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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8. 주일설교 무화과나무 잎의 옷과 가죽옷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야훼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11,21) <서론> “무화과나무 잎의 옷과 가죽옷”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의복의 문명이라고 칭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각 나라는 그 자연 환경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옷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속해 있는지 구라파에 속해 있는지 중동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옷이라고 말하면 항상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자라난 그 때는 1930년대니까 그때는 우리 한국이 일제의 강점하에 있었고 굉장히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릴 때였습니다. 더구나 농촌에 산 삶은 원시시대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5살인가 6살쯤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님께서 큰 마음을 잡수시고 저를 장터에 데리고 가서 난생 처음으로 멜빵을 걸친 양복을 하나 사주셨습니다. 처음 옷을 입어봤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입고서 집을 오는데 발이 땅에 닿는지 안닿는지 알 수가 없어요. 너무 좋아서... 그래서 그 멜빵을 메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자랑하러 나갔습니다. 일꾼들이 밭에서 일하는데 가서 제가 옷을 이렇게 하면서 내 옷 좀 보래~ 내 옷 좀 보래~ 그러니까 일하던 일꾼들이 다 와~ 어떻게 그렇게 좋은 옷을 입었느냐. 그때 양복을 보기는 눈딱고도 볼 수 없을 때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좋은 양복을 입었느냐. 그러니 더 심바람이 나서 자랑을 하러 멀리까지 갔다가 그만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평생에 그런 양복을 입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벗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오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부엌에 끌려가서 부지깽이로 얼마나 얻어 맞았는지 말도 다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께서 그 양복을 안입혀 주세요. 옛날에 입던 삼베로 만든 허름한 팬티 하나를 입혀 주시지 그 이후에는 옷을 안입혀 주셨어요. 그래서 옷이라고 말하면 그 양복이 늘 기억이 나면서 그것 다시 한번 입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납니다. <본론> 1. 아담과 의복 창세기에 태초로 아담과 하와가 입은 옷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보면 참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는 죄를 짓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존재했기 때문에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고 있어서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래요. 여러분. 사람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니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온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같이 임하신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굉장히 영광스럽게 보이고 찬란하게 보이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자마자 가장 처음 느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자 그들이 스스로 보니 벌거벗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아담이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하와도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화과나무가 넓적넙적하게 나무에 피어 있으니까 나무 잎사귀를 뜯어서 앞치마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 앞치마가 햇빛만 뜨면 말라서 쪼글쪼글해져 버립니다. 그러니 또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었고 또 쪼글쪼글해지고 그래서 도저히 부끄러워서 에덴동산을 거닐 수가 없어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굉장히 감격적인 말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으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뛰어가야지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그 결과로 영광의 옷이 날라가 버리고 발가벗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벌거벗었으므로 형벌을 두려워해서 숨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제가 마음에 기억이 나는 것은 남미에 가서 대군중이 모였을 때 그 모든 사람들에게 “Adam, Where are you!” 하나님이 먼저 너를 찾았다. 그때 그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일어나서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본적이 있는데 그 추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았기 때문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을 먼저 부르시고 찾아서 그 음성에 끌려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숨었느냐 하면은 벌거벗고 나면 두렵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보면 수치스러우니까. 수치스러움과 두려움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음이 떳떳하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두려울 것이 없으면 사람들 앞에서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에 벌거벗으면 두렵습니다. 사람들 앞에 설수가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능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으면 언제나 굉장히 담대하고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으니까 너희 벌거벗은 그대로 살아라. 그대로 다녀라. 내버려 놓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제일 처음 가죽옷을 입은 사람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고 에덴을 나갈 때 이제는 무화과나무 잎처럼 구겨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햇빛이 나도 능히 그를 대항할 수 있는 옷이 된 것입니다. 저주받은 거친 환경과 기후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가죽옷이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상징적인 옷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지어 입은 옷은 벌거벗은 수치와 절망을 피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 인간은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의 의복을 만들어 입습니다. 마음속에 어찌하든지 죄책을 가리우고 정죄를 가리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 이것을 덮어 보려고 애를 쓰는데 의로운 행위로써 죄악을 덮을 수 있는 옷이 되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보면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도덕적인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 기억해 보십시오. 모든 율법주의자들이 돌을 들어서 그 여자를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예수님 치지 말란 말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쳐라. 