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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3. 성찬주일설교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서론>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이것을 제목으로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무엇이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일까요? 오래 예수를 믿는 사람도 내가 예수 잘 믿느냐 못 믿느냐 생각해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자신만 내가 신앙인인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타인, 나와 함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신앙인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율법과 의식을 가졌어도 훌륭한 신앙인이 아닌 사람 참 많습니다. 열심히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교회 출석하고, 십일조도 내고 하면서도 실상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신앙인이 아닌 낙제생으로 볼 때가 많습니다. <본론> 1. 거짓된 신앙 무엇이 거짓된 신앙일까요? 사랑이 없는 신앙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믿어도 거짓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탁월하게 말을 잘하고 외국어를 여러나라 말을 유창히 해도 천사처럼 설득력이 있어 그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다 수긍하는 것이 될지라도 그 생활 속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인정 안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천사처럼 설득력 있게 말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꽹과리 소리밖에 안된다니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포스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신념의 소유자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고 실제로 지식이 탁월한 사람도 그 생활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지식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구제와 헌신이 눈부셔도 사랑이 아닌 다른 동기로 하면 유익이 없다. 진짜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지지를 받기 위해서 구제를 하고 헌신이 눈부시도록 나타내도 하나님은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해도 실제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절대로 좋은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는 무용지물입니다. 쓸데없습니다. 우리 한국에 5만교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소용없는 모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사랑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근거가 십자가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십자가에서 출발한 이유는 의식과 제도와 종교가 아닌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첫째로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당신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바로 외아들을 주신 사랑 그것 아닙니까? 다른 무슨 사랑보다도 자기의 금지옥엽으로 데리고 있는 외아들을 준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 것입니까?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냐. 독생자를 우리에게 제물로 내놓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는 우리를 심판하거나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너무나 더러워서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33년 거하시면서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청산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알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우리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받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 보여 주시고 예수님은 그 뜻을 받들어서 수치와 곤욕을 다 참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 결코 부인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보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데 있습니다. 옛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역하고 저주로운 생활을 한 것인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했으므로 옛사람을 버리는데 있습니다. 죄와 허물과 마귀의 종 된 옛사람, 불순종, 불신앙, 탐욕과 세상의 종이 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믿음과 순종, 온유와 겸손과 의와 거룩한 옷을 입고 새사람이 되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새사람이 되었다는 체험을 해야 되겠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되어야 되겠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이 날 대신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상상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을 꿈꿔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었다. 그것을 상상해 보고 꿈꾸어보고 그렇게 된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그리스도가 날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것을 입술로 시인할 때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내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과 죽음을 끌어안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한가지이다. 그 사실을 상상해보고 꿈꿔보고 그 사실을 마음속에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옛사람이 아니다. 새사람이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죄와 허물을 다 청산하고 병과 저주를 청산하고 죽음과 멸망을 청산해버리고 말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다. 그런 생각과 꿈과 믿음의 말을 고백하면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모시고 우리는 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옛사람이 청산된 것을 상상하고 꿈꿔보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이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여러분과 예수님이 일치가 되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 죽음 내 죽음 아닙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은 행동으로 이것을 이루어 놓았는데 우리는 이제는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고난이 내 것이요, 부활의 영광도 내 것이요, 이것이 연결이 안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여러분과 나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요 자기가 지은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되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여러분의 상상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를 생각하고 꿈꾸고 믿어야 되고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효과를 발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도 사랑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고 성령님의 그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신앙도 없습니다. 사랑이 신앙 속에 제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로 18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가 없는 신앙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십자가가 없는 사랑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라. 열심히 교회 나가라. 십일조 드려라. 헌신하라. 그러나 십자가는 질 필요 없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졌지 네가 질 것이 아니다. 이같이 십자가 없는 신앙을 가지도록 마귀가 우리에게 자꾸 종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에 서고, 탐욕에 서서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있는 말씀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이 꽉 들어와서 세상에서 나는 너보다 낫다는 오만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려고 하고 욕심에 서서 인생을 살면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죽이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제켜 놓고 자기중심으로 신앙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하나님을 이용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 산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하실 것이다. 