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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1. 주일4부설교 십자가와 인간관계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할렐루야~ 오늘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친히 와 계십니다. 한번 신앙고백을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 안에서 행복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평안하고 건강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십자가와 인간관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항상 갈등과 대결이 끊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미 아담은 하와를 원망하고 하와는 아담을 원망하고 부부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은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에 갈등과 미움으로 말미암아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이는 살인사건으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갈등과 대결이 없는 곳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많은 편지를 받고 있는데 그 편지를 보면 가정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을 바라는 편지가 많습니다. 거기에 보면 부부 간에 갈등과 대결이 있는 가정들이 너무나 많아요. 어떠한 분은 말하기를 상당히 연애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더라. 연애할때야 잘 보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떠니까 모르지요. 결혼이란 실제생활에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그런 글을 적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직 갈등과 대결을 극복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간절히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길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의 갈등과 대결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 첫째는,“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비인격적으로 내가 이용의 상대로만 삼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 아주 냉정하고 사랑이 없고 이해가 없는 차가운 관계를 그것과 그것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또 둘째는“나와 그것의 관계”인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관계인데 이 관계는 어설픈 관계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셋째 관계는,“너와 나의 관계”인 것입니다. 나도 당신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당신도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세요. 너와 나의 인격적인 관계, 이것이 인간으로써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관계인데 그 관계도 언제나 미움과 원한과 갈등이 들어와서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 인간관계를 중매하는 촉매자가 필요한데, 그 촉매자란 바로“영원자 너” 즉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갈등과 대결을 극복하고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론> 1. 미움과 원한에 짓눌린 마음 우리가 첫째로, 마음이 병든 사람이 어떠한 현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 보십시다. 마음에 병든 사람은 모든 것을 미움과 원한의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마음에 미움이 꽉 들어차고 원한이 꽉 들어차서 미움과 원한을 풀어 놓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한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모든 사람이 부정적이고 비평적으로 보이며 악의에 꽉 들어찬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는데 마음이 악한 사람은 미움과 원한과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람들의 부패한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 북부의 한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 폭탄을 가지고 와서 던졌습니다. 자기 부인도 그곳에 없고 자기 자식들도 없는데 괜히 남의 결혼식에 가서 폭탄을 내어 던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폭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6월에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자다가 갑자기 집을 나간 아내 생각에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 자기 아내하고 닮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잡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억울하게 그는 잡혀 죽었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2008년 논현동 고시원의 방화 및 살인 사건을 비롯해서, 자신의 분노와 화를 삭히지 못해 낯선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묻지마 살인’이 너무나 많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미움과 원한에 마음이 짓눌리면 모든 것을 색안경을 쓰고 보면서 부정적이고 비평적이며 악의에 꽉 들어찬 생각과 말을 합니다. 심지어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17절에는“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지 않고는 도저히 안됩니다. 교훈을 하고 가르치고 부탁을 한다고 악한 마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성령이 변화를 시켜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밥이 먹기 싫은 사람을 자꾸 밥먹으라고 한다고 먹어지나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게 되는 것처럼 성령이 마음 속에 변화되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변화의 능력을 주셔야 변화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 힘으로 안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대신 살아주고 주인으로 앉아있을 때 내가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오늘날 현재 이 자리에 내 마음 속에 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연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지금 성령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인 톨스토이는 귀족 출신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그의 작품으로 많은 갈채를 받았지만 늘 만족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지고도 마음에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었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나의 회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5년 전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습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이와 같이 우리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변화를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변화되어야 되겠다. 우리가 부부 간에 서로 갈등과 미움이 있으면 남편이 마음을 고쳐먹든지, 아내가 마음을 고쳐먹든지 한 편에서 변화되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변화 받으세요. 변화 받으세요 한다고 변화 안됩니다. 아내가 남편보고 당신 변화되어야 됩니다. 변화 되어야 됩니다. 더 악화됩니다. 자기 마음 속에 변화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회개하고 잘못을 빌고 하나님 내 힘으로는 변화가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리 사랑을 해도 사랑이 안되고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가 안되고 변화가 안되는데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원하고 소원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이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로 24절에“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입을 수 없는 것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를 받기 원하고 이기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변화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반드시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원리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의식과 형식만 가지고서 왔다갔다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와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씽이 네팔 지방의 한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험한 산길을 걸어가니 눈보라가 치고 몸이 벌벌 떨립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이 그 길을 걸어가다가 동료가 되어서 함께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산길을 걸어가는데 한 노인이 얼어서 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다 씽이 말하기를 이 분을 모시고 가자니까 같이 간 사람이 당신 돌았오? 