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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29. 주일설교 죽음, 절망도 되고 희망도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는 정죄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또는 정죄또는 정죄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6~21)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죽음, 그것은 절망도 되고 희망도 된다”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위인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경제개발이 1위가 되는 것은 좋지만 자살에도 1위가 되면 별로 명예롭지 못합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는, 2009년을 기준으로 28.3명,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10년 새 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살게 되면 더 행복할줄 알았는데 옛날에 피난살이 고달프고 괴로울때보다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 희안한 일 아닙니까? 사람의 행복이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슬픔은 뼈로 마르게 한다. 마음에 슬픈 일이 다가오면 뼈가 마르는데 자살 안할 도리가 있어요? 최근에 20대 사망 원인의 44.6%, 10대도 33%가 자살로 사망한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애들이 약간하면 자살해요. 세인즈 버리는 런던에서 발생한 자살을 분석하면서 자살의 원인을 “고독”이라고 말했습니다. 외롭다. 생활이 향상되고 문명이 발달될수록 사람은 고독해진다. 고독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한다. 엔딕스는 직장 동료나 이웃, 가족들 사이의 인간관계에 의한 “상처받은 자존심”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데 그것을 치료해 주지 못하니까 극단적으로 자살로 그것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마음에 쓴물을 달게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쓴물을 마시고 있어요. 그 마음에 쓴물이 넘쳐나는데 이것을 변화시킬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변화시키지 못하니까 결국에는 쓴물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평생을 살면서 죽겠다고 생각 한번도 안해본 사람 있어요? 저는 많이 해봤어요. 일생을 살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몇 번이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에 견딜 수 없으니까. 며칠전에 제가 저명한 목사님 한분 만났는데 아주 옛날에 제가 그 목사님과 이야기 할 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울 때 너무 힘들어서 순복음아파트를 지어놓고 7층에서 자살하려고 창문틀로 몸을 내밀었다가 말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님 뭘 그렇게까지 해서 됩니까? 그러면서 자기는 속으로 신령한 목사가 무슨 자살하겠다고 창문틀로 몸을 내놓느냐. 그렇게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며칠전에 내게 와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도 얼마전에 너무 목회하는데 힘들어서 죽어버리까 생각했는데 그때 내 생각이 나더라고... 여러분, 마음에 스트레스가 심히 걸리면 신령한 사람도 안신령한 사람도 똑같이 자살 반응이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어버리고 싶다. 다 이 일을 끝마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난 다음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땅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우리가 삶의 저 건너편에 있는 죽음의 세계에 관해서 알려면 주 예수께 나오는 도리밖에 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추측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 이외에 천국에 대해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고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고 또 죽으셔서 음부에 내려갔다가 부활해서 승천하신 주님, 주님만이 천국을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 가르침을 순종하면 죽음은 큰 영광과 희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 그 자체가 처절한 절망이 될 수도 있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이 갈림길에서 사는 것입니다. 처절한 절망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영광을 맞이할 수도 있는 그 죽음 사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인간의 삶 - 절망 위의 모래성 첫째로,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은 절망의 토대 위에 있는 모래성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아무리 있다해도 그 삶은 모래성인 것입니다. 언제 폭풍우가 불어오면 날라가버릴지 모릅니다. 폭우가 오면 떠내려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삶이란 무엇이냐. 그들 정의한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은 예수 안믿는 실존주의 철학자인데 인생이 무엇이냐, 공정하게 그들이 정의하기를 인간은 삼대절망에 휩싸여 있는 존재이다. 그 첫째가 죄책과 정죄의 절망이다. 죄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모두다 마음속에 죄를 짓고 그 죄책으로 양심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 어려움 당할수록 죄책은 더 머리를 든다. 죄책의 절망, 다 가지고 있는 절망이다. 그 다음에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세상에 살아가면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산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의미가 없다. 시골에 촌노라도 하루종일 밭 호미질하고 밭 갈다가 허리를 툭툭 치고 일어나면서 휴우~ 인생이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 그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의미에 대한 절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 없잖아요. 자살하면서도 죽기 싫거든. 죽음보다 스트레스가 더 심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죽음은 절망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마음속에 불안과 절망을 가지고 삽니다. 죄책과 정죄,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의 절망에 둘러싸여서 그 모래성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 이것들이 무너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또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사람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절망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난 다음 에덴에서 쫓겨났지 않습니까? 인생들은 쫓겨난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가 가장 큰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는 그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질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버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탄식을 하고 통곡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절망 가운데 처해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땅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이 땅에는 하나님이 저주한 땅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가시와 엉겅퀴가 납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니 부부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부모 자식 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형제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사업상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아무리 치워도 치워도 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나는 저주의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하나의 절망인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 아담을 보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지었으니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사람이 돌아가려면 그냥 돌아갑니까? 