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10. 주일설교

용서의 힘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6~38)

할렐루야~ 한번 우리 신앙고백하십시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성공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오늘 잘 오셨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용서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은 원수에게 복수를 할 때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원수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현대 미국의 성공학자인 앤드류 카네기는 적어도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자. 그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순간 먼저 우리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미움과 원한을 품으면 위장도 나빠지고 심장도 나빠지고 신경도 예민해지고 몸이 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건강 잡지인 <헬스데이 뉴스>는 “하버드 여성 건강보고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용서하면 육체적인 건강 3가지와 정신적인 건강 2가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건강으로는 첫째, 스트레스가 줄어들면서 혈압이 낮아지고 그리고 몸의 근육이 좋아집니다. 둘째, 신체의 통증과 고통이 줄어들고 셋째, 용서하는 사람은 심장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건강으로는 첫째, 용서하면 더 큰 행복을 얻게 되고 둘째, 인간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희생재물이 되셔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그 대가가 뭐냐, 나도 이웃을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하는 것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말은 용서한다고 하지만 미운 사람 벼락 맞기를 원하지 용서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밤새도록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며 어떻게 화를 만나게 할까 그런 연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용서는 어려운데 성경을 읽을 때마다 주님께서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셔라. 아멘 안하지요? 아~ 힘든 것입니다. 원수가 주리는데 왜 먹여요? 더 배고프도록 내버려 놓아야지. 목마르거든 박수를 쳐야지 왜 마셔야 되는 것입니까?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랜 세월동안 목회하고 살아오면서 미운 사람 용서하는데 굉장히 힘이 듭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50년 동안 그 어렵고 힘든 목회를 어떻게 했느냐. 마음에 병도 들지 않고 육체의 병도 들지 않고 건강하게 목회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그러면 제가 늘 말합니다. 그 비결은 용서하는 길밖에 없다. 미운 사람이 하도 많이 생기기 때문에 늘 용서해야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건강을 누릴 수 있지 미워하면 쓴물이 나서 행복과 건강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그렇게 제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과 용서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용서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냥은 우리를 용서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절대 정의로우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사야 5장 16절에 “오직 만군의 야훼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절대 정의로우시고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그냥 걸어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용납할 수도 없구요.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이 절대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려면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값없이 너 용서 받아라. 용서 받아라.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주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나 죄를 청산하지 않고는 그냥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덮어씌우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심판을 받아 찢고 피를 흘려서 죽여서 우리 죄를 용서했겠어요? 하나님의 아들조차 하나님이 희생재물이 되는 것을 정하시고 난 다음에 면하게 안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다 응답받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했는데 주님이 안 옮겨주셨습니다. 응답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답 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면해주지 않고 대답해주지 않고 아버지께서 아주 작심하시고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재물로 내놓은 것은 여러분과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대신 고난받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불의한 죄인입니다. 불쌍히 봐줄 조건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완전히 죄인입니다. 조그마한 죄인이면 그래도 눈감아 줄 수 있지만 눈감아줄 정도가 못돼요.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습니다. 동서양을 불구하고 남녀 노유 빈부 귀천을 불구하고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도리가 없어요.
전도서 7장 20절에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 힘으로는 건너갈 수 없어요. 그 죄가 무서운 구렁텅이가 되어서 하나님도 그 죄를 무시하고 건너오실 수 없고 우리도 이 죄의 구렁텅이를 건너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다리를 놓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리가 누구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으나 율법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데 율법 앞에 심판 안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온 천하에 모두다 율법 앞에서는 심판을 받아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희망이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가지고서 죄를 덮을 수 없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해 입었는데 그것이 며칠 갑니까? 햇빛에 말라서 쪼글쪼글 해지고 말라서 쪼글쪼글 해지고 도저히 무화과나무로써 앞치마를 해입어서 수치를 가리울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처음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서 가죽 옷을 해 입힌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줄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주님을 잡았습니다. 한없는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대속의 재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가 늘 알아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지만 품에 안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되는데 그 용서가 예수님 안에서만 있어요.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있어 건너지 못해요. 주님의 공로 의지하여 회개하고 주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로 22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를 다 청산해 버리고 화목케 한 것입니다.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데 그 의로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은 평생에 태어나서 죄를 한번도 안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어느 정도 의로워 집니까 그러면 영원한 예수님이 유한한 우리를 위해서 무한한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대가가 우리가 평생에 죄를 한번도 안지은 것처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의로운 의복을 입으면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큰 선물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이 없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13절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더니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주라. 일곱 번을 일흔번.. 7*7=49. 490번 아닙니까? 형제가 와서 죄를 짓고 잘못했다고 하거든 하루에 490번이라도 용서해주라. 영원히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함 받은만큼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제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기도를 막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응답 않해 주십니다. 내가 순종하고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도 잘 드리고 충성스럽게 살았는데 왜 내 기도를 응답 않해 주시냐.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용서할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로맨틱한 마음으로 아주 기분이 좋고 즐거운 마음이 생겨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깨물고 부득부득 갈면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용서하려고 결심하고 각오해야 돼요.
