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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10. 주일설교 사랑과 덮어주는 신앙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야훼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9:18~27) 할렐루야~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나는 평안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형통합니다. 나는 복 받았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인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사랑과 덮어주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항상 저의 기억 속에 크게 한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추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운 겨울날 잠을 자는데 우리가 이브자리를 발길로 차버리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이불을 갖다 덮어주면서 토닥거려 주면서 “야 이놈아, 감기 들린다. 발로 차지 마라.” 그리고 이불을 덮어주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이 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할머니하고 같이 어릴 때 지냈기 때문에 할머니의 사랑을 늘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여름철에 할머니가 빨래를 개는데 그 옆에서 그냥 배를 다 내놓고 잠을 자거든요. 그러면 할머님이 홑이불을 갖다 덮어주면서 “야 이놈아, 배탈 난다 이놈아! 배를 이렇게 내놓고 자면 어떻게 하냐?” 탁 배를 치면서 홑이불을 덮어 주십니다. 그 어머니나 할머님이 덮어주시던 그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덮어 주겠습니까? 성경은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 짓는 것은 죄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상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면 그것 낱낱이 할퀴고 벗기는 세상에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다 덮어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아내는 남편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이웃을 덮어주는 사랑. 이런 사랑이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잠언서 10장 12절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전문적으로 벗기는 세계적인 수단을 가진 민족이 대한민국입니다. 남의 허물을 벗기는 것이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줄 알아도 하나님은 굉장히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니까 우리 허물을 막 벗길줄 알지만 우리의 죄와 허물을 그 아들 예수님 십자가에 매게 하셔서 다 청산하시고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예수님이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덮어주신 것입니다. <본론> 1. 술 취한 노아와 세 아들 오늘 첫째로, 홍수 후 술취하여 벌거벗고 자는 노아를 그 아들 셈, 함, 야벳이 어떻게 대했는가 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데 우리가 상당히 관심을 기울여 볼만 합니다. 노아 홍수 전에는 포도즙을 짜놓아도 발효되지 않았어요. 술이 되지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 포도즙을 짜 놓으면 그것이 발효가 되어서 술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전의 사람인데 홍수가 지나고 난 다음에 농사를 지어서 포도즙을 잔뜩 짜서 단지에 담아 놓고 그를 실컷 마셨습니다. 이상하다. 톡쏘는 맛이 홍수 전하고는 틀리다. 홍수 전에는 술이 안됐으니까요. 술이 된줄 모르고 실컷 마셨다 말입니다. 안 취할 도리가 없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술취한 사람이 노아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어서 술 취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은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의인이요 완전한 노아지만은 술을 잔뜩 먹었으니까 안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술취하면 화를 내고 사람을 못살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벌거벗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을 먹고 취해가지고서 자기 장막에서 완전히 벌거벗었어요. 그냥 윗통만 벌거벗으면 좋은데 본전 다 드러내놓고 벌거벗었어요 그 아들이 셈, 함, 야벳인데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 장막에 들어갔다가 보니 아버지가 완전히 본전 다 내놓고 드러누워서 벌거벗고 있는지라 밖에 나가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아버지가 권위도 없이 발가벗고 술에 취해서 주무신다. 야 형들 이리와 이리와~ 셈, 동생 야벳 이리와! 아버지 한번 봐~ 발가벗었어. 그리고도 아버지 노릇할 수 있느냐. 아이 웃긴다 웃겨~” 그래서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비웃었습니다. 자기만 비웃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웃음조로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9장 22절에 보면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그때는 아버지 하체를 보는 것 굉장히 수치로 여겼습니다. 요사이 아들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다같이 목욕을 하는데 보나 안보나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고 오히려 다른 두 형제에게 경멸과 조롱의 태도로 알림으로써 아버지를 나중에 격노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함의 이야기를 들은 형인 셈과 동생 야벳은 달랐습니다. 가서 옷을 가지고서 어깨에 걸머지고 바로 걸어가면 아버지 하체를 볼까 싶어서 않볼라고 뒷걸음질 치고... 그래서 뒷걸음질 치고 아버지 하체를 덮었습니다. 