병들고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1절로 11절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극도의 영화를 누렸습니다만 그가 그 영화 가운데 절망의 전도서를 지은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그런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이 절망을 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세계에 머리 좋은 철학자들이 모여서도 인간의 존재는 절망의 존재라고 말하고 성경은 말할 필요없이 인간을 절망의 존재라고 말했는데 이 가운데서 우리가 희망을 얻고 살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 돈을 벌면 희망이 있겠다 싶은데 돈을 벌고 난 다음 그 돈을 지키는데도 절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도 얻으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키기에 절망이요, 위에 쳐올라가자니 힘들고 절망이요, 지위도 명예도 금전도 청춘도 다 절망이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항상 기쁘고 즐거운 사람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절망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 - 희망과 꿈의 토대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희망과 꿈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느냐. 이 절망에 처한 인생들을 주님께서 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서 오지 않았고 종교를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선각자나 선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자체가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멀리하면 구원을 멀리하는 것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21절 오늘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빛이라. 빛을 등지면 어둠을 안고 살아야 되고 빛을 안고 가면 밝은 빛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빛이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빛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고 예수님이 바로 진리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예수님이 바로 빛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의 등록이 생명세계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항상 큰 소망을 가지고 봐야 될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과 나 한사람 한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다 청산한 것입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이요 하지말고 저가 찔림은 나의 허물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이 아니라 저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저가 상함은 나의 평화를 위한 것임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하지 말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나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과 나의 죄, 허물, 질병, 저주, 죽음, 고통, 슬픔, 절망, 일체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세력은 주님이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청산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는 공짜로 받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이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심적으로는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육체적으로는 한없는 고통으로 몸찢기고 피흘리고 그 고난 속에서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대가를 다 지불하시고 마지막에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청산하고 승리를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진리를 알아야 돼요. 모르면 안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압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이루어진 모습을 십자가에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고생 당하셨구나. 그래서 그 진리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에서 아~ 못박혀 피를 흘리신 저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내 불의 때문에 내 병 때문에 내 저주 때문에 내 죽음 때문에 저기 매달려 있구나.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고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바라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생기느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내 모든 문제가 주님을 통해서 해결된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입술의 고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다. 그 다음 감사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고 알고 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만히 있는데 역사 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들어야 돼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예수의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자연적으로 뭘 봅니까?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내가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봐야 돼요.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했는데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돼요. 그리고 그 십자가 의미를 내 마음속에 되새겨봐야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당한 고통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죄도 허물도 질병도 저주도 절망도 죽음도 다 청산된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그쳐서는 안돼요. 나를 바라봐야 돼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모습을 바라보고 난 다음에는 나를 바라보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이구나. 그러면 예수 부활도 내 부활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용서받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고 성령받게 되고 치료받고 건강하게 되고 축복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부활 영생 천국인이 된 내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합쳐서 새사람이 된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조용기 너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너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하다. 너는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너는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너는 부활 영생 생명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입으로 시인하고 감사하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통해서 운행하고 성령이 운행하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겨났다고 성령이 운행할 때 하나님 말씀이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마음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있잖아요. 여러분 가정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있잖아요. 사업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있잖아요.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반드시 성령이 운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알아야 되고 그 다음 그것을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바라봐야 돼요. 