말씀대로 죄를 지은 사람은 돌로써 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쳐다보시고 난 다음 손가락으로 땅에 기록하는데 뭘 기록했는지 분명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감추인 죄악을 기록합니다. 너가 그 여자의 행위를 돌로써 쳐서 보응을 하면 그 다음 네가 돌을 맞아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돌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보니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돌만 다 땅에 떨어져 있지. 그때 예수님께서 여자보고 여자여 머리를 들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살펴보니 아무도 없어요. 없나이다. 그 다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장엄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왜,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죄를 짓는 시스템 속에 빠져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율법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때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으로 지를 안짓고 살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보고 얼마전에 그 이야기 했어요. 교회 나오니까. 목사님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교회에 못나갑니다. 교회는 다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나가지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나갑니까? 죄를 좀 청산하고 세상에서 죄없이 살 수 있는 처지가 되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보고 참 생각을 잘못하셨다고.. 교회는 죄인 클럽이라고... 클럽은 뭐합니까? 사람들이 가서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교제도 하는 것이 클럽인데 교회는 죄인 클럽이라고.. 의인은 나올 필요가 없다고... 의인은 의인 클럽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인 클럽입니다. 죄없다는 사람 다 세상에 있어요. 어떠한 사람이라도 죄없다는 사람은 교회 안옵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사람은 죄인 클럽인 교회에 오는 이유는 교회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곳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다하는 옷을 입혀 주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벗기고 흉보고 모욕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죄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흉보고 벗기고 모욕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와서 그것을 하면 잘못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아는데 칭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용서하는 곳입니다. 사하는 곳입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와서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받고 변화를 입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와서 용서를 받고 변화받는 곳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변화시키는 힘이 없지만 교회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변화를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변화가 안오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다가오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또 넘어지면 또 용서하시고 또 넘어지면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무슨 교회 와서 자꾸 죄짓고 또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그게 무슨 교회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를 짓고 내게 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얼마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 용서할까요? 아니라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 죄를 짓고 회개하여도 용서해 주라. 일곱 번씩 일흔번 한번 계산해 보십시오. 몇 번입니까? 7*7=49. 490번 아닙니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죄짓고 점심 먹고 죄짓고 저녁먹고 죄짓고 계속 회개하더라도 490번 죄짓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교회오면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아주 고약하고 미운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같았으면 저것 박살을 내는데.. 왜 박살을 안내느냐. 그래서 여러번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원수를 갚아주시되 박살을 좀 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는 박살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용서하는 곳이다. 교회는 박살내는 곳이 아니고 변화시키는 곳이다. 그러므로 너는 교회와서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너의 의무지 네가 원수를 비평하고 박살하는 것은 너의 의무가 아니다. 참 제일 처음에 괴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교회가 불공평하면 어떻게 하느냐. 박살받을 사람은 박살을 좀 내시고 쥐어 박을 사람은 좀 쥐어박고 그렇게 하셔야지 하나님이 물에 물탄 것같이 희미하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구원이 쉽게 되나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가 한꺼번에 구원이 안되니까 주님께서 오래 참고 또 참고 또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평생을 참아봤자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는데 70년, 80년 우리는 긴것같지만 하나님은 깜박할 사이가 70년, 80년을 보시기 때문에 한평생을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새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교회에 원수가 들어와서 박살 받을 것을 기대하면 실망합니다. 위해서 기도를 해주십시오. 축복을 하고 변화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분이 박살을 안당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박살 안당합니다. 계속해서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성경은 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하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죄를 한번도 안지은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나는 한사람 발견했어요. 제가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집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수만명 모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죄를 안지은 사람 한번 손들어 보라니까 많은 사람 가운데 한 30대 청년이 손들었어요. 그래서 요사이 소이 말하는 꼼수 아닌가 싶어가지고서 일어나라고... 탁 일어나요. 그러면 앞으로 나오라고 하니까 뒤에 자매님 한분이 그 허리를 잡고서 매달리고 있어요. 그러면서 날보고 그래요. 한 사람은 나오고 한 사람은 잡고 손을 흔들고 왠일이냐니까. 큰 소리로 우리 남편 정신병자에요. 