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1. 주일설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1~6)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하나님 집에 잘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집이십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며 한주일 살다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아버지 말씀도 듣고 아버지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 요구도 하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에 찾아오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서론>
저는 여러분에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복음운동이 1999년 발표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95.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소원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독교는 33%에 불과하고, 62.5%가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입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95.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은 삶에 대한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언가 영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자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종교를 왜 가집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며 불안하니까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으니까 초인간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잠재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종교를 가질 수는 있지만은 그러나 종교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반드시 해봐야 되고 또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에 둘러싸여 있다 해도 그 순간에 죽음이 이를 향해서 돌진해 옵니다. 언제고 내 이 삶은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왜 살까?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안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삶의 한계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바르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나침반을 꼭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 망망대해의 인생의 바다에서 나침반이 없이 어떻게 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 앞길을 밝혀 주는 나침반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론>
1. 목적이 분명한 삶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취생몽사합니다. 술취해서 살다가 꿈같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왜 사는 이유를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갈 때 반드시 삶의 목적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 대학총장, 재벌, 예술가, 과학자, 군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높은 자기 인생을 종국적으로 끌고가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과학자, 목적이 있는 대학교총장, 목적이 있는 대통령, 목적이 있는 예술가. 무슨 목적이 있어야지요. 목적이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취생몽사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의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속에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한없는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알지 못합니다. 무식한 농부라도 밭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툭툭치고 일어나서 “휴우~ 사는게 뭐냐” 그러면 벌써 농부가 아닙니다. 철학자입니다. 종교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에 삶의 목적을 찾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느냐.
미국 기독교계의 지도자 존 맥스웰(J. Maxwell)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비전이 있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삶에 목적이 있어요. 삶의 비전이 있어요. 목적과 비전을 보고 달려가나 실패하는 사람은 현재 내 발등에 떨어진 불만 봐요. 현재 내 앞만 바라봐요.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목표가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지능지수, 학력, 성장배경 등이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7%는 목표가 없고, 60%는 목표가 희미하며, 10%는 단기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3%의 사람만이 분명한 장기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기목표를 갖고 있던 3%는 25년 후 사회 각계의 최고 인사가 되었고, 단기 목표를 갖고 있던 10%는 사회의 중상층 인사가 되었습니다. 목표가 희미했던 60%는 중하위 층이 되고, 목표가 없었던 27%는 모두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이끄는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처럼 큰 차이가 납니다. 또한 목표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목표를 얼마나 분명히 가졌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을 갖되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삶을 취생몽사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고 어둠에 허덕이지 않고 살려면 빛과 진리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데는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짓이 있는 곳에는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같은 인생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빛과 진리 속에 살아야 되는데 그 빛과 진리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안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 확신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의 죄책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사람들마다 마음에 죄책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써 죄책이 있고 엄마는 엄마로써 죄책이 있고 정치인은 정치인데로 죄책이 있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써 마음에 죄책이 있고 이 죄책이 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책을 매일같이 씻어내고 평안을 갖고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 죄 때문에 몸찢고 피흘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 앞에 기도하고 죄를 씻고 평안하게 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때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먼지와 때가 몸에 붙어요. 그러나 먼지와 때가 묻으면 목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욕을 안하고 먼지와 때를 묻혀놓고 있으면 그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은 다 죄를 지어요. 그러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 안하고 그냥 돌아다니면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고 용서와 마음의 의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모실 때에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생에 살고 있습니까?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삶의 의미와 진리는 바로 나다. 돈이 진리와 빛도 의미도 아니고 권력도 빛과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얼마 안있다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돈도 지나가고 권력도 지나가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목회하는 동안에 우리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을 수없이 만나고 가까이 대화를 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여러 가지 토론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꿈같아요.