덮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도와주려는 간절한 마음이 그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잠언서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함은 거듭거듭 아버지 벌거벗었다고 얼레꼴레 아버지가 벌거벗었다고 이랬는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뒷걸음질쳐서 덮어주고 쉿~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창세기 9장 23절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와 수치를 방관하지 않고 그 허물을 덮어주려는 사려 깊은 행동으로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계속 아버지가 받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술이란 것은 24시간 늘 술취해 있지는 않습니다.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아들 세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듣고 난 다음 함에 대해서 격노하고 저주했습니다. 창세기 9장 24절로 25절에 보면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보통 화가 난 것 아닙니다. 그것 왜냐하면 처음으로 술취해서 실수를 했는데 아들이 그것을 조롱 삼았으니까 굉장히 화가 나서 저주를 했습니다. 제가 이 성경 읽을 때마다 내가 생각이 된 것은 아버지가 너무 과하지 않느냐. 뭐 저주까지 할 것 있느냐. 그래도 노아가 안되어 보니 모르지요. 그때 당시의 노아는 굉장히 화가 난 것입니다. 종들의 종은 가장 비천한 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예언은 후일 역사에 다 이루어졌지요.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시대에 셈족속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 당하고 대부분 종으로 전락했고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정복당해서 셈의 종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셈은 노아가 축복하기를 창세기 9장 26절에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야훼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셈이 후손들은 주로 아시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로 셈 족속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서 셈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주가 태어난 그리스도의 교회 종교를 통해서 셈을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은 주님이 창대하게 했는데 오늘날 대개 구라파 사람들이 야벳인 것입니다. 창세기 9장 27절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야벳을 번창하게 하셔서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되고 그들의 후손에 의해서 헬라의 철학, 로마의 법률과 군사, 유럽의 근대 과학과 문화가 창달하므로 역사적인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를 믿었으므로 문화가 창달했으나 셈의 장막인 기독교의 축복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적인 사건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셈, 함, 야벳의 복이 누구로부터 오느냐. 아버지의 축복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아버지 그까짓것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누구를 통해서 주느냐. 부모를 통해서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축복을 하면은 그 축복을 하나님이 내려 주시고 부모가 저주하면 그 저주를 하나님이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축복은 그 자손들에게 이루어지고 저주도 그 자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축복은 여기에 보면은 부모를 통해서 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효를 하면은 세상에서 잘되고 또 오래산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훼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래 살고 싶으면 아멘 하십시다. 잘 살고 싶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부모를 잘 모시십시오. 저도 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모시려고 애를 썼는데 내가 이 성경을 잘 몰라서 이것만 알았더라면 더 잘 모실 것을 가지고서 더 잘 못 모신 것이 후회가 막급합니다. 축복이 부모의 입에서 나온다. 그래서 옛날에 부모들이 저주한 그 자식은 나중에 다 망했고 자식을 늘 축복한 그 자식들은 잘 된 것을 우리 주변에서 늘 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2절로 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의 약속 중에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계명에 제일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한다. 그래서 오늘 셈과 함과 야벳의 이야기를 통해서 덮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덮는 것, 벌거벗은 사람 아버지라도 벌거벗었으면 조롱하지 말고 덮어주라. 몸만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음도 덮어주고 그 삶도 덮어줘야 된다. 벌거벗기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벌거벗은 것 보고 흉을 보면은 저주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선교사님을 통해서 알려진 이야기인데 남아프리카에서 봉사하던 선교사님이 하루는 우연히 그 곳에서 독성이 강한 코브라와 검은 맘마 뱀이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코브라는 독이 강하니까 검은 맘마 뱀을 칵 무니까 얼마 안있다가 검은 뱀이 꿈틀꿈틀 하더니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맘마 뱀을 코브라가 먹어요. 머리부터... 반쯤 먹다가 코브라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코브라도 죽어 버렸어요. 왜 죽었느냐. 자기 물어서 죽인 그 독을 맘마 뱀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먹고서 죽은 것입니다. 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났냐 하면은 남의 흉을 보면 남을 향한 비난과 비판이 상대방을 죽일 뿐 아니라 나중에 두고 보면 자기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 때문에 죽는다. 함은 벌거벗고 자는 아버지를 흉보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형제는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고 옷으로 가리고 나왔습니다. 