우리도 지금 죽을 지경인데 이 눈보라치는 산길을 이 노인을 업고 가다가 우리 다 죽어요. 나는 그냥 갈래요. 그런데 선다 싱은 좋은 신자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노인을 어깨에 걸머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동네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동안에 얼마나 땀이 났던지 더위가 그 어른 노인의 몸에 배어 들어가서 노인이 살아났어요. 살아난 노인을 업고서 기어서 가다시피 갔는데 동리 입구에 가니까 빳빳 얼어서 죽어있는 시체가 하나 있어요. 누군가 보니까 먼저 버리고 혼자 달아난 사람이 얼어 죽어 있습니다. 사람은 함께 가면 삽니다. 혼자 가겠다 하면 죽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풍이 불어왔을 때 정부에서 식목을 한 나무들이 모조리 다 뿌리가 뽑혀서 죽었습니다. 굉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무를 정부에서 많은 돈을 들여서 심었는데 이 태풍에 다 뽑혔느냐. 그러나 산에 총총히 심어있는 나무는 한 그루도 안뽑혔습니다. 잘되라고 거리를 두고서 심은 나무는 다 뽑혔는데 알아보니까 안뽑힌 나무는 총총 심어 놓아서 보기는 좋지 않지만 뿌리가 서로 연결이 되어서 바람이 불어도 니뿌리 내 뿌리가 잡고 있으니까 안움직였어요. 그러나 잘되라고 멀리 심어놓은 나무는 뿌리가 서로 엉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뿌리만 의지하니까 바람이 부니까 싹 빠지고 넘어지고 말았어요. 우리 인생도 잘나가나 못나가나 우리의 삶이 뿌리처럼 엉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왜 교회에 이렇게 모이는 것입니까? 나 혼자 예수 믿어도 믿을 수 있는데 시험과 환난을 당하면 쓰러집니다. 그러나 한두사람 모이면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서 서로 밀어주고 붙들어 주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사람이라도 두 세사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야지 혼자 살면 넘어지고 부러지고 버림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함께 잘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이기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만 정의롭다고 함 둘째로,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뒤돌아 보고 자기만 정의롭고 이웃은 악하다고 정죄를 합니다. 모든 일에 자기가 옳다. 남은 다 나쁘다. 나와 같이 안선 사람은 전부다 내 원수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 병든 마음인 것입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11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발앞에 내동댕이 치고 하는 말이 예수님, 이 여자는 음행 중에 우리가 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행음하는 자는 잡아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꾸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엎드려서 글로써 손가락으로 글을 적다가 허리를 펴서 그 사람들을 쳐다보고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맞춰보고 난 다음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을 쳐서 이 여자를 먼저 치시오. 그리고 난 다음에 허리를 굽혀 또 손가락으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적었다고 말을 안하지만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적은 것은 십계명을 적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돌을 치려고 손에 손에 돌을 쥐고 온 그 사람들이 예수님 어깨 너머로 적는 것을 보니까 십계명을 적는데 모두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돌을 들어 여자를 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그 돌을 들고 자기를 쳐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남을 정죄하면 자기도 정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두사람 돌멩이를 버려두고 슬며서 빠져서 다 나가버리고 난 다음 한참만에 예수님이 허리를 펴서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보고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예수님, 없나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가서 죄짓지 말라. 주님은 정죄하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살리러 오신 것입니다. 죽이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이웃을 정죄하고 죽입니다. 짓밟습니다. 예수님은 죽이지 않고 짓밟지 않고 어찌하든지 용서와 사랑을 해서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지만 예수님은 좋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마귀와 연합되어서 남을 정죄합니다. 남을 살리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꼭 귀에 들어서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 성경을 읽었지요?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돈을 많이 떼먹고 죄를 지은 세리도 같이 기도하러 왔습니다. 바리새교인은 앞에 서서 가슴을 펴고 하나님 날 좀 보십시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세상 죄인들처럼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삽니다. 지금 저 기도하는 저 세리와 같이 남의 돈 횡령하지 아니하고 더럽게 인생을 살지 않고 깨끗하게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이 두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입었겠느냐. 세리는 정죄를 받아야 될 것인데 주님께서 저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 바리새인보다도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더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의롭고 거룩하고 참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눈으로 볼 때는 죄투성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니까 의롭게 보지요. 죄를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 보실 때는 죄투성이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심판받았지 않습니까? 우리 죄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할 수 없어요. 죄의 값은 사망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대신 심판을 받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짊어지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용서와 의를 주시는데 의롭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그냥 의로운 생각과 말과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는데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라는 말은 평생에 한번도 죄를 안지은 상태를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앞에 평생에 한번도 죄를 안지은 사람처럼 취급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의입니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예수님을 믿고 나오면 여러분 한평생 한번도 죄를 안지은 사람처럼 하나님이 취급을 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부끄럼없는 자격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의로움을 얻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 이외에는 우리를 의롭게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로 10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제일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제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짊어지고 몸찢고 피흘려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헤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 아니고 아무리 의롭게 행한다고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3. 율법 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 셋째로, 마음이 병든 사람은 율법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율법으로 판단해요. 자기가 생각하는 율법의 척도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서 판단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내가 남을 율법으로 판단하면 자기도 율법 하에 있기 때문에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법은 여러분, 남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그 율법이 자기는 면해 주느냐. 