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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24. 주일설교 마라의 쓴 물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출 15:22~26) 할렐루야~ 오늘 좋은 날입니다. 주님이 우리 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예수님 장난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경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일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마라의 쓴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 생애를 들여다 봐도 광야는 다 있습니다. 큰 광야, 적은 광야, 광야의 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삶이 험하고 고통스러운 광야라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광야를 극복하고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그 속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광야의 모든 험한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중년 남자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특별히 40에서 50대 남자들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죽습니다. 이시하라 우유미가 쓴「재테크보다 남편 건강을 먼저 챙겨라」는 책을 보면 한국 남자의 사망률이 여자의 사망률에 비해서 두 배나 높고, 특별히 40대, 50대 남자들의 사망률은 여자보다 세 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의 중년 여성들은 과부 안되려고 조심을 해야 됩니다. 남편 잘 관리해야지 조금만 잘못하면 과부돼요. 왜 그러느냐 남자들은 직장에서 선배나 상사의 눈치 보기에 굉장히 고달픕니다. 그리고 밑에서 언제 치고 올라올 후배들을 견제하는데 또 굉장히 신경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IMF 이후에 퇴직의 압력과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서도 과거에 집에 돌아오면 어험~ 아버지 왔다. 그렇게 허세라도 부려볼 수 있었는데 요사이는 자식 새끼 앞에 꿈쩍도 못합니다. 집에 오면 자식이 어른인 것입니다. 자식 비위를 맞춰야지 안되거든 그러니 집에 와도 별볼일 없습니다. 통계청이 2004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사망 원인을 보면 사망 원인 1위가 간 질환으로 54%나 된다는 것입니다. 간질환이라는 것은 고달파서 드는 병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서 드는 병입니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54%, 그러고 사망률 2위는 자살입니다. 43%나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살하는 사람이 43%나 되면은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자살을 자꾸 하라고 사주하는 마귀의 꾀임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지 안그러면 자살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위는 간암으로 35%, 4위는 뇌졸중으로 28%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남자들이 생존경쟁이 치열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위에서 짓누름을 당하고 밑에서 쳐올라오고 환경을 이겨나가기 위해서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분노 속에 휘몰아쳐 들어가고 이러한 생활 속에 간이 나빠지고 고혈압이 되고 신경통이 되고 우울증에 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쓴 물인 이러한 스트레스와 미움을 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끌어 안아야 돼요. 오늘도 우리 사랑과 행복나누기 교회 내 신문에 적은 우리 장로님의 간증을 읽어보고 내가 굉장히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장로님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그 아내와 이웃의 꾸준한 전도를 통해서 교회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가 세상에서 겪는 그 무서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다 극복할 수 있고 그리고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기도가 있으니까 속에 있는 모든 질병이 배설물로 다 나오고 깨끗이 나았다. 병원에 검사하러 가니까 우리 장로님 자신이 놀란 것이 아니라 의사가 더 놀래요. 당신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서 오느냐고... 어떻게 살았냐고... 교회가서 예수님을 믿고 주님 십자가에 의지하고 살았다. 하나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마라의 쓴 물과 나뭇가지 그러면 성경에 기록한 마라의 쓴물과 그를 달게 한 나뭇가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배경이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출애굽기 15장 22절로 25절에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한다.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고는 열흘 까지는 살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 반쯤 되는 사흘길을 물을 못마셨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또 더구나 해가 쨍쨍 비취는 광야길을 걸어가면서 물을 못마셨으니 더 괴롭지요.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하니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신 사람마다 뒹굽니다. 배를 안고 뒹굴어요. 그래서 모세가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하나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 백성을 제게 맡겨 주셨는데 광야로 데리고 나왔으나 물조차 없으니 어떻게 이 백성을 이끌어 갑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바로 그 연못가에 한 나무를 지시하신지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져 넣으니 물이 달아져서 모두다 배불리 물을 마셨다. 그런데 여기보면 쓴연못물이 있으면 그를 달게 하는 나뭇가지도 있어요.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해답도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문제가 너무나 크게 다가오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오면 해답도 온다. 쓴 연못이 있으면 그를 달게 하는 나무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나무를 예비해 놓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신학자인 몰트만 박사가 희망신학에 관해서 제가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가 한국에 와서 저하고 만나가지고서 신학적인 토의를 했는데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자기가 희망신학을 주창하게 된 이유를 말했습니다. 