그 옛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만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은 다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의롭다는 행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의 의복을 만들어서 입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롭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은 인간 삶의 의미를 좇는 바벨탑의 의복을 지어서 입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로 큰 사업을 해서 그것으로써 자기 의복을 삼고 자기 자랑으로 삼습니다. 바벨탑은 어떤 것입니까? 시날 땅에서 그들이 모여가지고서 백돌을 만들어서 탑을 쌓되 하늘에 닿게 쌓아서 자기 이름을 내고 다시 홍수가 나도 물에 빠져 죽을 이유도 없고 그 성에서 함께 모여서 하나님 없이 즐겁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은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은 결국 하나님이 흩어서 살라고 했지 한데 흉악하게 뭉치라고 안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을 지을 때 말을 바꿨습니다. 혼잡하게 말을 바꾸니까 벽돌을 올리라는데 짚을 올리고 짚을 올리는데 나무를 올리고 말이 안통하니까 바벨탑을 쌓지 못하고 무너지고 다 흩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탑을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여러분 모든 인생의 교만은 자기에게 영광스러운 옷이 되지 못합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됩니다.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됩니다. 모든일에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획을 아무리 세워도 하나님이 축복 안해주시면 그 계획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북한이 올해 2012년도가 강성대국을 이루고 대한민국을 총한방 쏘지 않고 흡수통일하는 해로 정했지만 그대로 되었나요? 김정일이 죽음으로 다 끝나고 만 것입니다. 다 계획을 세워 놓아도 그 계획을 세운 사람이 으어~ 끝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일을 하면 그것이 영광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아무리 옷을 지어 입어도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의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바벨탑으로 지칭되고 마는 것입니다. 헛되이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죽음을 이겨보려고 각종 종교적인 의복을 만들어 입습니다. 그 종교적인 의복을 만들어 입어도 그 종교가 여러분에게 구원을 갖다 주지도 아니하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면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종교적인 의복을 갖다 입어도 그것은 곧 낡아지고 없어지는 것뿐이고 종교적인 의복이 우리에게 생명을 갖다주지 못합니다. 종교적인 수양과 도덕과 노력으로 우리가 의롭게 됩니까? 안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복을 우리에게 입혀 주셔야 되는데 그 의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값주고 산 의복을 우리가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나의 일생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일생의 죄라는 것은 내가 어머니 배속에서 태어날 때로부터 시작해서 죽어 무덤에 들어갈 때 한평생의 모든 죄를 뭉텅그려서 주님이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과거에 지은 죄도 주님 청산하시고 지금의 죄도 그리고 장차 죽기 전에 지을 죄도 다 주님이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용서와 의를 얻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값없이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여러분, 공짜로 받는 것이지 선물은 대가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되 하나님의 용서와 의를 받되 대가를 지불하여 내가 훌륭한 일을 해야 되는줄 아는데 물론 그렇게 해야 돼요. 용서받고 구원받았으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되겠지만 구원을 받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선물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을 받고 여러분께서 대가를 지불하면 선물이 아니고 값으로 산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선물은 끝까지 선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고 난 다음 대가를 주면은 그 다음 그것은 선물이 안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우리 손자, 손녀들이 명절날 나에게 할아버지라고 선물 가지고 오는데 나는 선물 가지고 오면 절대로 돈 안줍니다. 대개 선물 가지고 오면 머리 쓰다듬어 주면서 돈 천원, 만원도 주고 이만원도 주는데 저는 안줘요. 그런데 애들은 그것 줄줄 알고 으레 손을 내밀고 나옵니다. 왜, 애들에게 깊이 인상을 남겨 놓기 위해서. 내가 애들보고 말합니다. 너희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주었냐 팔러 왔느냐? 선물요! 선물은 팔러 안왔기 때문에 돈없이 공짜로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아무런 돈을 줄 수 없다. 주면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말을 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선물로 주는 것이지 팔러 오신 것이 아니다. 대가를 주고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공짜로 선물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없이 저를 믿는 자마다 공짜로 받는다.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위대한 것은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속에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이 믿음의 대가로 성령이 오시면 성령은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푸는 영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가만 계시는 영이 아닌 것입니다. 공기처럼 우리속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난 다음에 하늘이 생기고 빛이 생기고 생물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그 마음을 누가 변화시킵니까?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그 새로운 마음의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부패에 넘쳐나는 사회를 무엇으로 변화시킵니까?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그 사회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국가도 세계도 성령이 운행하시면 새로운 세계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가져와도 종교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종교란 의복을 입어도 위선자를 만들 따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성령이 오셔서 변화시켜 줘야 위선자가 아닌 참된 의로운 옷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복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발거벗은 수치를 면케하기 위해서 입는 의복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입는 의복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탐욕의 의복도 있고 명예라는 자존심 의복도 있고 지위와 권력의 의복도 있고 온갖 의복을 만들어서 우리는 입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모든 인본주의적인 의복은 인간의 벌거벗은 존재를 가리어주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다 시들어버리고 마는 무화과나뭇잎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우리가 알아본 율법의 의복이나 종교적인 의복이나 물질적인 탐욕의 의복이나 명예라는 의복이나 지위라는 의복이나 권력이란 의복이나 다 입던 시간이 있으면 벗는 시간이 있습니다. 의복이 낡아져서 벗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이 만든 의복은 다 무화과나무잎과 같은 것입니다. 