성령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역사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깨달아 알아야 되고 그 다음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은 열두 해를 혈루병 앓은 여자 보십시다. 열두해를 혈루병을 앓았으니 좌절과 절망입니다. 가족들에게 분리되어 있고 늘 피를 흘리고 아무 치료도 효과가 없으니 이제는 절망과 죽음 밖에 없는데 그 여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한 것은 먼저 그가 들었습니다. 누가 와서 나사렛 예수란 분이 오셔서 문둥이까지 다 치료해 주신다. 혈루병은 문제가 안된다. 다 치료해 주신다. 복음을 들어서 마음에 큰 희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는 먼저 듣고 깨달아 알았습니다. 야~ 살 수 있구나.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고쳐 주실 수 있구나! 살수 있구나! 마음에 깨달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 혈루병 앓은 여인이 상상으로 바라본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낫겠다. 예수님이 내 근처에 오시면 내가 가서 뒤에 옷자락에 손만 대겠다. 그렇게 마음속에 바라보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 문앞을 지나갈 때 뛰어나가서 그 옷자락에 손을 대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병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과의 능력을 얻는 데는 반드시 이 과정이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진리를 듣고 깨달아 알고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고 그 다음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성령이 운행하신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이루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게 하기를 염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처럼 해서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의인이 되지 못해요. 죄를 짓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의인이 못되어요. 아편 중독자, 술중독자, 깡패, 마음대로 자기 마음이 변화되지 않아요. 흉악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돼요? 성령이 운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면 새사람이 되어 버려요. 성령이 그냥 운행합니까? 성령이 운행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모르면 안돼요. 이사야 53장에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신 것,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알아야 돼요. 아~ 내가 살 수 있구나. 그리고 난 다음 그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못박혀 고난당하신 것을 바라보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아~ 바로 예수 고난 내 고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구나. 주여, 믿습니다. 저것은 나를 위한 고난인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도박이 싫어집니다. 악한 말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깡패 생활이 하기 싫습니다. 세상 범죄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변화시켜야지 힘과 능으로 변하는 것은 작심사흘이라 사흘 지나면 옛날로 돌아가고 말아요. 우리가 근본적인 변화는 성령이 운행하면 근본적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으면 성령말씀대로 성령이 역사해서 큰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힘으로 도 안되고 능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큰 평안과 확신이 다가오고 우리가 이 땅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장막집이 무너져도 겁나지 아니하는 것은 성경말씀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15장 19절로 22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삶을 얻는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이 땅에만 살다가 간다면 불쌍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땅에 사는 것은 잠시 잠깐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이 저 세상에 예비되어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안지은 죄도 우리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사망을 상속받아서 죽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한일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 자나깨나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 나의 슬픔을 대신 짊어졌구나. 나의 이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졌구나. 내 고통을 대신 짊어졌구나. 너무 슬픕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하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죄짐과 슬픔과 고통을 걸머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바라보고 난 다음 예수님이 그 짐을 다 청산한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 역사하지 않는데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3. 나의 죽음 - 절망인가 희망인가? 그러면 셋째로, 나의 죽음은 절망인가 희망인가를 여러분 오늘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죽으면 절망이 기다리고 있느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느냐. 성경에는 누가복음 16장 19절로 26절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부자는 절망적인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죄책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무의 절망, 절망 중에서 어찌하든지 순간적인 쾌락을 누려보려고 일락을 즐기고 음주를 하고 쾌락을 취하고 살다가 죽어서 그 영혼이 음부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 허덕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문밖에 내버려진 거지 나사로는 비록 거지였고 온 몸이 병들어 헌데를 앓았으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고 모셨기 때문에 그 육신이 죽었을 때 사라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품안에 들어가 낙원에 들어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왜 했느냐. 사람이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자도 죽어서 음부로 들어가고 나사로도 죽어서 낙원으로 들어가고 반드시 이 땅에 산 생명의 결과가 저 세상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누렸으되 그 마음속에 천국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는 예수님 오기 전에 이야기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다음에 음부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들은 음부에 들어가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나중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짐을 받기 위해서 음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원은 천국의 대합실이요, 음부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의 대합실인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전부 다 죽어서 대합실에 가서 있어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낙원의 대합실에 불과 유황으로 탄 못에 들어갈 사람들은 음부의 대합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셔서 낙원에 내려가셔서 기다리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데리고서 3일 만에 부활에서 천국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대합실에 들어갈 필요 없어요. 이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을 닦아 놓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직행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를 안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입니다. 