결국 함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형제들을 섬기며 종 중에 종이 되며 살아가야 될 운명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남을 벗기거나 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결국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화를 당하고 저주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남의 흉보는 것 대단히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용서 오늘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덮어주는 사랑을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갔는데 많은 사람이 한 여자를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오면서 발길로 차고 그러면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뎅이 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교법사들이 “예수님, 이 여자가 간음하는 것을 우리가 현장에서 잡았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올무에 잡으려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늘 퀘스쳔이 생기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으면 왜 남자는 안끌고 오노. 혼자서 간음하는 것 봤습니까? 성경에는 같이 죽이라고 했지 여자만 죽이라고 말 안했습니다.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 계속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무어라고 합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전 뜰이니까 흙이 부드러웠습니다. 글자를 손가락으로 적은 것이 다 뚜렷이 보였습니다. 뭐라고 썼다고 성경은 말 안했습니다. 그러나 추측은 할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처음에 자꾸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는데 당신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니까 주님이 십계명을 적었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어깨 너머로 쓴 율법을 보니까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똥 묻은개 겨 묻은 개 보고 욕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허물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적어 내려 가니까 율법으로 이 여자를 치려거든 이 사람들이 마음이 뜨끔한데 자꾸 계속 주님을 압박하니까 주님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더니만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눈을 마주쳐 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바라보는 눈길로 바라보니 가슴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난 다음 즉시 허리를 굽혀서 그를 손가락으로 적습니다. 뭘 적었겠습니까? 큰 사람부터 적은 사람까지 그 중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생을 손바닥으로 보듯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적어 내려갑니다. 예수님 어깨 너머로 보니까 이 여자를 돌로 쳤다가는 그 다음 예수님 손에 돌에 맞아 죽어야 되겠다 자기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꾸 글을 써내려 가니까 어깨 너머로 그를 보고 난 다음 한 사람이 오더니 아이구 내가 오늘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했는데 잊어 버리고 왔네. 내가 빨리 물 먹이러 가야 되겠다. 아이구 나는 오늘 어머니 심부름 아침에 해야 되는데 잊어버리고 왔다. 빨리 가야 되겠다. 변명이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한 사람 두 사람 돌을 다 버리고 떠나가 버리고 얼마있지 않으니까 그 여자와 돌만 남았고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돌만 있고 사람은 없다 말입니다. 그 여자가 없습니다. 그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참 기가 막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짓지 마라. 여기에 우리 죄인들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 정죄 받은 이 여자의 죄도 종국적으로는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질 죄이기 때문에 주님이 담당하시고 죄짐을 벗기시고 정죄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이 여자가 마음에 감동을 느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율법주의자의 율법을 꾸짖고 그 위선을 들추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물은 덮어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덮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 이 여자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것 내가 구출해 주었다. 그렇게 선전하고 안 다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용서하고 덮어주고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름도 묻지 않고 주소도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의 마음에 수치심을 들춰내지 않았습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들춰내지 않았습니다. 덮어 주었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덮어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의 못자국난 손으로 여러분을 덮어 주십니다. 여름철 배를 내놓고 자던 나에게 홑이불로 덮어주던 우리 할머니 손길같이 여러분과 나의 수치의 모든 삶을 주님께서 덮어 주시고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 죄를 짓지 말라. 주님 자꾸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때마다 회개하고 결심하고 일어나라! 에베소서 2장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는 것이니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해서 죽이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러 왔노라. 