맥스 루케이도는「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복음에는 누구든지 라는 정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인종과 계층, 성별과 전통 모두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누구든지” 믿고 침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정의로우신 분이시고 우리는 완전히 불의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든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믿고 나오면 무조건 용서를 받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할 자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구원이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일 많이해서 수양과 도덕을 닦아서 금식하고 고행을 해서 대가로 구원받는 것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인데 우리에게서 구원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선물을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고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2. 용서와 화해와 평화
둘째로, 용서를 통해서 화해가 오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삐뚫어 보이고 미워 보이고 마음이 아주 험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회개하고 원한과 상처를 지워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 지우개가 필요하지요. 잘못 쓴 것은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영원히 죄악을 지워버리는 지우개가 되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회개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를 다 지워버린 것처럼 이웃과의 원한도 풀어버리고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들여다보고 원한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원한 가진 자매님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불완전한 남자를 의지하고 살다보니 상처투성이가 되지요. 또 아내를 미워하는 남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빨리 안죽어주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몸이 아프면 아이구 얼마나 아프노? 그러면서 속으로 빨리 죽어라. 고약한 것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것을 다 씻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남겨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한두가지 불의가 아닌 것입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히브리서 8장 12절에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번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하나님이 기억을 안하신다. 우리 사람들의 문제는 용서해주고 사랑한다고 한 다음에도 나중에 자기가 불의를 행하게 되면 너 아무 때 그렇게 했지? 꼭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은사도 받아야 돼요. 이웃의 허물과 죄를 용서했으면 잊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억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평안 혹은 평화의 매는 줄로 묶고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화해를 가져오고 화해해야 평안하고 그 평화의 줄로 매여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미움이 있고는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한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안을 가져와야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평안이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5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용서만 하지 말고 용서 위에 사랑을 해주라. 용서 위에 사랑을 하고 이 사랑의 띠로 묶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고 마음에 평강을 가지고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캐나다 멕길대학의 정신과 교수인 다반루 박사는“인간의 문제는 결국 분노와 이에 따르는 죄책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반루 박사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트리는 방향은 대체로 두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분노를 터뜨려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터뜨리느냐. 강화도 해병대식으로 터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의 분노를 죄없이 자는 사람에게 가서 총을 난사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분노가 들어와서 그런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그렇게 분노를 밖으로 터뜨릴 용기가 없는 사람은 속으로 삭이면 어떻게 되느냐. 우울증에 걸려서 나는 죽는다. 못산다. 안된다. 불행하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분노는 밖으로 나와도 큰일이고 안으로 삭여도 큰일인 것입니다. 분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혈로 씻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분노가 자신 안에서 터질 때는 우울증이나 자기비하로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달스트롬 교수는 분노와 죽음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는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적대감을 조사하여 적대감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25년 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그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50대가 되었을 때의 사망률을 알아보니까 마음에 학생시절에 적대감이 높았던 의사들은 낮았던 의사보다 7배나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심장질환에 걸린 사람도 5배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한을 가지면 그것이 몸을 파헤치기 때문에 원한이 없는 사람보다 7배나 많이 죽고 심장병 걸린 사람이 5배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정신적인 병이 뭔지 압니까? 절망입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그 결과 절망을 하게 되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이 들어오면 죽음이 마음에 들어와서 몸을 좀먹기 시작해서 절망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리면 온갖 정신적병, 육체적병, 생활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절망을 무엇으로 없앨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절망이 없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쓴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단물이 되는 것은 예수님은 절망에 처해서 못나고 버림받은 인생을 십자가에서 끌어안고 주님 같이 울고 같이 주님께서 몸부림치면서 우리를 부활시켜서 영생을 얻도록 만들어 주는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절망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독인 적대감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회개하고 마음 속에 있는 원한과 상처를 십자가에서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미움과 원한은 남을 헤치기 전에 자기부터 먼저 해칩니다. 남을 미워하지요. 그만큼 자기가 먼저 해를 입어요. 남 못되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를 못되게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눌러 넘치게 해서 안겨주리라 하는 것은 좋은 것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도 주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부메랑으로 내게 돌아와요.