다 쭈글쭈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여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의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복,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의복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나면은 그리스도가 여러분 우리에게 용서의 옷이 되고 의의 옷이 되고 영생의 옷이 되고 기쁨과 소망의 옷이 되고 평안의 옷이 되고 모든 면에 우리를 도와주는 옷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지으신 의복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옷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입히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죽일 때 피를 흘렸습니다. 가죽을 벗기면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피흘리지 않고 가죽을 벗길 수 없지요. 그러므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드는 것은 훗날에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의 몸에 피를 흘리고 의의 옷을 벗어서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줄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생명 바꿔치기를 십자가에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생명을 다 받아들이고 자기의 생명을 여러분에게 대신으로 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천년 전 한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성령은 매 순간마다 여러분 속에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매순간마다 여러분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매순간마다 여러분에게 주어지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깨닫고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 은혜 속에 들어가서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리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절대로 교회에서는 죽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여서도 안되고 물론 육체적으로 죽여서도 안되고 생활로 죽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어 살리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사람들은 와서 하나님이 천국의 정의를 실천 안한다고 불평하는 사람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면 교회 정의를 실천하지 않느냐. 우리가 다 압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에게 천국을 주지 않고 의로운 자에게 주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당장 불의한 자가 심판을 받고 정의로운 자가 칭찬을 받는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나 하나님이 분명하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 왜 그러느냐면 교회는 그 자리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그 자리에서 구원하는 공장인 것입니다. 신제품이 그 자리에서 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낡은 제품들이 들어와서 변화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어서 나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새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므로 심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교회와서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의 뜻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오래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쥐어박아 죽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사랑했으니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의의 옷을 받아 입지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청산하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으니 그 의는 죄를 한번도 안지은 상태를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의롭다 말하면 아~ 그 사람 좋은 행동을 했으니 의롭구나 그렇게 하는데 성경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것은 여러분 일생에 한번도 죄를 안지은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죄가 안보여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죄가 안보여요. 의밖에 안보여요.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설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그 사람의 힘을 통해서는 종교를 가지나 수양과 도덕을 닦으나 아무리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옷을 입어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로 말했는데 그리스도의 흰 옷은 무엇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값주고 사는 것입니다. 보혈은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나에게 과거의 모든 죄와 허물을 벗겨버리고 하나님은 용서와 의의 옷을 입히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없애버리고 난 다음에 돼지소굴에 들어가서 살다가 살 수가 없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온다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성경에 말했는데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뛰어나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뛰어 나갔습니까?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왜 아버지가 뛰어나가서 아들을 마중했느냐. 옛날에 구약시대에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역해서 나간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 반역하고 나가서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가산하고 돼지소굴에서 살다가 못살게 되니까 종이라도 삼아달라고 오는 이것을 동리사람이 보면 돌로 나가서 쳐 죽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리사람이 나와서 돌로 쳐죽이기 전에 빨리 그 아들을 보호해야 되겠다 싶어서 아버지가 뛰어나가서 아들을 끌고 제일 먼저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면 뛰어나와서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동리사람들이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도록 뛰어 나와서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사랑으로 뛰어나와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탕자가 올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 그 더러운 옷 벗기고 난 다음에 허름한 옷 갖다 입혀라. 창고에 있지 않느냐. 그렇게 안했습니다. 옛날에 입다가 내버린 옷 그것 갖다가 입혀라. 그것도 아닙니다. 최고로 좋은 옷 갖다가 입혀라. 여러분, 우리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에 역사에 남는 인물 중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경이 제일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수상께서는 그렇게 좋은 옷을 입으시냐. 내가 세상에서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취미인데 좋은 옷 입는데 왜 잔소리가 많느냐고 그랬습니다. 