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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 종려․성찬주일설교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장 31~32) <서론>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나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를 이해주시는 분은 나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아는 사람입니다. 현재 상태 나만 보고 나를 평론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도 알아주고 현재도 알아줘야 아~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우리가 짐을 서로 나누어 걸머질 수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짐을 짊어질 수가 있나요? 서로 이해하기 때문에 짐을 걸머지고 동정을 하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용서가 없는 경쟁 상태로서의 이웃과 같이 살면은 밤낮으로 정죄와 몰이해와 미움과 심판이 따름입니다. 이해하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이웃을 판단하면 못된것만 보이고 안되는 것만 보이고 잘못하는 것만 보이기 때문에 평론하고 비평하고 정죄하고 심판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게리 체프먼은「사랑의 부부코칭~대화의 기술」에서“진지하게 듣는 것이란 다른 사람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를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할 때는 내 편의 이야기만 자꾸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자세히 귀를 귀울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바탕에서 대화를 해야 진실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노부부가 40년 동안 해로하다가 정 의견일치가 안되고 서로 이해가 안되어서 이혼하기로 작정을 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서 이혼서류에 서명을 했어요. 그래서 그 남편이 아내보고 하는 말이 “40년 우리 살다가 헤어지는 마당에 점심이나 한번 같이 먹고 헤어지자.” 그래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닭 삶은 것을 주문해서 닭고기를 먹도록 했는데요. 남편은 아주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한번 선심 쓰겠다고 닭 날개를 찢어가지고서 부인에게 주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놀래가지고서 아이구 나에게 닭 날개 찢어준다고... 40년 동안 살았으면서 내가 닭다리 좋아하는 것 아직까지 모르느냐구... 그러니까 그 남편이 나는 닭날개를 참 좋아하고 맛있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닭날개를 찢어주었는데 저렇게 화를 내니까 당신같은 사람하고 살지 못하겠다. 마지막에 서로 고맙다고 말한마디만 했으면 도로 회복될 수 있잖아요. 40년 동안 살았으니까 서로 통하기만 하면 도로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날개와 닭다리 때문에 이해가 안되고 불통으로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해라는 것은 남의 사정에 귀를 기울여 이해해야지 내 중심으로 서서 심판하고 판단하면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담 전문가인 오제은 교수는, “당신 마음을 압니다!” 이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 사람들은 외로워하고, 과거에 지배받고 고통에 몸을 떤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신 마음을 압니다.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은 결국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 마음을 내가 이해합니다. 시어머니가 어떻고 시집살이가 어떻고 사람 힘으로 고칠 수 없잖아요. 듣는 사람이 참 용합니다. 잘 참았습니다. 당신 마음 참 이해합니다.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그렇게 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신세한탄을 하면 듣는 사람이 뭐 신세 한탄을 하고 있어? 용감하게 살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그렇게 하면 본전도 못찾고 더 마음에 상처만 입습니다. 그런말 하면 내가 알아요. 이해해요. 참 용합니다. 기왕 참은 김에 더 참아 보시지요. 그러면 자기를 이해해주기 때문에 용기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말 한마디로 우리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 성급한 판단이나 틀에 박힌 충고를 하기에 앞서 사랑의 마음을 품고 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마음을 나누고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우리가 항상 겪는 이웃 관계 첫째로, 우리가 항상 겪는 이웃 관계를 한번 알아보십시다. 성경에는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비판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우리 대화의 거의 80% 이상은 비판하는 말 합니다. 어느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그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부터 먼저 합니다. 어느 사람에 대해서 말해도 비판하는 말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비판하기 때문에 상대방도 으레 우리에게 비판을 하고 갈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로 5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만일 제가 이 말했다면 당장 또 비평받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 말씀이에요. 여러분 비평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절대적인 선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것을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로 38절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꾸 잘못했다고 결점만 보고 정죄를 하면 그 사람이 돌아서서 칭찬할 턱이 있습니까? 같이 결점을 찾고 정죄합니다. 이 세상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서로 할퀴고 찢고 물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메아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얼마나 장엄한 말씀인 것입니까. 이게 아주 한사람에게 운명을 걸어놓은 사건입니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 말씀 가르칠 때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꿇어 앉혀 놓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선생님,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고 했더라면 예수님이야말로 이단이다.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는 이단이 아니고 뭐냐. 우리 선생이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신 만만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둘러보고 난 다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치지 말라고 말 안했습니다. 율법대로 하라. 그러나 너를 먼저 살펴보고 난 다음에 율법대로 시행하라. 네가 죄없으면 그 여자를 돌로 쳐라. 그리고 예수님이 허리를 숙여서 손가락으로 글을 씁니다. 그 사람들의 몰래 감추인 죄악을 다 들춰 내놓습니다. 어깨 너머로 예수님 손가락이 쓴 글을 읽은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돌멩이를 떨어뜨려 놓고 다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휘둥그레진 눈을 가지고 살펴보니 아무도 없거든.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을 우리가 늘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정죄하려고 할 때 먼저 이 사람을 정죄할 만큼 깨끗하냐. 내가 죄가 없으면 정죄할 수 있다. 내가 죄가 있으면 어떻게 이 사람을 정죄하겠는가. 내가 그 사람을 정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정죄하지 아니하면 정죄받지 않는다는 주의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만 자꾸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늘 노래삼아 그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미워했습니다. 거짓말 했습니다. 도둑질했습니다. 방탕했습니다. 