살리러 왔지 죽이러 안왔습니다. 정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용서로 덮어주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베드로가 예수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가 범죄하면 몇 번 용서해야 될까요? 일곱 번 용서할까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베드로야 형제가 너에게 범죄하고 와서 잘못했다고 하거든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줘라. 7*7=49. 490번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죄를 짓고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한두번 용서해주고 아따 내가 많이 용서해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을 것인데 490번 용서해주라. 무한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말이 쉬워 그렇지 여러분 힘듭니다. 아주 고약한 놈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뻔뻔스럽게 와가지고서 나 잘못했어. 용서해줘! 용서할 마음 생깁니까? 그래도 주님은 용서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예수께 나오면 주님께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용서만 하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라. 우리가 참된 신앙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정치인들이 해변가를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면 어떤 특정인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리자! 모가지를 자르자! 그 의논을 하면서 해변가를 걸어가고 있는데 거기에 어부가 게를 잡고 있어요. 큰 바구니에 게를 잡아가지고서 이렇게 기어다니는 게 말입니다. 멍멍 짖는 개 말고... 정치인 한 사람이 보니까 바구니에 게가 가득한데 뚜껑도 안덮고 그냥 잡아서 또 넣고 잡아서 또 넣고 그래서 아니 여보소 뚜껑을 안덮고 그냥 이 바구니에다 게를 자꾸 잡아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쳐 나가지 않습니까? 하니까 허허 웃으면서 걱정할 것 없어요. 게는 정치인과 똑같아서 끌어내리기를 잘합니다. 한놈이 기어나오면 밑에 놈이 잡아 당겨서 다 떨어지는 거에요. 정치인인줄 모르고... 그 말을 듣고 이 정치인들이 아주 마음에 혼비백산했다는 말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 뿐 아니라 인터넷을 보면 악성 댓글로 남의 허물을 끊임없이 들추어 내고 할큅니다. 인터넷에 조용기란에 들어가 보십시오. 아뜩합니다. 아뜩해. 인터넷이라는 것이 정보를 빨리 전달하는 좋은 뜻도 있지만 이것이 생기고 난 다음에 남의 허물을 그를 통해서 할퀴고 들추어내고 상처 입히고 인터넷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마음에 굉장히 충격을 받고... 아주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인터넷 문화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계셨으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오셔서 인터넷 보지 말것! 계명 중에 그것 하나 넣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그러니 남의 허물을 벗기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하는데는 시기와 질투와 분노에 모든 악독 죄악 귀신들이 드글거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 열 때 단단히 예수님 이름으로 무장하고 열어야 해요. 귀신이 드글 거린다고 했으니까. 내 말이 아닙니다. 또 조용기가 그렇게 말했다고 또 인터넷에 올리지 말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인생은 아담 범죄 이후 늘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모이면 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약한 자는 염려하고 강한 자는 비판합니다. 우리 교회도 한가지입니다. 저는 50년을 목회를 하고 동서양에 수많은 성도들을 모시고 예배를 인도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교인들 중에도 신앙이 강한 사람도 있고 신앙이 약한 사람도 있고 오래된 분도 있고 이제 풋내기도 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원망, 불평, 탄식, 비평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만큼 많은데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남을 비판하려고 하기 보다는 덮어주려고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덮어주려고 하는...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일곱 가지로 말을 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다. 상대의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들은 이야기로 비평합니다. 사람들이 끝없는 거짓말을 퍼뜨리는데 그것을 듣고서 사실 알아보지도 않고 들은 이야기를 갖다가 우리는 전달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상대방의 동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상대가 선한 동기로 말한 것도 나쁘게 해석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욕심이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객관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넷째로, 그 상황에 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안 당해 봤으면 정확하게 그것을 말할 수가 없어요. 다섯째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남의 일을 소소난간 다 알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알고 말하므로 틀리게 말합니다. 여섯째, 우리에게는 편견이 있고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편견을 따라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일곱째, 우리는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단지 우리 자신의 잣대로 보고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에게는 결점도 많을 뿐 아니라 장점도 굉장히 많습니다. 결점만 보고 말하지 말고 장점을 보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갖다주는 것입니다. 