음부에 내려가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또 장차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좌절과 절망만 있지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한번 음부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낙원에 들어갈 소망은 예수님 전에 있었고 예수님 후에는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게 되니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비참한 강도 둘이가 우편 좌편에 못박혔어요. 흉악한 강도입니다. 살인자들인 것입니다. 방화자들입니다. 그 두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통당하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중 강도 한사람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능력이 있지 않느냐. 그리스도이거든 지금 당신도 내려오고 우리도 내려오게 하라. 이 고통에서 왜 우리를 건지지 않느냐. 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강도 한 사람이 야 이놈아, 너와 나는 죄를 짓고 난 다음 죄값으로 지금 십자가에 못박힌 것 당연한 이치지만 이분은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힐 일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을 쳐다보고 주님, 주님 오실 날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교회 나간적도 없고 하나님을 섬긴적도 없고 좋은 일한 적도 없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같이 매달려 죽어가면서 예수님보고 주님, 오시는 날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한마디 하니까 주님이 당장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것도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면 예수 공로로 말미암아 낙원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라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믿어야지 그 이외에 과학자, 철학자, 물리학자인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린 예수님을 믿을 때 왜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성령이 역사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고 운행하지 아니하면 아무일도 안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어야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알고 그것을 십자가에서 친히 바라보고 마음에 믿고 주님이 나의 구주라고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영생이 주어질 뿐 아니라 성령이 성전삼고 들어와서 여러분을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우리는 성령이여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의, 평강, 희락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성령이 나를 붙잡아서 변화시켜 달라고 늘 부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지 않고는 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중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흉보고 욕했습니다. 예수님을 등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정죄도 안하고 저주도 안했습니다. 이미 그는 멸망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했습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예수를 안믿는 사람도 믿다가 타락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 주님 강림하실 것인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나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당장 말합니다. 너는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강도에게는 희망의 십자가가 되지만 다른 강도에게는 절망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다 망합니다. 시편 90편 10절로 12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칠십 아니면 팔십, 그 중간에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갈지 모르니까 갈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다가 지옥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죽는 것이 화가되는 죽음도 있고 복이 있는 죽음이 있는데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이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발표된 우리 국민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45%가 자신을 하층민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45% 너는 사회에서 어느 계층에 속하냐. 나는 하층에 속합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또한 국민의 57%가 상위 계층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대학 졸업이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답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큰일인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꿈이 사라지고 방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행복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마음에 희망을 가져야 마음이 설레고 마음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주는 정치, 희망을 주는 정부, 희망을 주는 기업, 희망을 주는 사회환경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치의 무서운 독가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 박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고 말하며 그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삶의 희망을 꼭 잡고 있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6백만명이 독가스를 마시고 죽을 때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이 세계가 희망을 가졌든, 못 가졌든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이야 희망이 있든 없든 그것을 제켜 놓고 예수 믿는 사람만은 희망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희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몰트만 박사는 나하고 친한 친구인데 세계적인 신학자입니다. 그가 독일 군인으로써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서 영국 포로 수용소에 있는데 연락이 오기를 자기가 사는 고향땅이 폭격을 맞아서 다 불타 버리고 부모와 애인까지 다 폭사하고 죽었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듣고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밥도 안먹었습니다. 잠도 안잡니다. 이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희망을 잃어버렸는데 내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목사님이 성경책을 하나 갖다 주면서 성경을 잃으라고 하기에 그 좌절한 가운데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이 가장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봤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제자들에게 버림당하고 자기 육신도 고통과 괴로움 속에 버림당해서 몸부림칠 때 그 절망은 자기보다 더 큰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해서 절망을 이기고 부활이요 생명이 된 것을 보고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갖다주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다시 희망을 얻어서 포로에서 나중에 해방이 되었을 때 신학교 들어가서 주의 종이 되고 세계적인 신학자가 된 몰트만은 저와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해요.