독일이 영국과 미국과 전쟁을 할 때 징집을 했는데 그가 17살에 2차 대전에 독일의 군인으로 일선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서 영국의 포로 수용소에서 있는 동안에 나치 독일이 망했으니 나라도 없고 자기는 소식을 들으니까 함부르크 자기 고향이 폭격을 당해서 도시가 다 타버렸고 가족들이 다 죽어 버렸다. 나라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척도 다 죽고 이 세상에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자살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그 수용소 내에 차를래인 목사님이 성경책을 한권 주시기에 마지막 읽어 보자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읽어보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먹여주고 치료해 주고 돌봐준 사람 앞장서서 예수님을 팔아먹고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넘어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세상을 뜨고 무덤에 들어간지 사흘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해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마음에 크게 감동을 느끼고 절대절망해서 예수님이 절대소망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시구나. 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내 생애 속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뀔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한 믿음이 생겨서 그 수용소에서 무릎을 꿇어서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죽으신 것 저도 같이 죽습니다. 주님 부활하신 것 저도 같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죽음 내 죽음, 예수님 부활 내 부활로 받아들이고 시인한 결과에 마음에 굉장한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고 기쁨이 와서 죽으려고 하는 것 다 포기하고 그는 살기로 결심하고 수용소에서 나중에 해방되어 나와서 신학을 공부해서 세계적인 희망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그런 절망에서 해방이 된것처럼 나도 절망에서 해방되어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나는 폐병으로 죽게 되었다. 6.25사변 동안에 처절한 전쟁 속에 치료도 받을 수 없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나에게 별로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 전도를 받았다. 누님 친구가 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전부 대대로 불교집안으로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왜 내가 귀를 기울이냐면 사람이 죽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그때 아무리 우리 집안 종교에게 손을 비비고 절을 해도 깜깜 무소식이에요.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직 기도 안해봤으니까 예수님께 한번 기도해 보자. 날 전도한 누님 친구가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 기도를 응답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시면 나도 이 절망 가운데서 살아 일어나서 주님을 섬기겠다고 했는데 진짜로 열이 떨어지고 기침이 그치고 피를 토하지 않게 되고 나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위르겐 박사 보고 당신이 당한 절망은 정신적인 절망이고 내가 당한 절망은 육체적인 절망이었다. 하나님은 정신적인 절망도 고쳐 주시고 육체적인 절망도 고쳐 주신다. 당신 신학자 되고 나는 목사되고 우리 조금 서로 신앙의 차이가 있어도 싸우지 말자. 둘이 다 절망에서 구원 받았으니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기도 시간이 모자른데 우리가 신학적으로 뭘 다투겠냐. 그때부터 저하고 굉장히 좋은 친구가 되어서 전화로써도 늘 안부도 묻고 그가 한국에 나오면 꼭 나를 찾아오고 나에게 전화연락오고 내가 구라파에 가면 거기에 전화하고 연락오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롭고 처절한 절망에 처하더라도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 생애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들을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저를 구주로 모셔 들이면 주님은 십자가의 부활하신 능력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절망을 다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절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사가 되고 난 다음에 지금까지 50년 넘게 복음을 증거할 때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절망이 사라지더라. 내가 먹어보고 입어보고 내가 체험해 보니 예수님의 부활은 진짜더라. 그래서 제가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나무를 던지면 달아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쓴 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느끼는 모든 고통과 절망의 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에 의하여 완전히 달게 변화되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무는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 구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 바라보고 영접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그대로 들어와서 여러분 속에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2. 삶의 쓴 물과 십자가 둘째로, 인생 삶의 쓴 물과 십자가의 나무를 우리는 비교해 보면 마음에 굉장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나무를 통해서 제가 늘 주장하는 오중복음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오중복음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9절에 보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오면서 하나님께 엄청나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불뱀을 명하사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하매 광야에서 불뱀이 그렇게 많이 모여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매 그들이 다 뱀의 독이 올라서 죽어갈 때 모세에게 부르짖어 살려달라고 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나음을 얻으리라.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구리뱀을 만들어 가지고서 장대에 높이 달아 쳐다보면 낫는다고 합니다. 백성들에게 전달하니 백성들이 독이 올라서 숨이 넘어가면서도 그 불뱀만 바라보면 깨끗이 나아버려요. 거짓말같이... 아~ 나는 안쳐다본다.! 그러면 죽었어요. 