저도 요사이 좋은 옷 입는 사람 흉보지 않습니다. 신문에서 가끔 좋은 옷 입은 사람 흉보는데 좋은 옷 좀 사입어서 내 마음에 자존심이 생겨 행복하면 고마운 일이지요. 사치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좋은 옷 입는 것은 괜찮아요. 저도 좋은 옷 많이 입어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이 돌아오실 때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도 제일 좋은 삶을 살면서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자본주의지 무조건하고 돈많고 성공한 사람은 나쁜 놈, 도둑놈으로 만드는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부자가 된다는 것 쉬운 일입니까? 눈물과 피와 땀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인데 부자를 쥐어박으면 안되는 것이 다 부자가 될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이 다 부자될 능력이 있어요. 어떤 사람 부자가 되어서 사업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 고용을 해줘야 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은 크게 성공을 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 밑에서 월급을 받아먹을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기업가들이 생겨나서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줘야 그 나라가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업가들이 일어나면 모두 도둑놈이라고 때려서 잡아버리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공산주의가 이 지구상에서 어느곳에 가나 실패하는 이유는 잘사는 사람 때려잡고 난 다음 다 똑같이 나누어 가지자. 똑같이 나누어 가지니까 똑같이 거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같이 부자가 안돼요. 우리 가만히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이 특별한 달란트를 주어서 사업을 잘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그 부자가 된 사람들에 의지해서 먹고 살 사람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 부자를 만들어 주시거든 혼자 그것가지고 먹고 살면 안되고 그것을 나누어서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면 나누어서 살자.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었는데 그대로 자랑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우리 제자들과 19개 교회를 나누고 3천여 교회를 개척하고 나눈 것입니다. 자꾸 나누어져야 돼요. 앞으로도 이 교회가 잘살려면 나누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만 잘살겠다고 잘되겠다고 웅크리고 있으면 우리도 망하고 우리가 도움을 줘야 될 사람들도 도움을 못받아서 망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못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예수믿고 난 다음 영혼도 잘되고 범사도 잘되고 강건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다 못되게 만들고 모두다 망하게 만들고 다 똑같이 거지고 만드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 아니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제자들 종들 보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기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라. 그 하나님은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우리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좋은 것 주기를 원치 않겠느냐. 신앙은 단계가 있어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죄악에서 건져냄을 받아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은 초보신앙인 것입니다. 초보신앙은 우리가 영육 간에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잘되고 그 다음 발전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신앙으로 나누어주는 신앙인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잘되어서 복을 받고 난 다음 그 다음에는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줘서 나처럼 함께 즐겁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갖다 입히니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갖다 입히고 그 다음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서 자녀된 것을 확증해 주시고 발에는 맨발벗지 않고 신발을 신기고 그 다음에는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하나님은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주님께 나오면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서 가장 좋은 의의 옷을 입히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고 여러분의 병을 고쳐 주시고 저주를 제하여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내가 이 은총을 주었으니 이제는 일어나서 너보다 못한 사람 도와주라. 못한 사람과 나누어라.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라.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전통적인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물로 뒤덮인 인생들을 거룩한 옷으로 바꿔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 허물을 벗겨서 허물을 지적해서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옷으로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허물로 심판 받으므로 우리가 허물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허물 다시 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옷,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거룩한 옷, 의로운 옷, 아름다운 옷을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으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옷, 거룩한 옷, 깨끗한 옷,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옷을 입혀 주시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 살다가 내일은 다 천당에 가야될 것 아니겠습니까? 영원히 이 땅에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혈로 무장하고 언제 이땅을 떠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마다 이 세상에 영생의 옷을 입고 치료의 옷을 입고 축복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춤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은 쉽게 쭈그러지고 낡아지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의의 옷을 반드시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치료의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생복락의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옷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입혀 주는 것입니다. 이 옷이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 입는 옷이 아니라 우리 속사람이 입는 옷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입는 옷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가지고 스스로 꿈을 꾸면서 입어보는 옷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입는 옷인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고백하므로 나는 의의 옷을 입고 있다. 