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포로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앞길이 캄캄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그 소식이 얼마나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듯이 마음이 상쾌해지고 희망이 생기고 살아갈 힘이 생기니까 용기와 능력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으로 유명한 존 번연은 “만약 예수님이 나를 맞이하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아래 내 몸을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희망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아무리 지어서 세상이 버려도 죄인 괴수도 용서하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허물진 인생이 되어 버림받은 사람도 예수님 앞에 용서받고 성령받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독한 병이 들어서 의사가 다 내버린 사람도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버림받은 사람도 다시 재기할 희망이 있습니다. 지옥가는 사람도 마지막에 예수님을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좌우간 예수님은 희망의 원천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날 어떠한 절망에 처한 사람이라도 예수님 안에 희망을 얻고 내일에 대한 행복과 기쁨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선각자나 선생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희망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억만장자 스티브 잡스도 죽었습니다. 얼마 전에 전자회사를 세워서 억만장자가 된 스티브 잡스도 죽었지 않습니까? 김정일도 죽었습니다. 억만 장자도 죽고 대대로 임금노릇 하려는 김일성 일가의 김정일이도 죽고 그들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동안 이 영원한 여행을 위하여 언제나 가방을 싸 놓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참 교회 목회하고 해외 선교를 할 때 언제나 저의 방에 가면 가방을 싸놓았었어요. 언제고 주일날 예배 보고 집에 들어가면 가방들고 비행장으로 뛰어 나가야 되니까 가방을 싸놓고 살아야 되었어요. 그런데 은퇴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해외여행을 많이 안하니까 가방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에 가방을 싸놓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롭습니다. 마음을 다잡아 정리정돈 해놓고 언제 주님이 부르실지라도 우리는 후회함이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양에서는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묘지가 있습니다. 공원처럼 가꿔진 묘지에는 묘비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고, 묘비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서 묘지에 먼저 간 사람들이 기록한 추모의 글을 읽습니다. 교회 나온 사람 예배 보고 난 다음 교회 당 안에 있는 묘지에 가서 묘비에 글을 쓴 글을 읽기도 하고 동리에 어른들이 죽어서 간 묘비에 기록한 글을 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단 세 줄로 짤막했지만, 흥미로운 글이 적혀 있는 묘비가 하나 있었어요. 묘비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남의 묘비를 읽었소.” 깜짝 놀랐습니다. 그 묘비를 읽고... 그는 첫 줄을 읽는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습니다. 알기는 잘 아네. 그런데 두 번째 줄에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곳에 서서 그렇게 피식 웃었소.”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재빨리 다음 줄을 보자 마자 거기에는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것이니까 빨리 준비하시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되겠다는 경고를 얻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러분, 우리가 남의 묘비를 읽을 때는 나는 안죽을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갔지만... 그러나 얼마있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묘비를 읽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소,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죽음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가 절망할 것인지, 더욱 큰 소망 안에서 기뻐할 것인지는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소망을 향한 죽음이겠느냐. 절망을 향한 죽음이겠느냐는 지금 여러분을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사후생」이란 책에서 인간이 죽음의 순간부터 겪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녀는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죽음을 눈앞에 둔 수많은 사람들, 사선을 넘었다가 되살아온 임사(臨死)체험자들을 통해 죽음 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했습니다. 로스 박사는 약 2만여 명의 임사 체험자들 즉,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담한 결과, 그들이 한결같이 겪은 죽음의 순간을 세 단계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단계,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는 나비가 고치를 벗어날 때와 같아서, 우리가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기 위해 육신을 벗어나는 과정입니다. 누에치는 집에 보면 고치에서 누에가 나올 때 자기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누에가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은 고치와 같아서 이것을 영혼이 벗어나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은 누구할 것 없이 죽을 때 다 당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물질적 에너지 대신 정신적 에너지를 받게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온갖 육체적 결함이 온전해지고 시공을 초월하게 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질 속에 살다가 물질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누구나 장엄한 빛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영적 보호자를 만나고, 생전의 모든 경험을 한 순간에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다시 살아온 사람들에 따르면, 그 빛을 받으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증언했습니다. 셋째 단계는, 첫째와 둘째 단계까지의 의식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됩니다. 이제는 영적인 세계 지식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에 눈과 코와 입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새롭게 비춰 보게 되고, 그동안의 삶을 통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로스 박사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결코 고통이 아닙니다. 죽음은 허물 같은 육체를 벗어버리고 좀 더 높은 의식 상태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체험했다고 사람들이 그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십자가를 잡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우리는 영생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깨닫고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믿고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해서 구원을 받고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세요.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그것을 믿으면 입술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자! 그러면 성령께서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신 것을 바라보고 걸머지면 성령이 역사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우리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성령이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이 여러분에게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찬송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흑암은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무는 유로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과 더불어 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고 성령 안에서 신앙이 자라다가 성령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 품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