3. 갈등을 극복하며 사는 길
셋째로, 갈등을 극복하며 사는 길을 우리가 모색해야 되는데 그 길은 갈보리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삶의 모든 갈등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은 모든 쓴물을 달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처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광야에 태어나고 나 사는 가정과 직장과 환경이 말을 해도 다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쓴 연못물을 만났었을 때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 쓴물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모세가 기도하니 나무를 지시한지라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달아지고 물도 달아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광야길에서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그 나무인 십자가를 끌어 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쓴물도 달아지고 부패와 부정의 쓴물도 달아지고 병과 고통의 쓴물도 달아지고 저주와 가난의 쓴물도 달아지고 죽음과 지옥의 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찾을 때 마음 속에 달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형님이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당해서 이제 살 희망도 없고 가슴이 짓눌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면 목에 숨이 탁 막히고 가슴이 벌렁거리는 고통 속에서 이제는 살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밤중에 너무 가슴이 짓누르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깨어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왜 너 자신의 문제만 바라보고 나를 않바라 보느냐.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라. 갈보리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나를 바라보라. 그래서 그는 그 동안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만 바라보다가 예수님 십자가를 밤에 바라보니까 순식간에 그렇게 마음에 평화가 다가오고 염려, 근심이 다 녹아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 같고 새로운 생기와 생명이 돌아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더라는 간증을 해주신 것입니다. 쓴물이 달아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슴 속에 쓴물이 다 잔뜩 고여있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내어 맡기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가슴 속에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데코레이션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목에 걸고 다니는데 그 아무 효과 없어요. 십자가는 데코레이션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여러분 가슴 속에 모셔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슴 속에 모셔들이면 그 속에서 여러분을 치료하는 화해케하고 화목케 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그것이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갈보리 십자가 그 옛날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오늘 여러분 가슴 속에 예수님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역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서 오늘 죽고 오늘 부활하고 내일 죽고 내일 부활하고 순간순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우리는 그 예수를 의지하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나의 모든 흑암의 세력을 청산하고 예수 부활 내 부활로 예수님의 축복을 마음 속에 받아들여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냐. 우리 속에 끊임없이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매일같이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매일같이 이전 것은 지나가고 매일같이 새롭게 되는 역사가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깨달아 알고 이것을 마음 속에 바라보고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을 믿고 나는 매일같이 변화한다고 입술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학문으로써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안됩니다. 종교적인 예수 그리스도, 도움이 안됩니다. 의식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럼 무엇이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 죽고 지금 살아난 살아계신 현재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치료가 되고 화해가 되고 화목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 몸속에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산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 강단에 있는 조용기만 보지 마십시오. 이 속에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십니다. 주님이 몸이 찢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내 속에 계시고 그 다음에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부활의 생명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그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의 예수님이 되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붙잡고 기도하면 희안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상상을 초월한 변화의 기적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갈등이 극복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이 세상에 늘 죽음을 체험하지만 죽음을 극복하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겁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목적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기도 안하면 역사 안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서 우리 속에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달리시고 우리 위해 부활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해주겠지. 안그렇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할 것이요.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여러분 상처입은 가슴을 부등켜 안고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의 고통을 제하여 주시옵소서. 원한을 다 지워 주시옵소서.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축복해 주옵소서. 고쳐 주옵소서. 주님께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와 계신 것은 여러분을 도와주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변화를 가져오고 새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와 계시지 않습니다. 놀러와 있지 않습니다. 일하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구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주님이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당장 응답해 주실 때도 있고 시간이 좀 지나서 응답해 주실 때도 있고 그런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거의 응답 않해 주시는 것은 적고 응답해 주는 것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는 것하고 우리가 용서받고 사랑받는 것하고 관계가 대단히 깊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관문이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 속에 계신 예수님께 부탁을 하십시오. 주님 내 힘으로는 안되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랑과 은총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나를 도와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 내가 치료받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진지한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도우심을 받아서 우리가 서로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면 서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내 원하는 것을 뭐 되든 안되든 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가장 피곤하냐. 