온갖 죄를 다 고백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았다고 털털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내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기 전에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내가 심판하고 내가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먼저 놓아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용서하고 허물을 사함받고 하나님과 막힌 담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기도하라. 용서해 주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기도해봤자 하나님께서 응답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그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그처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는 비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평과 정죄는 화평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다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우리가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귀신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흠을 잡고 비평하면 아~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나는 정의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바로 너는 속았다. 귀신의 짓을 너가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의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나 여러분 실제로는 귀신에게 속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요사이 정의가 무엇이냐는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 사람들마다 정의가 자기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편에 서서 자기들의 생각이 정의롭다고 합니다. 노동자는 노동자 편에 서서 자기가 정의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선 입장에서 우리가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안믿는 사람은 자기들이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선 것이 우리는 정의라고 확신하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를 걸머지지 않은 정의는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없는 정의가 무슨 정의가 되는 것입니까? 내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저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면서 정의를 실천할 때 그게 진짜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정의는 폭력입니다. 자기 정의를 시행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나오는 것은 폭력이지요. 그러므로 정의가 설려면 십자가를 걸머지고 정의를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정의가 항상 올바른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정의를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통을 감당하면서 정의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한 시기와 다툼을 하면서 자랑합니다. 자~ 내가 정의를 실천한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것은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정의가 아니라 귀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향나무와 같은 의인이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루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판화로 완성하여 작품마다 특이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중에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신을 치는 도끼에 향을 바른다”는 제목을 붙인 작품이 있습니다. 백향목은 수목의 왕으로써 장엄한 수목으로 보기에도 감탄스럽지만 향이 많은 나무입니다. 새벽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속담이 있는 나무인데 도끼로써 그 나무를 찍으면 도끼날에 향이 묻어서 아주 도끼날조차 향기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심판하려는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 심판하는 사람의 칼날같은 입술의 향을 묻혀서 보내는 뜻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손양원 목사 보십시오. 손양원 목사의 생활이 향기가 나되 보통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고등학교 학생인 자기 아들을 쏴 죽인 아들의 살인자 두 사람을 자기가 받아들여서 친자식으로 삼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총으로 쏴죽인 두 사람을 자식으로 양자로 받아들여서 훌륭하게 길러냈습니다. 쉽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생각했었습니다. 나는 그분 만나본 적도 없고 그분 설교를 직접 들은 적도 없지만 그 분 이름에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지 않고는 내 자식을 죽은 원수를 자식으로 입적해서 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찍는 도끼날에 향을 발라주는 삶을 사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은 정말 도끼날에 향을 발라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손에서 박해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도 저들을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비평과 정죄는 화평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다툼을 가져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을 뿐 아니라 사랑의 향기로 자신을 치는 상대방에게 사랑의 향기를 더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을 베풀면 그 행동에 향기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2.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 둘째로, 죄인 클럽인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비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데 왜 교회에 죄인들이 저렇게 많으냐. 잘못된 교회다.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이해인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집단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교회에 예수님이 와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희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왜 계시느냐. 죄인이 있기 때문에 와 계신다고 말합니다. 의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의인이면 예수님 필요합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또 잘못된 판단은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 보면 교회에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이 가득한 사람이 많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한 자들이 모이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교회 교인들 두세사람 모이면 수군수군.. 아무 목사가 이렇더라. 아무 장로가 그렇더라. 아무 권사, 집사... 그저 모이면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무슨 교회가 이런 교회냐. 바로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왜냐,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허물 많고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허물을 벗겨주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고 변화시키러 주님이 오시는데 변화받지 못한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아예 빨래 다해서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 가운데 빨래꾼이 가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빨래꾼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추하고 냄새나는 것 다 빨아주고 씻어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씻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인데 저렇게 사랑이 없는 냉정한 교회가 있을 수 있느냐.