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 성찬주일설교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통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12)

할렐루야~ 여러분 이 세상에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끌어당김의 법칙.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나가서 그것을 끌어당깁니다. 행복하지 않는데 불행하다 불행하다 하면 내 생각과 말이 나가서 불행을 끌어 당깁니다 내게로... 그러나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을 끌어당깁니다. 슬프고 괴로움은 입으로 시인하면 나가서 슬픔과 괴로움을 더 주변에 끌어당겨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고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나는 기쁘다. 즐겁다고 말하면 기쁨과 즐거움을 끌어당겨오는 것입니다. 끌어당김의법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거나 말하면 이것이 나가서 이와같은 내게 끌어당겨온다는 것을 알고서 하십시오. 남에게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좋은 것을 한번 끌어당겨 보십시다. 오늘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다. 기쁘고 즐겁다. 평안하다. 건강하다. 형통하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론>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격심하고 무자비하고 참담한 고통이 대속의 고통이라면 그 대속의 고통의 대가를 우리가 반드시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그 십자가의 험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셨으면 대가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 때문에 그렇게 당했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계시므로 우리가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22편 14절에서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시편 기자는 성령을 통해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육체적인 고통이 얼마나 크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고대로부터 사용 되오던 형벌로 로마 제국에 도입되어,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 방법으로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격심하고 무자비한 고통이 아무 대가가 없는 것이라면, 헛되이 고통당한 것이라면 얼마나 처참한 패배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우리가 취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튼 원치 않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위해서 사놓은 그 열매를 거두어 들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
우리는 예수님이 당한 육체적 고통을 생각해 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영화는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멜 깁슨 감독이 제작한“그리스도의 고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교회에서 성찬식 할 때 그 멜 깁슨이 찍은 영화를 보실 것입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열두 시간을 상세하게 영화화해서 녹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마치 동물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채찍 끝에 이런 쇠갈고리가 달려있는데 이 채찍으로 때리면 채찍이 몸에 감기고 쇠고랑이 몸을 파고들어가 당기면 몸이 쫙쫙 찢어졌습니다. 원래 사형수를 때릴 때 40에 하나 감한 매 39차례를 때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로 오르셔서 손과 발을 대못을 박고 십자가에 달려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6시간 동안 매달려 있다가 최후로 그들이 와서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고통을 당했나요?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우리 때문에 당한 거에요. 주님 당신 자신 때문에 당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들이 당해야 될 죄의 고통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일생의 죄를 다 짊어진거에요. 우리 아직 미래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지을 죄도 다 주님이 이미 다 걸머진 거에요. 일생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매를 맞고 피를 흘려서 청산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라는 말을 고쳐서 나라고 해서 한번 따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내 허물, 내 죄악 때문에 주님이 그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감사드려야 될 것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체의 질병이 가져오는 몰인정하고 무정하며 살인적 인 아픔을 주님이 대신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병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병이 몰인정하고 무정하며 살인적인 아픔을 가져온다는 것을 본인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느껴도 예수님은 우리의 그 고통을 느끼시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질병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로 17절에“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누구에게 대신 맡긴 것 아닙니다. 친히 담당하셨어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을 친히 짊어지시고 예수님이 고난당하여 청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잠재우지 못하면 헛된 고통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을 당했는데 나는 나대로 병 앓고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은 것 헛된 고통 아닙니까? 우리를 치료하시는 효과가 없는 막연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당하셨다면 주님은 대속자가 아닌 나약한 선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은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대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헛되이 고통당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병고가 예수님을 믿어서 나아도 좋고 안 나아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고통을 가치없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가치가 있어야지요. 오늘 우리가 나아야 그 고통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낫고 안낫고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중대한 문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시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린 그 대가로 우리를 저주와 절망에서 건져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의 고난을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받은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고 청산한 것입니다. 저주를 청산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제하고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에 저주받은 사람은 나무에 매달라고 그랬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린 것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저주를 받습니까? 여러분과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저주의 대가로써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축복의 복음을 전하고 형통의 복음을 전한다고 기복신앙자라고 공격을 합니다. 여러분, 제3자가 성경을 모르고 볼 때는 왜 조목사가 예수 믿고 축복받으라고 설교하느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내 가난과 내 저주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는데 그 대가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부모님이 피와 땀을 흘려서 노력을 해서 사업을 일으켜놓고 그 사업의 열매를 자식에게 하나도 안주고 헐벗고 굶주리고 교육도 안 시킨다면 부모의 수고와 고생은 헛된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식 잘되기를 원하시지요?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당하면 자식을 위해서 그 수고와 고통의 열매를 다 나누어주면서 이놈아, 너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공부 좀 잘해라. 좀 좋은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대신 짊어졌는데 야 이놈아 좀 잘살아라! 좀 모든 일에 모든 것이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 그렇게 말씀할 것입니다. 나도 욕 얻어먹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교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예수님을 그런 예수님으로 가르쳐 주고 있으니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복 받으라는 말 안하면 거짓말하는 것이지요.