나는 거룩한 옷을 입고 있다. 나는 치료의 옷을 입고 있다. 나는 축복의 옷을 입고 있다. 영생복락의 옷을 입고 있다고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휴 그 말을 믿습니까? 나는 안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사람들은 오해를 하는데 세상에 있는 믿음은 믿을 수 있을만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믿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부부간에 믿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형제간에 믿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홍해수가 갈라질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비과학적인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믿음이란 것은 모두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믿음을 말하지만 성경에 말하는 믿음은 창조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믿음이란 것은 기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기적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휴 그런 믿음은 나는 못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누구든지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 하고 그것이 이룰 줄 마음에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큰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게 필요한 믿음이 뭐냐.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그렇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제가 겨자씨를 늘 넣어다니면서 보여 주었는데 이제는 자꾸 옷을 갈아입다가 보니까 어디갔는지 흔적이 사라져 버렸어요.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 가슴속에 불신앙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서 아멘 하지만 속으로 안믿는 마음이 꽉 들어차 있다구요. 그런데 성경은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란 99%의 불신앙이 있더라도 그중에 1%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99%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100% 불신앙 가운데 99%는 안사라지고 있고 1%만 믿더라도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다 1%의 믿음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창조적인 믿음이요, 하나님과 말씀을 믿는 믿음이요, 이 조그마한 믿음만 가지고서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보십시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 되십시오. 나는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찬 꿈을 꾸십시오. 1%의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긍정적인 말을 하고 희망찬 말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무화과나뭇잎으로 쭈글쭈글한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적적인 의복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말씀을 믿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면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기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다 태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가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 믿음을 활용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운명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이 충만한 삶, 금세와 내세에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복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담력이 생겼기 때문에 모두다 마음에 비록 의심이 꽉 들어차 있더라도 1%의 믿음만 가지면 산을 옮기기 때문에 더 많은 믿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1% 믿음을 사용하게 되면 그 믿음이 자꾸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2주전에 기도원에 설교하러 갔는데 주의 종 아들이 13살 먹은 아들이 중학교 들어가서 축구부에 있는데 다리가 부어서 아프다고 해서 다리를 사용하기 힘들어서 병원에 가서 X-Ray사진을 찍으니까 뼛속까지 암이 퍼졌어요. 암이 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점까지 다 암이 걸렸는데 의사가 깜짝 놀랍니다. 이러고도 다리뼈가 안부러진 것 희안하다고...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저기 나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병원에서는 치료하지 못하니까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대학병원에 가니까 보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원자력 병원에 가라고... 그래서 암 원자력병원에 가니까 원자력병원에 가기전에 기도원에 데리고 왔어요. 걔가 자꾸 우리 목사님 안수기도를 받게 해달라고 어린 아이가 자꾸 하니까 애를 데리고 오면서도 아버지 마음속에 99%의 의심이 꽉 들어찼습니다. 뼛속까지 암이 걸린 자식 병원에서 일반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미루고 대학병원은 암전문병원으로 미루고 이것 어떻게 사느냐 말이에요. 그러나 1%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기도를 받는데 어린 아이가 기도를 받고 어떻냐고 하니까 기도를 받으니까 쩌릿쩌릿 하더라고... 그래서 암병원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니까 암이 온데간데 없어요. 비이성적인 것 아닙니까? 비합리적인 것 아닙니까? 이것은 인간적인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안믿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미쳤다고 할 것 아닙니까? 이 믿음은 이런 세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창조적인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창조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가진 여러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사용하면 얼마나 많은 태산을 옮기고 승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인 무화과나무로 짜서 입혀서 자꾸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과는 너무나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선물로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서 여러분은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자녀가 되고 성령 모시고 하나님의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안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별이 뭔지 압니까? 안믿는 사람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믿음이지만 창조적인 믿음은 없습니다.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창조적인 믿음이 있으므로 오늘 이 시간에 이 교회를 떠나기 전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나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 그냥 왔다갔다 하면 종교적인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기적이 생기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주님을 통해서 많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