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곳이 교회지 현재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교회오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을 하도록 강요를 받고 변화를 받게 되지요. 그러나 교회는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의 불꽃 가운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교회를 잘못 본 것입니다. 어느 수도사가 죄를 지어, 그를 심판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의논 끝에 그들의 스승인 모세 압바에게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청하기로 했습니다. 모세 압바는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심판하는 자리에 스승이 와서 참석하기를 아무리 요청해도 거부를 해요.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계속 사람을 보내어 간곡히 청하자 모세 압바는 할 수 없이 참석하겠다고 말했는데 참석하는데 보니까 큰 마대기포에 구멍을 뚫고 모래를 잔뜩 채워서 어깨에 걸머지고 오는데 모래가 줄줄줄 흐르거든요. 선생님, 오늘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에 모셨는데 모래주머니를 걸머지고 모래를 줄줄 흘리면서 오면 어떻게 합니까? 어? 내가 모래주머니 걸머졌나? 돌아보세요. 모래가 줄줄줄 흐르잖아요. 아 그래? 나는 평소에 죄짐을 걸머지고 사는 인생이라 죄가 줄줄 흐르면서도 있는지도 몰랐네. 그러면 내가 여기와서 죄를 심판할 자리가 아니구나. 나는 죄가 없는 줄 알고 왔는데 내가 죄가 있으니까 내가 심판 못하겠으니 너희들이 하라고 돌아서는 바람에 거기있던 사람이 다 크게 충격을 느꼈습니다. 자기 죄를 등 뒤에 지고 줄줄 흘리고 다니면서 자기 죄는 안보고 남의 죄만 보거든. 자기 죄를 보려고 돌아보면 안보이고... 자기 죄는 다 등 뒤로 던져 놓습니다. 앞에 안둡니다. 그러니 자기 죄는 안보이고 남의 죄는 다 보이거든. 이것봐라. 저것봐라. 우리는 남을 비평하기 전에 자기를 호되게 비평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 압바가 하는 말은 내 죄가 모래처럼 많아서 내 뒤로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나는 그 죄들을 보지 못하고 오늘 그것을 걸머진 채 다른 사람을 심판하러 왔으니 내 스스로가 잘못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스승의 말에 크게 뉘우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더 이상 문책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의인의 모임이고,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사랑의 공동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와 허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 자라지도, 살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불구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영적불구자, 정신적인 불구자, 육체적으로 병든 자, 생활의 불구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인이 쓸데없는데 병원에 뭐하러 와요. 병원에 가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일입니다. 정말로 서울대학병원을 위시해서 여러 가지 병원이 많은데 병원에 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왜, 병든 자가 그렇게 많기 때문에 교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 보십시오. 병 안든 사람 그곳에 와서 서성거리지 않습니다. 보호자는 따라왔을지 몰라도... 다 병든 자가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이 와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적으로 병든 자들이 와 있는 곳입니다. 왜,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이 교회 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지요. 율법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주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고 행복하려고 오는 곳이 교회고 자기 힘으로 희망이 없는 절망이고 소망이 없는 자가 교회와서 희망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교회는 누가 오는 것이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오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으면 교회 올 필요 없어요. 왜, 교회는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다 내게로 와서 내게 짐 내려 놓으라. 짐 맡기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데 교회 왜 찾아와요? 이사야 55장 1절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목마른 자, 돈 없는 자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로 29절 여러분 자세히 한번 들어보세요. 교회 어떤 사람이 있는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이 성경에 보는 대로 교회는 누가 모이는 곳입니까? 지혜 없는 자, 능하지 못한 자, 문벌이 좋지 않은 자,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없는 자들 이런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여러분 빛나고 아름다울 수 없지요. 왜 오느냐.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변화시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항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다시 세상으로 내어 보내시고 또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고 또 변화시켜서 또 내보내는 교회는 치료받아 건강하게 만들어서 내보내는 처소인 것입니다. 인간을 뜯고 고치고 변화시키는 처소가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처한 자가 교회 와서 빛을 찾고 심신에 병든 자가 교회 와서 치료를 얻는 곳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도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 성령이 운행한다고 했습니다. 꽉 들어차고 질서 정연하고 모든 것이 알찬 곳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 운행하신다. 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여러분, 나는 마음이 공허하고 나는 혼돈하고 마음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너무 답답합니다. 우리 집도 우리 생활도 엉망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모셔 들이십시오.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이 오셔서 기꺼이 창세기적 역사를 베풀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도 모자란 사람들 가운데 와 계신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곳에 복음을 전하려고 오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게 하려고 오시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시고 율법의 노예 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오신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가운데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문제가 있어 죄와 저주, 절망과 죽음에 포로된 자에게 와 계시고 앞 못보는 사람 가운데 예수님이 와 계시고 짓눌려서 스트레스에 걸려서 좌절과 절망에 걸린 사람에게 예수님이 와 계시고 율법의 노예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나 자유를 주기 위해서 해방을 주기 위해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로 10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이 유일하게 우리가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처소로 들어가는 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으로 인도해 주겠다고 말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문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그 이름을 부르면 여러분은 생명의 처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께 생명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와 나 셋째로, 십자가와 나의 관계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나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번 주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걸머진 주간인 것입니다. 십자가와 내가 어떤 관계가 있느냐. 나는 죄로 항상 더러워지고 항상 어두움의 종이 되고 삽니다. 