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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8. 종려주일설교 예수님의 고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 53:1~8) 할렐루야~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저는 이 예언을 읽어볼 때 마음에 굉장한 감동이 됩니다. 700년 전에 이사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할 것을 소상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본문 말씀은 메시아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부 폴리갑은 이사야 53장을 가리켜 ‘복음 기자의 황금 같은 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석가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을 ‘구약성서 예언의 가장 중심부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이사야 53장 말씀으로 ‘수난의 어린양’을 작곡하던 중 펜을 멈추고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고 있습니다.”라며 울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처받은 치유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기가 상처를 받아서 고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자가 우리를 치료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도 주전 600년에서 700년 전에 예수님의 일생을 환상 중에 보며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받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본론> 1. 출생과 환경의 비천함 이 예언서를 통해서 보면 그의 태어남과 외적 환경의 비천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연한 순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고 했습니다. 비유컨대 연한 순이라는 것은 굉장히 허약함을 말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봄이 되면 식물의 순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이 밟아도 부러지고 사람이 밟아도 부러지는 아주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연한 순같이 아무런 힘도 없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아서 너무나 척박한 환경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그러한 나무 뿌리같다. 그의 생활이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고 한 것입니다. 벌써 어린아이로 태어날 때부터 야~ 그놈 잘났다. 잘 생겼다. 훌륭한 사람 되겠다. 그렇게 우리가 종종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아이때 고운 모양도 없고 당당한 인물이 될 풍채도 없고 너무 빈약하여서 이사야가 보기에도 감탄하고 존경할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보다 못났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어린 아기를 업고 나가도 아무도 어디 보자~ 와~ 그놈 잘생겼구나. 그렇게 할 상대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가 없은즉 아무도 흠모할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인간으로 주님은 태어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절로 7절에 보면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사야가 예언한 것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대한 인간들의 대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사회에서 자라면서 인간들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제도와 조직 안에서 그는 설 곳이 없었습니다. 엄격한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하에 예수 그리스도는 몸부칠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간난신고를 많이 당했으며 병자들만이 그를 따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안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가면 병든 사람들은 백중백발로 다 나으니까. 앉은뱅이도 절름발이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장님도 다 나으니까 이단이라하든 삼단이라하든 낫고보자.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따라다녔어요. 그러나 유대인 충청의 사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해 버리고 얼굴을 가리고 존경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완전히 외로웠습니다.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유대인의 사회 속에서 그는 완전히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오직 거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힘없고 능력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평범한 사람, 중류사회의 사람들은 완전히 예수님 무시했었으나 예수님이 병은 다 고쳤으니까 보면 놀랍습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입니다. 한두가지 병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약한 것입니다. 한 두가지 약한 것이 아니고 모든 약한 것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필요 받으러 줄을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왔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나오면 고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고침받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초대 목회에 치료받은 사람들처럼 오늘날 치료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수많은 영육간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는 성령을 통해서 치료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치료해 주었으나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이 없고 아무도 의지할데가 없었습니다. 머리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했었습니다. 3.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과 사명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과 사명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우리의 질고를 몸에 짊어지고 그로 인한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이 진정한 예수의 모습입니다. 우리 질고를 몸에 짊어지고 질고 때문에 다가오는 슬픔을 당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우리 병든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병을 주님이 몸에 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슬픔을 예수님이 함께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몰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여 징벌로 삶의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게했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삶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고통에 통참하였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 미워해서 고난당하게 만들었다고 그렇게 생각을 잘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상,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 자체가 우리의 죄악을 온 몸에 짊어지고 그로 인하여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깊은 고통과 슬픔을 마음에 당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이 안보이니까 누가 아나. 그 고통 당하는 것 누가 알아? 인정하지 않았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로 20절에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저 단순히 십자가 형틀에 달려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수님 시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은 제일 마지막 순서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앞 순서에 많은 고문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당시 죄인에 대한 형벌은 심한 채찍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채찍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에 박혀 당기면 살이 찢기고 뼈가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엄청난 것이어서 매를 맞다가 그 충격으로 죽는 죄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통 가운데 자신이 못 박힐 2미터 길이의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사형당할 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십자가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캔버스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하워드 매츠키 교수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의 체중이 두 손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많은 피를 쏟으며 통증이 극심합니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늘어져 팽창하므로 호흡장애를 일으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으니 몸에는 산소가 부족하여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몸을 조금 위로 조금이라도 치켜 올리려고 하면 이 때마다 체중이 발등에 꽂힌 못에 실리게 되어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고통을 주님은 6시간 당하시고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내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당하신 이러한 고난은 아담 이후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이생의 자랑과 욕심에 따라 제각각 탐욕의 길로 가고, 예수님은 이 모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 받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사야 53장을 읽던지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읽을 때마다 늘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은 나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오시고 고난 당하시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 대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올 필요도 없고 고난 당할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 매달릴 이유도 없습니다. 