이 세상에 인간은 누구든지 태어나면 사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죽었으나 천국에서 살아 있으니까 또 장차 만날터이니까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가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버지를 몰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아버지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현재와 미래를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미래가 다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있을 곳을 다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집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는데 영원히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인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있을 곳이 많고 우리 주님이 우리 손잡고 아버지에게 가서 인사드리고 아버지가 우리 위해서 예비한 천국 낙원으로 들어가 살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와같은 큰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러쉬 대학 병원에서는 1천 200명의 노인들을 인터뷰하며 인생의 꿈과 목적을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확실한 목표와 방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5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 속에는 삶의 호르몬이 나와서 스트레스를 중화시키므로 빨리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빛과 진리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와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되고, 죽음을 극복하며, 하나님과 함께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이 앞으로 영원히 살아갈 목표를 분명히 갖고 사는 것입니다. 목표가 이끄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표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하늘의 의를 먼저 구하면 그 이 세상에 사는데 있어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할까를 다 더하여 주겠다. 궁극적인 목표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늘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히 사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 있으면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을 내 마음에 궁극적인 목표를 삼고 살면은 무엇을 하든지 그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아버지여 도와주시옵소서. 결국 나 아버지 섬기는 자식 아닙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생명을 아버지여 구출하여 주시옵소서. 결국은 아버지를 내가 섬기지 않습니까?”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도 “아버지여 나에게 길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결국 나는 아버지의 자식 아닙니까?” 궁극적인 목표에 의지하여 살면 마음에 평안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봉사와 헌신의 삶
그 다음에 우리는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가치하게 살지 않고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인간을 사는 목표는 내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되 또한 내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웃 없이 나 혼자 못살지 않습니까?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일가친척이 있고 이웃사촌이 있고 우리는 이웃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참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가치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3-35)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왜 여리고로 내려갔습니까? 여리고에는 농산물이 풍부하게 잘됩니다. 농산물을 예루살렘에 가서 팔고 도로 여리고로 내려갈 때는 돈을 많이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도둑놈이 기다리고 있다가 돈을 빼앗기 위해서 거기 사람을 죽입니다.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무도 이 사람을 돌봐주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 보고 “왜 조심해서 다니지 무엇하다가 강도를 만나 얻어 맞가 죽게 되었나” 고개를 설설 흔들고 지나가 버립니다. 성전에 일을 돌보는 레위인도 와서 보고 고개를 흔들고 총총 걸음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이 개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고 그는 짐승에서 내려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기름과 포도주 밖에 없으므로 포도주를 부어서 소독을 하고 기름을 부어서 유하게 만들고 자기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서 감고 그리고 그를 자기 짐승에 싣고 주막에 가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봐주시오. 내가 일끝나고 돌아올 때 부비가 더 들었으면 내가 갚아 주리이다.” 굉장한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시고 누가 이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겠느냐? 말할 필요없이 선한 사마리아인인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욕을 얻어 먹고 무식하고 천하다고 했지만 그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동정이 있었습니다. 이웃이 고난을 당할 때 자기의 것을 가지고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참이웃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우리가 이웃과 인생의 짐을 같이 걸머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는 같이 울고 웃는 자와는 같이 웃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우리가 도와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관심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죽든 살든 나만 잘먹고 잘입고 잘살면 된다. 그것은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도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 밑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굶느냐. 이웃이 고통을 당하느냐. 이웃이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 하느냐.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오늘 인생을 살아가는데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한국이 36년 동안 일본의 수탈을 당하고 6.25사변으로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그 어려운 가운데 경제재건을 해서 국민소득 2만 달러에 도달하게 되니까 우리가 오늘날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사람들이 올데 갈데 없을 때 우리가 많은 헌금을 드려서 이웃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사랑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돕는 사랑의 손길을 계수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그냥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꼭 친정 어머니가 딸네 집을 돌아갈 때 “자, 이 포대 이것 열어라. 그리고 밀이나 쌀이라도 대어서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해서..”“아이 엄마 그러지 마라. 시어머니 보면 큰일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행복 나누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이 사회에 밑을 들여다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2년 동안 은퇴하고 난 다음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고 사랑을 함께 나눠주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는지 몰라요.
마태복음 25장 35절로 40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때 의인들이 말하기를 “주님 언제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습니까?” “내가 이 적은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한 것이다.” 몰인정하고 무정하게 사는 사람은 “주님, 언제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어서 옥에 갇힌 것을 보았습니까? 우리 그런 것 못보았는데요?” “이 적은 사람 한 사람에게 안해준 것이 내게 안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주님이 창조한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과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도와줄 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도움을 베풀어 준것이라고 했으니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우리가 도와주려면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엇을 도와줍니까? 사마리아인이 뭘 가졌습니까? 여행할 때 마시려는 포도주하고 그 기름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기름은 하도 태양이 비취니까 피부가 건조해지므로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제게 가진 것이라곤 포도주와 기름밖에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 도와줬다.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기름으로 유하게 하고 입은 옷 찢어서 두루마기를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으로 도우라고 하지 없는 것으로 가지고 도우라고 말안합니다. 이웃을 도와줄 때 내게 있는 것으로 광야에 나갔을 때 남자만 5천명, 부녀자 기만명이 왔을 때 예수님이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조금씩 이 사람에게 줄지라도 3백데나리온이나 되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린 아이의 보릿떳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상점에서 파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만드는 형편없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은 있는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서 축복해서 주니 5천명, 부녀자까지 합쳐서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이웃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으로 도우라는 말 안합니다. 제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에 나가면 여러분이 물질로도 헌금하지만 실제적으로 옷도 주시고 신발도 주시고 약품도 갖다 주는데 있는 것을 내놓으면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이웃을 도와요. 그것만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요한일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 돌본다고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진실함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 7절로 10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말미암아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복받은 사람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복을 더 많이 받는 길인 것입니다. 나는 복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더 복을 받습니까? 복을 나누어 주면 더 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복을 나누어 주지 아니하면 있는 복도 뺏기는 것입니다.