그러나 어떠한 사람도 그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고침을 받았어요.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지금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쳐다만 보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 보통 세상 말로 와따가 아니에요.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님을 안쳐다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장대에 매달린 예수님을 쳐다보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나무가 우리에게 죄악의 쓴물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아무리 쓰디쓴 물로 꽉들어차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인하여 죄가 다 사함을 받고 쓴물이 달아지듯이 쓴 죄악이 의롭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의의 쓴 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불의의 쓴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용서와 의로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씻어서 거룩함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점령하신다. 주님만 쳐다보면 우리 더러움이 씻어지고 거룩하게 되고 주의 성령이 와서 우리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손잡아 이끌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의 쓴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우리가 심신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더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에 맞은 공로를 십자가에서 바라보면 주님의 치료의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치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의 쓴 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산새도 머리 둘 곳이 없지만 인자는 몸둘 곳이 없다고 말했는데 왜 그러느냐. 나 때문에,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난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거지생활한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주님이 거지 생활을 이미 해서 가난과 저주를 청산해 버렸는데 2천년 후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지질이도 못나게 가난과 저주를 달고 다니면 주님이 좋다고 박수 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저주의식, 가난의식을 깨끗이 벗어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부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으니까 믿으세요. 믿어요. 주여 믿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옷입게 되었습니다. 나는 복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죽음의 쓴 물도 달아집니다. 다 죽습니다. 일본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 지은 책이 있는데 오늘도 제가 몇 페이지 읽고 나왔습니다. 그가 한평생을 환자를 보았는데 환자가 죽을 때 마지막 남기는 말 그 모습을 기록한 글입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하는 말이 죽는 환자들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죽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과거에 산 죄 때문에 과거에 잘못하고 산 후회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서 너무나 고통을 당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갖고 평안을 갖고 의사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 다하고 아무런 분노도 갖지 않고 기쁘게 죽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의 쓴 물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달아지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 마음의 분노를 갖거나 슬픔을 갖거나 좌절과 절망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평안한 것입니다. 상상을 못할 만큼 평안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에게는 영원히 안죽는다. 그 말은 죽음이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이 있는 줄로 우리가 착각을 하는데 육체를 떠나자마자 예수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저 땅 삶으로 옮겨갈 따름이지 죽음을 느낄 여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하늘나라 땅으로 옮겨간다. 그 옮겨가는 과정이 죽음이요, 거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쓴 물도 달아지고 추악의 쓴 물도 달아지고 질병의 쓴 물도 달아지고 가난과 저주의 쓴 물도 달아지고 죽음의 쓴 물도 달아지고 마음에 쓴 물을 가질 여가가 없습니다. 진짜요. 여러분이 쓴물이 좋거들랑 가지고 계십시오. 나는 안가지고 있을래. 그것 보통 괴로운 것 아니에요. 쓴물을 다 달게 변하려면 십자가는 이미 주님이 주어지신 것입니다. 이미 주어지신 십자가를 여러분 가슴 속에 받아들이면 쓴 물이 다 달아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쓴물만 달게 한게 아니라 쓴물을 달게 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에게 전인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따라 말씀하세요.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나의 범사가 잘되고 내가 강건해지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의 소원을 받아들여야 될 것은 마땅한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원하시는데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꿈꾸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믿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 아닌 것입니까?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알고 믿으면 놀라운 역사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르면 믿을 수 없지요. 알면 믿을 수 있으니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이 인정하던 안하던 여러분은 새것입니다. 낡은 쓰레기통에서 주님이 주어다 갖다 놓은 여러분 아닙니다. 이래봐도 여러분 새것입니다. 그러니 새것으로 사십시다. 그렇게 살면 살게 돼요. 왜, 진짜가 새것이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의 삶에 항상 다가오는 삶의 쓴 물도 근처 못오게 합시다. 