내 대신, 나 때문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의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 대신하여, 여러분을 대신해서 주님이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삶과 그 은혜를 통해서 공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4. 예수님의 대속의 삶과 고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과 고난의 의미를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위해서 찔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 인함이요 머리는 가시채 찔리고 손발도 가시채 찔리고 옆구리도 창으로 찔렸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5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과 죄로 우리는 영원히 죽었어요. 육체만 살아있지 영적으로는 죽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함께 살렸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로 함께 살려 주셨다.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여러분들은 오늘 모두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함께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 것입니까? 또 성경은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마음이 상하고 육체가 상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죄를 인하여 상해서 그 고통중에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께로 나갑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갑니다.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여러분 보세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예수님을 죄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냥 죄지은 것이 아니라 죄덩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너는 죄다. 나의 죄를 고스란히 그대로 인수인계 받아서 예수님이 죄가 되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 자체가 되었어요.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생에 한 번도 죄를 안 지은 상태가 의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수 없는 그러한 상태가 의입니다. 엄청난 의로운 의가 우리 힘으로 됩니까? 예수님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의가 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성화(聖畵)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을 그린 것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서서 울고 있거나 탄식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 표정이 하나같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의 한쪽 구석에는 이천 년 전 당시의 유대 사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현장에, 거기에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그 곳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돌아가신 모습을 그릴 때 자기가 그 곁에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시간은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때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나 때문에 죽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 옆에 그려 넣은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님 나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나와 분리하고 따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렘브란트처럼 예수님이 죽는 그 자리에 내가 같이 있었습니다. 2천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 여러분 다 같이 있었어요. 여러분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지은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걸머지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의 죄악을 온 몸에 짊어지고 그로 인해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허물에서 해방되고, 평화를 얻고 치료와 건강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삶으로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 당시에 보통 죄인들 채찍을 40대 때리는데 40대 이상 때리면 죽어버린답니다. 그 40대까지는 거의 죽은 상태까지 때리는데 그 채찍 끝에 쇠고랑이나 뼈조각이 붙어 있어서 살을 파고 들어오는 것을 채찍을 때리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갈비뼈가 상합니다. 그 억센 고통을 예수님이 당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고통 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얻어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병들어 있을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는데요. 갈기갈기 살이 찢어지고 뼈가 상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를 깨물고 주님이 참은 것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병을 짊어지고 있으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은 것은 헛되고 말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믿고 나아야지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2천년 전에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지금 바로 여러분 곁에 채찍 맞은 그대로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 맞은 모습을 보고 나는 나아야지.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여러분이 지금 병을 앓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우리가 이해하고 꿈꾸고 믿고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마태복음 8장 16절로 17절에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예수님의 사역에는 “다”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치고 어떤 사람은 안고쳤다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시고 다 고쳤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병든다는 것은 참 고약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분명히 날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졌는데 나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병들어있다. 예수님께서 “야, 내가 너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고 채찍에 맞았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안 일어나거든. “왜 안일어나니?” “안믿어져요.” 안믿어지는 것 참 절단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철야기도 인도하는데 철야기도회를 인도하고 병자를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학생이 극심한 위궤양으로 병원에 치료를 받아도 낫지 못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제게 와서 사무실에서 몇 번이나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어요. 그런데 금요일날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 앉으라고 했는데 그는 서서 “예수님 이름으로 나는 나았습니다. 오늘 저녁에 깨끗이 되어 나았습니다.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구 안믿어지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아직도 그 탄식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써도 안 믿어지니까 나았다고 고함을 치고 난 다음에 아이구 안믿어지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내 믿음을 내가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학생이 나중에 위궤양에서 낫고 신학교 들어가서 목사가 되어서 부산에서 목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 십자가 고난의 총체적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당한 총체적인 의미가 바로 이사야 53장 6절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아닌채 탐욕의 길로 다 나갔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았어요. 전부 탐욕의 길로 왔습니다. 이 모든 죄의 책임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짊어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왜냐하면 이 고난이 하나님의 아들조차 두려워하는 고난입니다. 