2. 예수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통
이사야 53장 7절로 8절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정신적인 고통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로써 정죄를 당한 고통, 육체적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헝벌 받을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고통을 당했는데 육체적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 고통의 대가로 반드시 믿는 자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칭하시는 은혜를 주려고 주님께서는 결심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 값없다는 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값은 예수님이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지불할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믿음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예수님이 값을 지불했습니다. 2천년 전에 지불했습니다. 이제는 공짜로 여러분은 믿기만 하면은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의로움을 주시옵소서. 거룩함을 주시옵소서. 구원을 주시옵소서하고 믿음으로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때문에 절대 고독, 절망의 고통의 대가로 화해와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렸습니다. 죄인과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절대적인 고독과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 고통을 청산하므로 우리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 찾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대표기도하신 우리 장로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저의 마음이 찡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같은 죄 투성이가...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빠 아버지 하나님! 굉장히 다정하지 않습니까?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성경에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했으니 이제 살아난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시므로 더욱 구원은 문제없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인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당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데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고통과 공포가 없을 턱이 없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에 죽는 고통을 옮겨 주시옵소서.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피가 되어서 흘렀습니다. 우리가 피땀을 흘린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땀이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질 때는 얼마나 마음에 절절한 심정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허덕일 때 그 죽음에서 놓아주기 위해서 대신 죽음을 걸머지고 죽음의 공포를 다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죽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고 협박 공갈하는 마귀를 없애버렸습니다. 마귀를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에서 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당하신 영적 고통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뿐 아니라 영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마귀와 온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들로 증명하라. 십자가에 죽어가는 사람보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영적인 세계의 진리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 엄청난 압박을 가해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느냐. 조롱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로 42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얼마나 모욕감을 예수님이 느꼈겠습니까? 그런 그 모욕을 당하고 영적인 괴로움의 대가로써 우리에게 아들이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인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이 아니라고 그렇게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누가 말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증을 가질 수 있도록 아들의 영인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우리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손 내려 주십시오. 그 보통 해서 아버지라고 말이 나오는 것 아닙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나 당신 아버지요 그러면 뺨 얻어 맞습니다. 네가 무슨 우리 아버지냐? 그러나 내가 나은 자식, 기른 자식은 내가 네 애비다. 시큰둥 하더라도 아버지라고 하지 개라고 말 안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피가 DNA가 아버지와 아들을 증명하고 연결고리가 되는 것처럼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인데 아버지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통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요, 육신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거듭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마지막 기도가 거부당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 지금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어찌하여.. 얼마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했는데 주님이 대답 안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대답 안하시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친아들로써 기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대답하신 그분인데 십자가에서는 기도할 때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은 대답 안했습니다. 그것은 왜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한껏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게 만들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대답 좀 해 주십시오 왜 나를 이처럼 버리셨나이까. 안했죠? 그 대가는 무엇이든지 주님 이름으로 구하면 우리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주님이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14절에“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내가 기도 응답 못 받는 고통을 대신 짊어졌으므로 너희는 이제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가 중보를 써서 응답받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응답 안 받는다고 하면 잡아당기는 법칙에 의해서 응답 안 받는 역사가 주변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응답받는다. 