내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남의 흠짐을 말하면 그것이 나에게 상처를 갖다준다. 내가 남을 칭찬하면 그것이 내게 축복을 갖다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족과 부부간에는 장점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고 장점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사람이 다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아주 아름다운 청운의 꿈을 품고 저런 분은 완전한 남편이고 저런 분은 완전한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해서 살아 보십시오. 얼마 안있으면 결점 투성이입니다. 결점이 드러나요. 그러면 그 결점을 보고서 원망, 불평, 탄식하면 이혼하게 됩니다. 못살게 돼요. 그러나 장점을 보고서 자꾸 칭찬해 나가면 그 장점으로 칭찬을 받은 남편도 아내도 변화를 받고 자기도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기가 먼저 변화 받아야 돼요. 사람은 분위기를 따라서 살아나가지 않습니까? 남편이 아주 고약한 남편이면 자꾸 불평하지 말고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참아주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 그 분위기 속에 들어온 남편이 변화 받습니다. 아내가 너무 고집투성이고 자기 뜻대로만 한다고 하지 말고 오래 참고 이해하고 동정해 주면 그 분위기가 그 아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기가 먼저 변화 되어야 돼요. 자기는 변화 안하고서 남만 자꾸 비평하면 안돼요. 대개 제가 보면은 남을 비평하는 사람 자기는 비평 안해요. 모든 것은 자기가 옳습니다. I'm all right. I'm fine. 나는 좋다. 전부 네가 나쁘다. 여러분 성경 구약에 보면은 야곱이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 살다가 아내와 자식들과 재산을 많이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이 한을 품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동생 야곱에 대해서 한을 품고 있는데 사람을 보내서 동생이 온다고 하니까 그 한풀이를 하기 위해서 형이 그냥 마중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옵니다. 동생 맞으러 오는 형이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는 죽이려고 작정하고 오는 것입니다.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그 보고를 받은 야곱이 어떻겠습니까? 자기 재산 중에 많은 분량을 형을 위한 선물로 앞세우고 뇌물 가지고 형의 마음을 녹여 보려고... 그 다음에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그 뒤에 따르게 하고 그리고 자기는 얍복강 이쪽 건너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보고 있습니다. 형이 뇌물을 받고 얼굴에 웃음이 있으면 뛰어 나가고 형이 내 처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면 나가거니와 형이 짐승들을 받지 않고 처자를 칼로 치면 나는 삼십육계 놓으면 된다. 처자야 또 장가가고 낳으면 될 것 아니야. 나만 살면 된다. 이게 야곱입니다. 그래서 처자들이 말을 합니다. 여보 당신은 왜 같이 안갑니까? 나는 여기에 볼 일이 있어서... 너희들 먼저가라! 아버지 이리와. 먼저 엄마 따라가. 엄마 따라가. 아버지는 여기 볼 일이 있다. 무슨 볼일입니까? 달아날 볼일이지... 그런데 갑자기 장정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했습니다. 건너가라는 것입니다. 가라! 처자와 함께 형이 죽이러 오는데 너도 같이 죽어야지 너만 살겠다고 여기 앉아있으면 어떻게 하나? 가라! 안가요! 가라! 안가요! 얼마나 야곱이 고집이 세고 자기만 살려고 욕심을 부렸던지 밤새도록 씨름해도 항복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아침 해가 들어올 때가 되니까 주님이 정 항복을 안하니까 손을 들어서 환도뼈를 쳐버렸어요. 우지끈하고 환도뼈가 어그러지니까 넘어졌다가 일어나 보니까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제 보니까 도망칠 도리가 없습니다. 끝장났습니다. 자기 환도뼈가 부러지자 마자 그 마음 속에 이제는 달아날 수도 없고 나만 살수 없으니 변화를 받아야 되겠다. 환도뼈 어그러지고 변화가 되었어요. 무슨 변화냐. 자식들하고 같이 살고 아내들하고 같이 살고 같이 죽겠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형 에서를 생각할 때 하나님, 마귀 대장! 저 놈은 마귀! 사탄아 물러가라! 저 마귀를 쳐 죽여 버려 주시옵소서. 형을 마귀로 봤는데 자기가 변화되고 보니까 형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로 보였었습니다. 왜냐, 내가 20년 동안 형을 이용하고 외삼촌 집에 가서 살 동안에 얼마나 형의 마음이 한에 서렸기에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왔느냐. 나만 주장하지 말고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 때는 20년 동안 형이 얼마나 가슴 안고 고통을 당했겠느냐. 형이 불쌍하지 않느냐. 이 형의 마귀의 얼굴이 안되고 자기가 변화되고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얍복강을 건너서 절뚝절뚝 하면서 나가니까 자기 처자들이 여보, 당신 어떻게 되었어? 절뚝발이가 되었어? 아빠 어떻게 되었어? 어떻게 절뚝발이가 되었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절름발이가 되고 난 다음에 변화 되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되어서 이제는 짐승들도 자기 뒤에 두고 처자들도 자기 뒤에 두고 제일 앞에서서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단 칼에 목을 베려고 하는 형을 향해서 절뚝절뚝 절면서 오니 형이 보니까 이것 칼하나 쓸 필요도 없습니다. 절뚝발이 저것 뭐 발길만 한번 차버리면 죽겠다 말입니다. 그래서 형이 왔을 때 야곱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형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늘 마귀 얼굴로 생각했는데 자기가 변화되고 보니 형이 하나님 얼굴같이 보인다. 그러니까 형이 뛰어오더니만 야곱을 끌어 안고 목을 잡고 둘이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내가 너를 안내해서 우리 고향으로 가자! 동생을 죽이러 온 형이 동생과 그 가족들을 호위해서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살벌한 분위기가 사랑으로 넘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분위기가 왜 달라졌느냐. 야곱이 달라지니까 분위기가 달라진 것입니다. 