미움의 쓴 물, 미움의 쓴물 우리가 살자니까 가족들 간에도 그렇고 이웃간에도 그렇고 미움의 쓴 물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 미움의 쓴 물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가슴속에 더 많은 상처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움이란 것이 살인과 같은 죄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미움이 어떻게 치료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달아진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이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달아진다. 그러므로 아주 어려운 시련을 당해서 미워할 사람 생겨도 십자가를 끌어 안고 미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같이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은 그 미움 때문에 자기가 고통을 당하지만 나는 미움 때문에 고통당할 필요 없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냥 지나가서...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지나가는 삶인데 마음 속에 미움의 쓴 물로 상처입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11절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의 쓴 물로 인해 불안정한 모습을 마음 속에 가지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쓴 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나무를 던지면 달아집니다. 인터넷에 아무리 악플을 해도 십자가를 던지면 십자가는 인터넷을 보고 웃습니다. 별볼일 없다. 더 이상 그러지 마라. 십자가는 쓴 물을 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항상 달게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공포와 불안의 쓴물도 십자가를 통해서 달아지잖아요. 이 성경구절 한번 들어 보십시오. 시편 91편 1절로 7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거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이 있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주님이 왜 사람의 몸을 쓰고 오셨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주님이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의 쓴 물을 주님은 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하지 않습니까? 요사이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저리가라! 저리가라! 내게 오지 마라! 예수님께 오면 해결방책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시니까. 그러니까 낙심과 좌절의 쓴 물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끌어 안으면 달아지지요. 로마서 8장 33절로 37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야~ 여러분 보통 분인줄 알았는데 보통 분이 아니네요. 이렇게 주님이 사랑을 베풀고 돌보시며 여러분을 품에 품고 있으시니 여러분께서 쉽게 멸망할 턱이 있습니까? 부정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7월 7일에 영국 경제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은 10만 명당 22명입니다. 그런데 OECD 전체 평균 11명에 비해서 2배나 높은 것입니다. 그 잡지는 계속해서 “지난 반세기 동안에 경제적, 사회적 업적에 큰 자부심을 가질만한 나라가 이토록 많은 국민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논평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경제성장은 굉장한 자랑거리가 되는데 왜 자살을 하느냐. 더욱이 최근에는 초, 중고생들의 자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조사에 의하면 2009년 우리나라의 초, 중등학생의 자살은 202명으로 전 년도보다 4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학생들의 자살 요인으로 가장 큰 이유가 가정불화인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좌절을 경험하고 절망을 느끼면 극단적인 방법이 자살인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 없이 40일을 버틸 수가 있습니다. 물이 없어도 8일에서 10일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공기가 없이는 4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그대로 1초도 버티지 못합니다. 다른데는 다 참을수 있지만 희망이 없는데 뭐 참을 것 있어요. 뛰어 내리지 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고 그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으면 언제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좌절감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멸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절망과 좌절의 쓴 잔을 버리고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갖고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삶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단함 셋째로, 삶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결단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모실 뿐 아니라 내 인생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가 인생을 못 박으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걸머진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생명도 내 몸에 나타난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수양과 도덕은 훗날에 따르고 지금 당장 체험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내가 체험해야 돼요.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의 죽음을 우리가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멀리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면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당하는 여러 가지 심신의 고통과 괴로움과 죽음이 오면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도 꼭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이 오는데는 예수의 생명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고통과 죽음의 고통이 다가오면 그를 붙들어 주는 예수의 생명도 곧 따라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께서 내 예수 그의 죽음은 내 죽음, 그의 무덤은 내 무덤, 그의 부활은 내 부활 이것을 마음 속에 진실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의 생명도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머지면 그것이 여러분과 나에게 굉장히 큰 생명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굉장히 우리 동리 사람들이 다 가난했습니다. 