응답받는다 하면 당기는 법칙에 의해서 응답받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과 교통이 끊이지 않았던 아들이 하나님께 버림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적인 고통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버림받는다는 것 여러분 엄청난 고통입니다. 남에게 버림받는 것이야 상관없지요. 그러나 가족들에게 버림 받아 보십시오.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아내에게 버림받거나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자식에게 버림받을 때 그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신당할 때 그 배신의 고통이란 보통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세이전에 아버지와 같이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렸습니다. 해도 어두워지고 달도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말할 수 없는 흉물이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버려버렸었습니다. 그가 그 죄가를 다 지불할 때까지 그는 죽음의 형벌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고통을 당한 것은 여러분과 나로 하여금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버림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 세상 다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린다는 말씀대로 버림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1절로 12절에“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우리의 죄와 범죄를 대속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므로 이제는 여러분 언제나 주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리라. 여러분 마귀가 와서 너는 기도해도 응답 안한다고 하거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두시간을 온전히 버림받아서 고통당한 것은 나 때문에 그렇다. 이제 예수님이 버림 받은 모든 그 상황을 청산해 버리기 때문에 나는 환영받고 영접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마귀가 한길로 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환영받고 영접 받는 사람이다. 어깨 펴고 주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대가로 믿음으로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며 하나님이 우리와 원수된 담을 다 헐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는데 여러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우리가 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옆에 사람보고 당신은 나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렇게 인사해 주십시오. 미워도 내 형제 자매요, 잘나도 내 형제 자매입니다. 주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화목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엡 2:14)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자기 육체로 담을 헐어버리고 또 우리가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이웃과의 원수된 것을 당신의 몸을 깨어서 담을 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장 슬퍼하는 것은 당신이 피로산 형제간에 우리가 화목 못하는 것을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 자식들끼리 싸우는 것 제일 마음이 괴롭습니다. 자식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살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렇게 하면 우리는 타당할지 몰라도 하나님 가슴에 못을 받고 하나님을 할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볼 때는 못나도 내 자식, 잘나도 내 자식입니다. 못났다고 해서 하나님 우리 버리고 잘났다고 해서 끌어안지 않습니다. 못난 자식 더 불쌍히 여기사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못나고 잘 나고는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요, 밉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실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미워할 수도 있고 용서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 때문에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내 특권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싫다고 싫어할 수도 없고 내가 좋다고 특별히 그 사람만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아교풀이 되기 위해서 몸을 찢어서 아교풀이 되어서 우리에게 내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마땅한 대가 없이 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고통만 당하셨다면 주님을 앙망하는 우리들에게는 캄캄한 절망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통의 대가를 당당히 요구하고 그 열매를 누림으로 주님의 고통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하고 원수들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누구 죽음입니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당 내 천당. 그러므로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죄와 허물, 질병과 저주, 죽음을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열매를 누려야 주님 고통을 가치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용서주기 위해서 고난당했으므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허물을 재하셨으므로 거룩하고 성령 모셨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았으므로 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저가 저주를 받았으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저가 죽었으므로 나는 삽니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계산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왜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고난당했는데도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고난만 당하고 살아야 된다고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 우리 성찬을 대할 때 느껴야 될 것은 이 떡은 깨어진 몸인데 내가 그 깨어진 몸을 먹는다. 효과가 없이 그냥 장난으로 먹는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 몸이 깨어집니까? 잔을 마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다. 내가 그 피를 마신다. 아무 의미 없이 예수님 피를 흘렸다면 우리는 마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거하면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로 나쁜 것 주지만 예수님이 좋은 하나님이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려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말씀한 것이니 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마땅히 좋은 것이 일어날 줄로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시는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몸을 찢어주고 피를 흘려주셨으니 오늘 그 대가를 믿음으로 다 받아 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