1800년대 중반에 스위스 출신의 실업가요 은행가인 한 사람이 더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 3세가 있는 불란서로 갔습니다. 그의 야망은 나폴레옹 3세를 만나서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맺고 유럽 대륙의 부의 중심부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 황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이미 이탈리아 북부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따라 전선으로 나갔다가 치열한 전투의 장에서 양국 군의 시체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이 전장을 떠나면서 그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새로운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아가 그는 민족과 인종을 뛰어 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이 사람이 바로 적십자 운동을 창시한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 이었습니다. 원래는 돈벌이하러 갔다가 전장터의 비참한 부상당한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세계 적십자사를 만들어서 적군이나 아군없이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이 적십자 운동을 통해서 세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적군이나 아군의 사랑과 도움을 받은 것이 이루 말로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까지 뛰어들었던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의 올바른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고통 받고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어느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안 뜰에는 교인들이 돈을 모아서 예수님 상을 만들어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서 예수님상이 깨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잿더미에서 예수님 상을 일으켜 보니 두 팔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두 팔이 잘려나간 예수님의 몸둥아리만 있는 동상을 갖다 놓고 교회에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깨뜨려서 새로운 동상을 만드느냐. 하나는 팔 두 개를 만들어서 갖다 붙이느냐. 안그러면 팔 없는 예수님 동상을 그대로 세우느냐. 격렬한 토론한 끝에 교인들이 동의한 것은 팔 없는 그리스도의 동상을 그대로 세우자. 그리고 난 후 그 밑에 이런 글을 적어 놓자. “주님은 팔이 없습니다. 당신의 팔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팔을 통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팔을 빌려주십시오.” 그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 동상에 서 있는 사람마다 그 동상보고 자기 팔을 봤습니다. 주님이 내 팔이 필요하다. 동상에 없으니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인데 사랑을 베풀라고 하니 내 팔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여기 있는 이 팔로 주님의 일 안하면 안되겠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일해야 되겠다는 심정이 들어오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그 사회에 크게 기여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했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두 팔이 되겠다는 각오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가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고 행복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가치 있는 삶
그 다음에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이제 내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제1차 목표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섬기고 셋째는 자신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섬겨서 가치있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월은 빨리 갑니다. 세월이 지나가기 전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90편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세 가지만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활을 시위에 당겨서 탁 쏘면 화살이 한번 날라가면 다시 안돌아옵니다. 돌아와. 돌아와. 화살이 돌아와. 안돌아옵니다.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말 한번 하고 담지 못하는 것은 참 고약한 일이지요. 제일 정치가들이 조심해야 될 것은 입을 조심해야 됩니다. 한번 뱉어 놓는 도로 걷을 수가 없어요. 세 번째는 시간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단 잃어버린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시간을 정말로 아껴쓰고 행복하게 써야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 내 인생을 너무나 헛살았다고 탄식을 하면 얼마나 절망인 것입니까? 시간은 우리 삶 자체이며 우리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낭비 중에서도 가장 큰 낭비가 바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로 17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의 뜻을 알아 가치있는 일로 인생을 보내야지 무가치하게 세월을 보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산다는 것이 우리가 자기가 정말 후회하지 않고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자기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낭비하고 보내버렸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50년 목회를 뒤돌아보면서 마음에 후회가 없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50년 동안에 보통 사람은 다섯 번 5년간 휴가를 가집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휴가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50년 간에 70만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 자고 깨고 쉬고 휴가가고 했다가는 그 못해요. 밤도 없고 낮도 없고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고 겨울도 여름도 없이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괴로웠는데 지금은 지나고 보니까 휴가갔다가 와서 사는 저나 휴가도 못가고 목회하는 나나 같아요. 그때 나보고 휴가도 안가고 그렇게 산다고 좋은 일이 있을까 보느냐.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그 친구들하고 나하고 만나보면 나는 과거를 돌아볼 때 후회할 것이 없고 만족하고 감사한데 그 친구들은 굉장히 후회가 많아요. 이것도 해볼걸, 저것도 해볼걸... 미병이 들어서 늘 걸걸 거리지만 나는 걸걸 거리지 않아요.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맡든지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로 23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내가 사람을 섬기는 것도 주님을 섬기듯이 충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노? 사람보고 알아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내 양심이 알고 하나님이 알면 되었어요. 반드시 그 충성은 그 보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004년 4월 “2003년 올해의 아름다운 중국 청년상”이라는 시상식이 중국에서 있었는데 한 젊은이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장원청 (張雲成)으로 25세인 그는 앞으로 3년 정도 밖에는 살지 못하는 근육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중국사람입니다. 장원청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글씨를 터득하고 작가의 꿈을 향해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가 글씨 한 자를 쓰는데 무려 6분이 걸렸습니다. 한자 글자 한자 쓰는데 6분이 걸려요. 하루에 그가 쓸 수 있는 글자수는 77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17만 자의 육필 원고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13억 중국인들은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어머니의 가녀린 어깨에서 무거운 물통을 내려 내 어깨에 지겠다. 