특히 우리 아랫집은 더 가난해서 매일 밥 대신에 멀건 죽으로 때워서 언제나 가족들이 힘이 없어서 걸음을 이렇게 걸었습니다. 에너지가 안나오니까... 그래서 어느 날 친구와 함께 학교 가려고 수진아~ 학교가자! 그러니까 지금 밥먹는다. 그래서 우리 시골에서는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오고 안들어 오라고 해도 들어갑니다. 그 좁은 방에 식구들이 한방에 다 사는데 들어오라고 안했는데 내가 방 확 열고 들어갔어요. 밥상있는데 윗목에 앉아서 밥먹는 것을 내가 이렇게 내려다 보니까 아주 멀건 죽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 수진이 아버지를 보고서 수진이 아빠, 저것을 먹고 어떻게 학교를 갑니까? 힘이 생겨야지요. 윗목에 나락 세가마니가 있어요. 이 세가마니 왜 둡니까? 이것 찧어가지고서 먹지! 그러니까 수진이 아버지가 숟가락을 탁 던져 버리더라구요. 우리집에 와서 그런말 하려거든 다시 오지 말아라! 누구를 다 죽이려고 그러느냐. 그래서 내가 난 아무도 죽일 생각 없는데요. 그러니까 야 이놈아, 이 세가마니는 우리 명년에 살 우리식구들의 생명이야. 이것을 심어야 명년에 농사가 되고 우리 식구들이 먹고 살수가 있다. 이것을 심지 않으면 우리 명년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이냐? 논이 한마지기 우리 논이 있냐. 소작으로 남의 논을 대는데... 곡식 씨앗조차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야. 참으로 우리 그때는 여러분 농꾼들은 논 한마지기도 없습니다. 부자들 논을 빌려서 그들에게 세내고 경작했기 때문에 사는 것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혼비백산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게 잊어지지 않아요. 아주 벼농사만 벼 가마니만 보면 수진이 아버지가 생각나요. 그런데 제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아~ 예수님의 죽으심이 종자씨앗이구나. 내가 깨달았다구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수진이 아빠 윗목에 있는 볏가마니처럼 우리 천당가는 볏가마니구나. 비유가 잘 맞았는지 안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안 심으면 다 굶어죽는다 말이에요 영적으로...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 진리는 우리가 꼭 우리 마음 속에 받아 들여야 내것으로 받아들이지. 대신 받아 들일 수도 없어요. 내것으로 받아 들여야 내 인생에 심어야 여기에 영생 천국이 나타난다 말이에요. 안 심으면 아무것도 안 나타나요. 주님께서 이 종자씨앗에 대해서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당신 자신을 내주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내 종자씨앗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예수의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내 종자씨앗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십자가를 내 종자씨앗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열매를 맺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여러분 종자씨앗을 항상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비로소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생명 내 생명” 이라고 말하고 다녀야 돼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결론> 세상 삶 속에는 쓴 연못물이 항상 있어요. 쓴 연못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 있어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결혼생활하는 사람도 가보면 쓴 연못물이 다 나와 있어요. 모든 사람이 큰 연못물 적은 연못물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 없이 큰 소리할 도리가 없어요. 욕을 얻어 먹어도 십자가를 끌어안고 칭찬해도 십자가를 끌어안고 십자가 밑에 나가 내 짐을 풀어야지.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십자가를 마음 속에 다 모시고 이 교회에서 나가면 변화되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어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거역한 죄는 항상 쓴 연못 물을 가슴속에 출렁이고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육체라는 옷을 벗어 버리고 영혼이 새로운 영적인 세계 속에 들어가서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예비한 아름다운 천국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버림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깨어나서는 안됩니다. 죽음에는 사람들이 둘 중에 한곳으로 갑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낙원에 가든지, 불구덩이에 가든지 둘 중에 한곳을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불구덩이에서 건지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 대신 몸 찢고 피 흘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니까. 내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요. 세상 삶 속에 쓴 연못물은 항상 있습니다. 연못물이 없는 나라, 가정, 개인이 있는지 한번 찾아 보세요. 모두 다 쓴 연못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쓴 연못물을 달게 하는 십자가도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안 받아들이니 그렇지 받아들이면 다 있습니다. 죽음의 쓴 연못도 천국 영생의 단물로 변화 시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이 세상에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버려도 십자가는 버리지 않습니다. 환경은 버려도 십자가는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십자가 밑에 나가서 인생의 짐을 풀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절대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우울하지 마십시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십자가를 보냈겠어요.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매달았겠어요?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 보통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엄청난 희생을 아버지가 각오하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게 했으니 여러분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값이 보통 비싸지 않습니다. 계산할 수 없을만큼 비싸고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살다가 하늘나라에 우리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모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