅만 우리 한국이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간이식 수술도 제일 잘합니다. 우리 한국이 조그마한 나라지만 잘하는 것 참 많아요. 세계에서 손꼽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밀함을 추구하는 의사로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두려움을 쫓아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가지고 간이식 수술을 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환자가 살아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같이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너희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꼭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기독교 청년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롤링(Rolling) 박사는 아침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세 번 외쳤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 같으니 매일 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믿습니다를 세번씩 외치느냐. 그런 사람이 무슨 지도자가 되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롤링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내가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이 말을 가끔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세 번씩만 한다면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좋아하겠오? 안좋아하겠오?” 나는 우리 집사람이 나보고 하루에 세 번씩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하면 기분 좋겠어. 사랑하는데 왜 안 좋아요? 사랑을 고백하듯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나는 믿습니다를 세 번씩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이 고백을 듣고 굉장히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떠한 상황이라도 두려움 대신 평안과 기쁨이 담대하게 마음속에 채워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고 고백하라고 성경에 적었지 구경하라고 준것 아닙니다. 하나님 찬미하고 높이라고 우리 입을 주었지 입으로써 욕이나 하고 싸움이나 하라고 준 것은 아닙니다. 고백이 안되거든 찬송을 많이 하세요. 찬송은 곡조있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담대하게 여러분 신앙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시오. 강하고 담대하게.. 저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얼마나 많이 입으로 시인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말씀을 증거할 때도 굉장히 몸이 허약해서 오늘 도저히 군중들 앞에 못서겠다고 그러한 어려움이 있을 때도 수십번, 수백번 입으로 고백을 합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마귀가 와서 그럽니다. 백번 말해봐라. 무슨 소용이 있는가. 헛소리 하지 마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얻었노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 믿음대로 될지어다. 너는 나와 상관없으니 물러가라! 그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그러면서 집회 장소에 나가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도 “하나님 나갑시다. 주님 함께 갑시다.” 그것이 저는 저의 천성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여기 올라올 때 “하나님 함께 갑시다.” 왜 나 혼자는 못하니까. Dear Lord. Let's go together. Let's go together. 하나님께 함께 가자고 세 네번 말씀을 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함께 가자고 말 안하면 하나님이 함께 안하십니다. 그것 알아야 돼요. 우리 입술의 말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기도 하고 정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입에 있으니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란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다윗은 초립동이 거대한 장군인 골리앗을 말싸움해서 이긴 것입니다. 무기로써 안 이겼어요. 칼도 없었습니다. 활도 없었습니다. 무기로써 이긴 것이 아니라 말싸움으로 이긴 것입니다. 사울과 그 군대는 완전한 무장을 했지만 무엇에 졌느냐 말싸움에 졌습니다. 골리앗의 말에 간담이 녹아서 다 도망쳤지. 그러나 다윗은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말싸움에서 이겼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하나님 빽으로 말싸움을 해서 이겼습니다. 여러분도 말싸움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말싸움으로 이깁니다. 여러분 안되거든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몇 번이고 말을 하세요.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굉장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D. L. 무디(D. L. Moody)는 모세의 생애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모세가 처음 40년 동안은 공주의 아들로써 장차 바로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주 바로왕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고 난 다음 바로가 그를 죽이려니 도망을 쳤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가서 그 다음 40년 동안은 자기 비참함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나는 마른 막대기 같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버림받았다. 적막한 광야에 40년 동안 양무리를 이끌고 다니니 비참했었습니다. 그러나 불타는 가시넝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 마른 막대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똑같은 모세인데 자기 잘났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을 오히려 죽이고 도망을 쳤고 그 다음 알고 보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마른 막대기 같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마른 막대기가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능력의 원천은 우리가 일어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능력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도 “인간 자신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면 인간은 모든 것이 된다.” 내 혼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 맡겨 놓으면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조용기가 혼자 다닐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울산 촌놈입니다. 그러나 강단 뒤에 서면은 얕잡아 보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여러분 열 두 번도 더 변하잖아요. 사람을 의지하지 않을 때 조금 의지할 때 많이 의지할 때 전적으로 의지할 때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매일같이 100%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서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고 나아가면, 우리가 가진 그 이상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질그릇이지요. 우리 뭐 별것 있습니까? 그러나 이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 보배가 들어있으니 보통 인간이 아니지요.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은 조지 뮬러(George Muller)에게 기자 한 명이 항상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온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두 가지 비결이 있어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날마다 깨끗한 양심을 지켜 왔다는 것과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5만번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평생에 5만번 응답을 받았으니 기도한 것마다 다 응답을 받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조지 뮬러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남은 생애를 사는 동안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우리를 지켜 주시고, 모든 원수들을 이기고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롭기 때문에 우리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잘났기 때문에 우리를 쓰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해서 우리를 쓰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고 못나고 무력해도 하나님 어 너 양심이 곱다. 너 충성스럽다. 내가 쓰겠다. 그러면 쓰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믿고 구원받아 교회 나오게 하신 것도 여러분이 잘나서 나오게 한 것도 아닙니다. 만세전에 성령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택해 놓고 때가 오매 불러서 성도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 자세가 신기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배후에 끊임없이 하나님과 마귀와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하늘나라에 버림을 받도록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찌하든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원하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우리 자신을 봐서는 안됩니다. 내 이 초립동 뭘 하겠느냐? 사울도 다윗을 보고 “너 아직 초립동이고 너는 아직 군대 올 나이도 아니다. 너는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지 못한다.” 그러니 다윗이 “왜 내가 못 싸워요?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 새끼를 물고 가면 내가 달려가서 입에 있는 것을 빼앗았고 달려들면 주먹을 쳐서 사자와 곰을 죽였다. 사자와 곰도 내 주먹에 맞아 죽었는데 저 하나님 안믿는 블레셋 사람이 무엇이기에 겁을 내느냐? 사자와 곰 중에 하나가 되겠다.” 그렇게 용감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빽입니다. 세상에 빽이 있어도 어깨에 힘을 주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빽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빽이라고 믿으십시오. 요사이 성도들이 점점 살아있는 실천적인 믿음이 없어져서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빽으로 믿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빽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마음으로 다윗처럼 하나님을 빽으로 삼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게 여러분과 같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여러분 마음 속에 두려움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셔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평안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고개숙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서 불안, 공포, 좌절, 절망을 당할 때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하나님 우리 마음의 스페이스에 세상과 마귀를 섬기지 말고 내 자신의 우상을 세워 놓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마음의 스페이스를 점령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원하는데로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