안 면해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전부 죄만 보입니다. 율법은 무엇과 같으냐. 거울입니다. 거울이 여러분 깨끗하게 화장시켜 줍니까? 얼굴에 때가 묻었으면 거울이 씻어 줍니까? 옷이 찢어졌으면 허울이 찢어진 옷을 바로 고쳐 줍니까? 거울은 우리의 잘못만 들추어내지 고쳐주지 않습니다. 율법은 거울입니다. 율법을 들여다보면 내 잘못만 보이지 나에게 용서와 의의 능력을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기도 저주받고 정죄하는 사람도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내리는 정죄와 심판이 자기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로 5절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보십시오. 남에게 내리는 정죄와 심판이 자기에게도 적용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은 완전하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완전하지 못하지요. 한 청년이 완벽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겠다고 20대에 집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40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장가 못가고 혼자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 완전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고향을 떠나서 객지로 20년을 다니다가 왔는데 아직 왜 결혼 못했느냐? 완전한 여자를 찾지 못했느냐? 그러니까 완전한 여자를 여러명 찾아보기는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결혼 못했느냐? 내가 완전한 여자라고 찾으니까 그 여자도 완전한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해도 그 여자가 내가 완전하지 못하니까 자격 없다고 내가 낙제를 먹었습니다. 이 청년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은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나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 모두다 용서와 이해와 동정이 필요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동정해야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용서와 이해와 동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을 찾으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4.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충고를 거부함 넷째로, 마음이 병든 사람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충고를 거부합니다. 건설적인 충고를 미워하고 거부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안듣습니다. 자기 말만 하고 자기 고집만 부리고 자기만 옳다하고 안 들어요. 잠언 12장 15절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했는데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권고해도 권고를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제일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권고를 해도 오히려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5절로 6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가장 이 세상에 어려운 것은 주위에 있는 어떠한 친구를 사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부하나 친구가 아부를 하고 자꾸 부정적인 말로써 귀에 속삭이는 사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바로서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말을 보고해줘야 되고 귀에 듣기 좋은 말만 갖다주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는 주위에 아부꾼들만 모아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게 아부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충고하는 사람의 말은 안듣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4절에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사악한 입술의 말을 잘든는 거짓말은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짓된 사람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로 23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눈가림만 하지 말고 아부를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듯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부는 제일 처음 듣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나중에 독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참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진실한 말을 가장 잘해줄 사람이 가정에 아내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진실한 말을 하지 아부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실한 이야기하지 아부하지 않습니다. 잘못났는데도 이웃 사람은 아~ 잘났다. 제일 미인이다. 참 맵시가 좋다. 그말은 굉장히 듣기 좋지요. 남편은 너무 잘난체하지 말라. 별로 잘나지 못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 듣기 싫지요.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뒤를 돌아보면 내게 와서 아부하는 것은 귀에 듣기가 좋습디다. 그러나 내게 와서 참말을 하는 사람은 나쁜놈 지는... 이런 마음이 생기니까 고약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으면 말을 들을 때 아부하는 말도 듣고 참말하는 말도 듣고 잘듣고 난 다음 올바른 판단을 해야지 자기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아니하고 아부한 말만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따라가고 싫은 말, 충고하는 말은 미워한다면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판단을 잘못하는 사람들 굉장히 인생에 고달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미움과 원한과 대결의 쓴물을 달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된 관계를 청산하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몰이해, 미움, 분노를 중화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수르광야에서 쓴물을 나뭇가지를 던져 달게 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쓴물이 가득한 마음에 끌어안고 던지면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가 용서와 의와 사랑으로 달라질 힘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인생을 사는 길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용혜원님의“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이라는 시를 읽고 마음에 큰 위로를 받은적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내가 해 준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준 작은 선물 때문에 내가 베푼 작은 친절 때문에 내가 감사한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작은 미소 때문에 내가 나눈 작은 봉사 때문에 내가 나눈 사랑 때문에 내가 함께 해준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면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작은 예수로서 그 사랑을 실천하고 따를 때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든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놓지 마십시오. 마음에 미움과 원한을 반드시 달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불행하고 이웃도 불행하고 어느곳에 가나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 십자가 앞에서 오늘 용서하십시오.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 앞에서 오늘 이시간에 다 잊어 버리십시오. 우리는 좋은 일은 기억하되 나쁜 일은 빨리 보혈로 씻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 안고 항상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미움과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살므로 수많은 슬픔과 고통이 우리 생활 속에 다가옵니다.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병들고 남편이 병들고 아내가 병들고 자식들의 마음이 병들어서 고통이 다가오는 개인과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버지여 십자가 이외에는 이 병을 고칠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주님 앞에 우리가 고개를 숙였사오니 예수님 십자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쓴물을 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차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