집회를 하고 난 다음에 피곤하지 않습니다. 안수기도 하는데 피곤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노는데는 더 피곤하지 않습니다. 언제 피곤하냐. 신앙상담이 제일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상담은 입 딱 다물고 들어줘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신앙상담을 와서 간단히 해주면 좋은데 처녀 시절, 소녀 시절부터 시작해서 시집와서 살 때 당하던 고통... 미주알 고주알 다 이야기 하는데 중간에 그만하세요. 그만하세요 하고 싶은 생각이 이만큼 올라오는데 그러면 낙심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 듣고 있는 것이 굉장히 피곤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안듣고 나 혼자 다른 생각하고 있으면 실컷 이야기 하다가 이야기 한 것중에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일나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말 했지요 하고 물으면 또 새로 다 이야기 하면 그것을 어떻게 듣습니까? 이 세상에 들어주는 것보다 힘든 것이 없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를 좋아하느냐.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주면 저 사람 정말 나를 이해하고 나를 동정하고 사랑하는구나. 저 사람은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꾸 말을 하는데 간섭을 하고 그만 하세요.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하면은 내 말 안들을려고 나를 이해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가장 어려운 것이 대화입니다. 남편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부인이 들어서 마음에 상처가 와도 이것 해주는 것 참 좋습니다. 남편이 이야기 하면서 부인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면 이해를 하는구나. 우리 마누라는 내 말을 잘 듣고 이해를 한다. 속으로는 바보같은 소리하네. 그렇게 되더라도 대화를 하려면 부인이 이야기 하면 남편이 시끄럽다 시끄럽다 하는말 늘 그말 하는데... 간단히 해 내 다 알아들을테니까.. 그러면 굉장히 상처를 입거든요. 부인이 조잘조잘 말을 하더라도 자꾸 씽긋이 웃고 가만히 처다보고 있는 거예요. 안들어도 듣는 척하고 이해 안해도 이해하는 척하고 그러면 그것이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는 목사님들하고 대화를 많이 하는데 참 와서 답답한 소리 많이 합니다. 결국에 답답한 소리를 하고 난 다음에 최후에는 내게 제시해 놓는 것이 돈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돈도 몇십만원, 몇백만원 달라고 하면 있는 것 다 세이브해서 주겠지만 최소한도 3억, 5억, 10억, 20억, 30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돼요. 내가 줄 돈도 없거니와 줄 마음도 없어도 왜 그 돈이 필요한가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돼요. 그러다 나중에 큰교회 가진 죄로 빌어야 돼요. 나도 돈이 없어. 지금 교회가 어려워. 더구나 지금은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한 사람이 무슨 돈이 있느냐. 나는 원로요, 현직이 아니다. 그러면 인사권, 재정권이 없으니 이영훈 목사에게 가거라. 내 짐을 떠맡기거든. 그러면 또 그대로 가느냐. 그대로 안갑니다. 목사님, 이영훈 목사에게 전화 한통 걸어주시든지 편지 써달라고 합니다. 나는 짐을 맡겨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안물러 가거든요. 그러므로 대화라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내가 남의 말을 들어주고 그 다음 들은 말을 오해하지 않고 해설을 해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느냐. 예수님께 기도해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에게 들을 수 있는 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우리가 살아갈 때 부부간에도 대화가 되고 부모 자식 간에도 대화가 되고 이웃 간에도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듣는 일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창조적인 힘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곁을 떠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기 말을 잘 알아주는 남편 최고입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부인 최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확 열리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남에게 내 있는 속에 있는 말을 다 부어놓고 털어놓고 난 다음에 상대가 이해하고 알아주면 굉장한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건조하고 지루한 이야기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진심으로 경청하는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대화할 때 마음을 다해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평가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자꾸 가로쳐서 평가를 하면 싸움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안되고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 다 함께 읽어 보십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임이라”
보세요. 꼭 내가 한 대로 상대방에서 받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 일생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라고 늘 말합니다. 너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분쟁과 갈등의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안개 같은 삶을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세안심 내세복락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우리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내 마음에 큰 고통 사라진다고 찬송한 것처럼 십자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나무 십자가든지 금속 십자가든지 매달아 놓은 십자가가 아니라 내 속에 매달려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흘린 그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아니고는 아버지 앞에 나갈 수도 없고 우리 이웃과 화목을 이룰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으나 십자가를 통해서 됩니다. 초자연적인 부활의 능력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흑암의 세력이 밀려와도 십자가를 의지하면 십자가는 흑암을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독을 중화시켜서 단물로 다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이웃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용서와 화해와 평안과 행복을 가져와야만 합니다.
용서하지 아니하면 화해가 되지 아니하고 화해 없이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이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용서도 화해도 평화도 행복도 예수 십자가가 그 근본이 된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이웃과 대화가 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 때문에 된 것이오니 십자가를 끊임없이 의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십자가를 의지하고 용서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화목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평안을 가집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사랑을 합니다. 십자가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다른 종교와 우리가 무엇이 다릅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우리를 끌어안아주는 이것이 어떠한 종교보다도 다른 것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사랑하고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십자가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각자 성도들 가슴 속에 못박혀 계시고 부활해 계신 주님, 못박힘과 부활이 항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일어나고 있사오니 그를 통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기적이 넘쳐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겨 싸이지 않고 답답하지 않고 버림바 되지 않고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