또한 전력을 다해 일하고 돈을 벌어 어머니가 가장 드시고 싶어 하면서도 비싸서 차마 못 사 드시는 바나나를 사드리고 행복하게 모실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삶이 얼마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라면 주어진 생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내가 더 오래 사는가 생각 안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를 더 오래 살든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 와 케슬러(David Kessler)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받아 적어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생수업」이라는 책인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즐겁게 지낸 놀이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죽을 때 마지막 기억나는 것이 인생을 살 때 즐거워했던 그것이 마지막 기억에 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인생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지 못할 때 이들은 가장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기쁘게 살고 행복하고 살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 죽을 때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 책에서 우리의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삶의 한계점이 있기 전에 지금이라도 빨리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우선 사는 목적을 분명히 안 후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봉사와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하고, 항상 매일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참으로 후회하지 않는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었고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존재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어서 우리 개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원망하고 탄식하고 가슴치고 울고 슬프게 살아서 뭐합니까?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전도서 3장 12절로 13절에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 이것 하나님의 선물인줄 알라. 수고하고 사는 인생 중에 낙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평, 원망, 탄식하고 살면 인생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부부간에 살아도 아내가 남편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 협조해 주고 남편도 아내가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 협조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섬기라고 하고 내 중심으로 내 고집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인생이란 같이 협동해서 사는 것이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협조해서 사는 것이 인생이지. 내가 걸어가는데 전부 끌려오라고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울 때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은 요사이는 그렇게 살면 안돼요. 요사이 젊은이들 그렇게 사는 젊은이들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지금이라도 여러분 생활의 방향을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십시오. 많이 웃고, 많이 감사하고, 시간있으면 친구들하고 놀러도 많이 가요. 관광도 많이 가시고...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게 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올해 정년 퇴임한 국제정신분석가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교수님 중에는 고함지르고 욕도 하시는 매우 무서운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심지어 수술 중에 실수한 레지던트를 때려서 발로차서 내쫓았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수술실력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찬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일 예배 시간에 헌금 위원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무석 박사가 교수님을 만나 그 경위를 묻자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어. 비과학적이라 생각했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말기 암 환자들이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욕을 하며 불안에 떨다가 죽어 가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 그분은 지독한 통증을 잘 참으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어. 내가 회진 나가면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했어. 나는 그때 나라면 저렇게 죽음 앞에서 편안할 수 있을까? 저분에게는 무언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 그분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지. 그후 주위를 살펴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다르더라.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데 대해서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분의 영향이 제일 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결론>
인간은 누구나 삶의 한계점인 죽음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며 가치있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미소지으며 감사하고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안죽는게 제일 좋은데 그러나 죽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다 죽거든요. 사람은 어찌할 수 없이 죽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증명하시오. 당신 그 말했으니까 증명하시오. 당당히 증명했지요. 죽은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에 있는 것을 나사로야 나오라!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일어났습니다. 증명했어요. 예수님 안에서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는 여러분은 죽음은 쇼에 불과한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 이미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죽음이 없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불과하지.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 체험에 불과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히 알면은 죽음이 다가오면 조금 두려워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입니다. 성령이 위로해 주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고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첫째로,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자. 둘째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자. 셋째로, 가치있는 삶을 살자. 그렇게 하면 올바르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드리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다 죽어야 됩니다. 이 한해가 지나고 나면 이 교회에 와 계시는 분 중에 많은 분들이 이 교회를 떠나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야 됩니다. 믿음이 없이 죽음의 노예가 되어 산다는 것은 너무나 비극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모두다 예수 믿고 구원받게 도와주시옵시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