얼마나 혹심한 사형제도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예수님도 하나님께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이 고난 안걸머지면 여러분과 나는 우리 죄 때문에 다 영원히 지옥에 가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흘만 고통당하면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사망을 철폐하고 나올 수 있는데 우리는 3일이 아니라 3년이 아니라 3천년, 3억년, 3조년 영원히 못 갚을 죄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므로 여러분과 나와 다릅니다. 우리 형상으로 오셨지만은 죄 없이 왔어요. 죄의 값이 사망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은 안 죽을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자원해 십자가 안 짊어졌으면 엘리야와 같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슬람대학에 가서 채플을 인도한 적이 있는데 내게 말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3일간 무덤에 있다가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같이 죄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아요?” 예수님은 하늘로 산채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그러나 그분은 구원을 몰라서 그런 소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죄가 예수님에 의해서 청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으면 우리 구주가 안됩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청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8절에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는데 그 세대 중에는 왜 예수님이 곤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한 것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 될 허물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고통 당했다는 것을 그때 사람들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로 31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시인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변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변화를 안받아요. 옛날 거짓말 그대로 하고 옛날 깡패노릇 그대로 하고... 분명히 교회 나와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구원은 받았는데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구원만 받을 뿐 아니라 변화가 꼭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와 허물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 술 취하는 것, 아편 중독, 도둑질하는 마음, 욕하는 마음, 이러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청산되어 버리고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고 나의 거룩과 성결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돼요. 내 힘으로 변화 안됩니다. 예수 믿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 갖다놓고 종아리를 때려 가면서 변화시키려고 해도 육체는 변화 안됩니다. 협박, 공갈을 하면 겁이 나서 좀 움츠렸다가도 그 다음에 조금 놓아주면 또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삶이 변화 되어야 돼요. 그것은 주님이 직접 성령으로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엣날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옛날 우리는 지나가 버리고 누가봐도 새것이 되었다. 내가 봐도 내가 새것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내 속에 들어오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통해서 내 모든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저주를 짊어지고 갔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고 그런 변화된 내 모습을 꿈꿔야 되고 믿어야 되고 나는 변화 되었다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새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을 변화시키지 여러분 힘과 결심으로는 안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덧셈, 뺄셈도 하지 못하는 유치원 어린이가 선생님께 미분 적분을 가르켜 달라고 하면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어린아이보고 허허 웃고 말지 말할 수가 없어요. 더하기도 보태기도 빼기도 잘 못하는 애가 미분 적분을 어떻게 압니까? 설명해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가 우리에게 상대성 원리를 설명해 주어도 수학과 물리학에 문외한인 우리들은 그 말이 무슨말인지 못알아 듣습니다. 아인슈타인 혼자 자기 혼자 말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잡생각만하지 못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피조물인 우리가 일일이 내용을 안다고 하면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낫낫이 알아요. 하나님도 우리가 못알아들줄 알기 때문에 그냥 믿으라고 합니다. 그냥 눈딱감고 믿으라. 밥을 먹는데 뭐 단백질이 얼마이고 탄수화물이 얼마고 비타민이 얼마 들었고 그것 다 알아야 먹는다면 오늘 굶어야 될 사람 많습니다. 무조건하고 먹으면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알아서 영양분이 섭취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룻배가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인간의 조그만 가슴이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다 담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게 많이 듣고 그렇게 많이 공부를 했는데도 끝까지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섭리 안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려고 하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모릅니다. 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택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시고 가르치시고 또 가르치시고 꾸짖으시고 성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사야 53장 10절로 12절 우리가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나를 위한 삶인 것입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당하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는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원 구원 하셨으니 아무리 우리가 감사해도 감사를 다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날 대신하여 주님이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내가 조용기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조용기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내가 대신했습니다. 장부를 보십시오. 빚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다 청산했는데요.” 그러니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주의 보혈이 여러분과 나를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 감격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을 잊지 마십시오. 매일같이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매일같이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용서와 의로움을 얻었다. 예수님이 나의 불의와 추악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나는 성결함을 얻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다. 저가 나의 저주를 걸머지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 저가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부활과 영생을 내게 주셨다. 그것을 자꾸 입으로 외우십시오.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변화된 여러분을 꿈꾸고 믿고 입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시인하면 여러분은 새로운 인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지나가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현재 안기쁘고 안행복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여러분 희안하게 행복해지고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복해지고 기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3차원의 세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맛고 맛보는 이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초월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꿈과 믿음과 입술의 시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괴로운 것이지만 부활을 위해서는 십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있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가 믿고 가슴에 받아들이므로 여러분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이 자랑하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잠시동안 고개숙여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는 죄사함도 받지 못받고 구원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고난 당하시고 죄를 청산하시고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슴 한가운데 늘 와서 계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늘 바라보고 새사람된 나를 시인하고 바라보고 믿고 주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새사람으로 살고 옛사람으로 살지 않고 도와주시옵소서. 언제나 천국 속에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천국의 행복과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