이 세상에 전부 죄없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교회 들어와서 예배드릴 때는 참 거룩하고 깨끗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세상에서 다시 죄를 짓게 되고 욕을 하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고 세상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항상 더러워지고 항상 어둠의 종이 되는데 예수 믿는 자와 안믿는 자가 뭐가 다르냐. 항상 예수 믿는 자는 씻음을 받고 변화를 받는 근원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씻겨주시는 십자가 보혈, 나를 밝히시는 십자가. 평생에 내가 늘 안고 의지하고 있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믿는 자와 안믿는 자가 다른 것입니다. 안믿는 자는 죄악 가운데 빠져서 허덕이며 헤어나올 도리가 없어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죄악 속에서 헤어나올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또 회개하고 또 변화를 받고 또 회개하고 또 변화받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날이 변화를 받고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항상 내가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될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러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도 일평생 죄를 다 청산했습니다. 더러움도 다 씻었습니다. 질병도 다 청산했습니다. 저주도 다 청산하고 사망과 음부도 다 청산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이제 나는 너희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 주셨는데 이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죽은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끌어안고 있으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항상 우리에게 용서가 다가오고 거룩함이 다가오고 치료가 다가오고 축복이 다가오고 영생복락이 다가오기 때문에 십자가는 항상 내가 끼고사는 필요 불가결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매일같이 조금씩 조금씩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자고 나니까 완전히 새것이 되었다. 거짓말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별볼일없이 저나 나나...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가슴속에 십자가가 있어서 변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이 운행하시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안보이는 것 같지만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율법을 자랑할 수 없고 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 까지 복종해서 여러분을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여러분 옛사람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참고 내려오기를 원한 것입니다. 너무 고통을 주므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더 이상 못참겠습니다. 내려와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대속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영원히 마귀의 종으로 남아있고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귀는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 우리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의 종의 멍에도 허물도 질병도 저주도 절망도 죽음도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멍에는 여러분 꺾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옛사람이 못박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 새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나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만이 나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주님께서 진실로 나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처소가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벗어나면 율법에 서서는 이해도 동정도 용서도 사랑도 없는 준엄한 심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병든 그대로 주님이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병자보고 병고침 받고 난 다음 교회 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보고 죄 다 청산하고 깨끗하게 되어서 교회 오너라. 허물 많은 사람보고 허물 다 벗어버리고 담배 다 끊고 술도 끊고 세속 다 벗어 버리고 깨끗하게 되어서 오너라. 그렇게 하면 교회 올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죄있는 그대로 병든 그대로 허물진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교회로 오라. 다 예수께로 오라. 십자가에서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았다. 나를 모셔 들이면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합법적으로 너를 변화시켜 주마. 이제는 합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갚았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들어와서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9장 15절처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젖먹는 자식을 어머니가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어머니가 젖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얼마나 강렬한 대화의 말씀이십니까? 시편 27편 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야훼는 나를 영접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십자가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십자가를 통한 선물을 받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로 2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이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우리 찬송 한 장 불러 보십시다. 하나님의 은혜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 갈 길 다가도록 /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한량없는 은혜 / 갚을 길 없는 은혜 /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 은혜없이 우리가 살 수 없잖아요. 죄를 지어도 하나님 은혜가 나를 구원해 주시고 약할 때도 하나님 은혜가 나를 붙들어 세워 주시고 의롭게 살 때 축복을 받게 하는 것도 하나님 은혜가 해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은혜가 넘쳐나고 그리스도밖에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이 없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만이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이 넘쳐나고 그 은혜 속에 우리가 한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변화되는 곳은 바로 그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생명이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나에 대한 주님의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이 성령으로 부은바 되어 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과 능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 밑에 나가서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용서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로 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인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변화를 받아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결론> 십자가 없는 영광은 또 다른 멍에입니다. 아무리 종교가 좋아도 십자가 없는 종교는 또 멍에입니다. 사랑이 좋아도 십자가 없는 사랑은 또다른 멍에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도 십자가 없는 위대하고 훌륭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밑에 나와 새 생명, 새 희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