형이 마귀라고 생각하던 그가 형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다고 할만큼 자기가 달라지고 나니까 분위기가 달라지고 형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남편이 변화되기를 원합니까? 아내 여러분, 여러분이 먼저 변화되십시오. 나는 나쁜 것 없습니다. 있어요. 나쁜게 있기 때문에 남편이 그렇게 삐뚫어졌지요. 그러니 자기부터 먼저 회개하고 변화되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 흉만 보지 말고 아내만 씹지 말고 자기가 회개하고 변화 받아요. 그러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아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꾸 자기는 살펴보지 않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아니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본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비평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비평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채찍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용서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봄이 오면 겨울은 물러가고 얼음이 녹습니다. 별도리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면 상대방이 변화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고 조지 허버트가 말했고 빌리 제올리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큰 지우개를 가지고 계신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공책에 글 쓰고 난 다음 지우개로 지우잖아요. 지우개 없이 공부 못합니다. 요사이는 컴퓨터로 하니까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있을 때는 지우개가 늘 필통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 생애는 하나님이 항상 지우개로 지워줘야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가 이말 늘 하는데 여러분 들었어도 한번 들어 보세요. 대전에서 집회하는데 사람들이 한 만명 모였어요. 제가 설교하는 중에 죄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난 다음에 이 중에 죄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한 사람이 손들더라구요. 한 30대 젊은이가 손을 딱... 아~ 내가 감동했습니다. 나는 주의 종이지만 한평생 죄만 짓고 살았는데 어떻게 죄 안짓고 살았습니까? 이리 좀 나오십시오. 그러니까 사람을 해치고 나오려고 하니까 젊은 여성이 뒤를 자꾸 매달려요. 그래서 잡지 말고 놓아 주시라니까요? 나오게... 목사님 목사님, 우리 남편... 그래서 내가 아~ 미쳐서 병고치러 왔군요. 미친 사람만 죄없다고 생각하지 정상적인 사람은 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죄없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미친 사람 아니고는 그렇게 할 사람 없어요. 정직하게 우리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큰 보혈의 지우개를 가지고서 우리 죄를 다 지워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남의 허물을 자꾸 들춰내면 그것 때문에 자기도 망합니다. 미얀마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세탁소 주인이 있는데 세탁을 잘해가지고서 돈을 꽤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옹기그릇 만드는 사람이 시기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그래서 임금님에게 가서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세탁을 하고 아무리 더러운 옷이라도 깨끗하게 한다고 자랑을 하는데 왕궁에 있는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고 명령을 한번 내리십시오. 임금님이 그렇게 하지. 세탁소 주인 오라고 그래라. 우리 왕궁에 있는 검은 코끼리를 하얗게 세탁을 하라! 임금님 내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옹기점에서 코끼리가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줘야 물을 담아서 세탁을 할 수 있으니까 여기 이 사람 보고 코끼리가 들어갈 그릇을 만들라고 그러십시오. 그러니까 코끼리가 들어갈 그릇을 만들어라. 그날부터 코끼리가 들어가는 그릇을 만들어서 코끼리를 세워보니 와장창 깨어져 버리고 그 무거운 몸무게를 감당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릇을 만드니 깨어져 가지고서 나중에는 세탁소 망하게 하려다가 옹기점 자기가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얀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인데 남을 못되게 할퀴면 자기가 잘안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축복을 주고 칭찬을 주고 격려를 주면 이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욕하고 저주하고 비평하고 평론하면 자기 괜찮을 줄 알지만 반드시 돌아와요. 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그 점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3.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와 형 셋째로, 마지막 여러분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시죠? 누가복음 15장에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창기와 더불어 다 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서 시골에 가서 돼지 치는 일꾼이 되었는데 돼지 주는 쥐엄열매도 충분히 없어서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게 되었어요.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회개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데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돌아가겠다. 마음도 병들고 옷도 다 냄새가 나고 퇴비투성이인 옷을 입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로 늘 아들 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봅니다. 그런데 멀리서 아들이 오는데 말 안해도 걸음걸이만 봐도 알거든. 부모는 자식의 걸음걸이만 봐도 알아요. 자기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뛰어 나갔습니다. 아버지 앞에 엎드려서 아버지여,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는 아버지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아버지가 거기에 대답 안했습니다. 종들보고 얘들아,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갖다 신겨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이 내 아들은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하늘 아버지께서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제일 좋은 옷은 무엇입니까? 용서와 의의 옷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죄를 한번도 안지은 상태를 의롭다 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라! 아들이 된 가락지. 무슨 가락지입니까? 성령의 가락지인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가락지를 끼워라. 그리고 신발을 신겨라. 신발은 뭡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신 축복의 언약인 것입니다. 성경에 용서와 의의 축복,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축복, 치료와 건강의 축복,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축복, 부활 영생 천국의 오중복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삼중축복, 축복의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은혜의 송아지를 잡아라.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평안한 은혜의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이 주께 돌아오면 내 이 아들은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은 여기에 보면 율법주의자입니다. 형은 동생이 와서 아버지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고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고 하니까 분해서 난 집에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얘 들어오너라. 동생이 왔는데 들어오너라.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기생들하고 탕진하고 지가 배가 고프니까 할 수 없어 돌아온 놈을 위해서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구요? 난 이런 놈하고는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집에 안들어갑니다.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를 심판하는 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버지와 같은 것입니다. 죄인의 죄를 따라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성령의 가락지를 끼워주고 하나님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발을 신겨주고 그리고 살찐 은혜의 송아지를 잡는 축복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빈손 들고 주님께 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이 없으니까 공짜입니다. 예수 믿으면 공짜로 의롭게 되어요. 율법주의자는 네가 행동으로 의롭지 못하면 천당에 못들어온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공짜로 선물로 의로움을 받아서 올라올 수 있다. 행동으로 세탁을 해서 깨끗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세탁한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 주므로 우리가 그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달 본 듯이 날좀 보소. 여러분 나를 보라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물로 공짜로 용서를 해주시고 의롭다 해주시고 천국을 주셨으니 우리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것이 없습니다. 믿으면 하겠네. 요한일서 4장 10절로 12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그러니 구원은 내 공로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 아들을 보내어서 구원시켜 주셨으니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비평하고 평론하고 남을 할퀴지 말고 사랑하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용서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벗기지 맙시다. 덮어 주십시다. 더구나 예수 믿고 교회 나온 우리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 주셔서 이렇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사는데 우리도 이웃을 덮어줘야지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 주셨는데 우리는 이웃을 발가벗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론> 율법은 정의와 성결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율법을 짊어지고 성결의 요구를 다 채우고 율법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십자가에서 사랑의 이불을 탁 던져 주면서 덮어주마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고함을 쳐도 용서와 사랑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이지요. 남편 여러분 아내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내 여러분 남편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녀 여러분 부모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모 여러분 자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축복은 부모께로 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합니다. 부모에게 효도 못했으면 공경하고 오늘이라도 효도 하십시오. 세상에서 장수하고 잘되게 될것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용서와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갖게 도와주시옵소서. 덮어 주는 신앙을 갖게 도와주시옵소서. 남을 벗기는 일은 결코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덮어주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 그 사랑 속에 우리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