내가 뭘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길 것이 있느냐.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신앙으로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돼지소굴에서 나온 넉마 같은 인생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마를 찌푸릴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용납해서 씻겨주시고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생수의 우물을 판다고 하는데 아무리 파봤자 그곳에서는 물이 머물지 않습니다. 터져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수고는 결과에는 다 무너집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을 먹음이 허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그냥 잠자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내 힘으로 어떻게 갚을 수가 있습니까? 허물을 어떻게 내 힘으로 벗을 수가 있습니까? 무서운 병에 걸렸는데 내 힘으로 못 낫잖아요. 저주에 빠져서 못살아 이마에 땀을 흘리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죽음을 내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신 짊어지고 탕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허물의 종이 되는 것 원치 않고 병들어 앓는 것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 저주를 받아 세상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가시넝쿨에 뒹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죽어서 지옥 불에 타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이를 대신 청산하게 하셨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이것을 청산하셨습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과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리면 하나님이 너를 책임져 주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므로 믿고 평안을 가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자기를 성찰하지 아니하고 회개가 없고 이웃에 대한 비평과 판단만 있는 것이 십자가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든 일에 내 탓은 없고 전부 네 탓이다. 이것은 남편 탓이다. 이것은 자식 탓이다. 이것은 이웃 탓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 목사님 탓이다. 우리 장로님 탓이다. 전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내 탓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제일 먼저 자기 성찰부터 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잘못했지 않느냐. 내 탓이 아니냐. 내 탓이면 솔직히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50년의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신앙상담을 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앙상담을 할 때 자기 탓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남편 탓으로 아내 탓으로 자식 탓으로 이웃 탓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개가 없고 이웃에 대한 비평과 판단만 있으니 참 기가 막힌 것입니다. 내 탓을 해야 회개를 하거든. 무슨 일에 내 잘못이 있어야 회개하지 나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니까 비평과 평론밖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를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예수님 때문에 그 분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용서하시고 이웃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게 된 사람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내가 깨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하고 깨어진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깨어진 사람은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에서 깨어지신 예수님을 따라서 깨어져서 나가야 참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교회 왔다갔다 해도 율법적인 신앙과 참된 신앙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율법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람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율법을 우상화하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인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이 너무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도 율법이 귀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아서 그런 것입니다. 4. 율법이냐 사랑의 실천이냐? 우리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가지고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마귀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보존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시행하는 사람이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제사장에게는 율법만 지키면 되었지 사람이야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레위인 한 사람이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다가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보고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도와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물두멍에 물을 채우고 성전을 소재하고 하는 의식을 집행하는 이 레위사람 고개를 흔들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의식이 중요하지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든 율법은 하나님이 계셔야 율법이 되지요. 의식도 그렇습니다. 율법을 하나님 없이 손에 들면 전쟁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살상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율법도 가지지 않고 종교의식도 가지지 않지만 그 말을 타고 오다가 보니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지라 말에서 내려서 그를 끌어안고 자기 옷을 찢어서 붕대를 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먹이고 그를 말에 싣고 주막에 가서 주막집 주인에게 은전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내가 올 때까지 잘 봐주세요. 더 비용이 들면 내가 갚아 주겠다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사랑을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사랑을 베푼 이 사마리아인과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고 누가 더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사람입니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교는 있고 하나님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볼 때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단히 열중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차별이 없이 지키고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이 한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왔습니다.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지고 발로 차고 모두 다 침을 퉤퉤 뱉고 있는데 보니까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 모세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사람은 돌로써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불공평합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하다가 잡혔다고 했는데 왜 남자는 안 데려오고 여자만 데려옵니까? 잡혔으면 둘이 다 데리고 와야지 혼자서 어떻게 간음합니까? 그런 벌써 편견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보내고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가져왔으니 예수님이 별 볼일 없이 이제는 코너에 몰렸습니다. 성경에 율법을 무시고 선생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선생이 아니라고 치부하려고 왔습니다. 그때 이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주여, 이 사람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율법으로 말하면 반드시 죽어야지요.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당신이 무슨 하나님의 종이냐고 달라 들 것이고 또 돌을 쳐서 죽이라고 하면 사랑이라 하는 당신이 사랑을 반역했으니 어떻게 구주가 될 수 있느냐고 할 것이고 이래도 저래도 꼼짝 못하게 예수님이 올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 사람 두 사람 얼굴을 쳐다보시고 난 다음에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씁니다. 무슨 글을 썼다는 것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사람들의 윗사람부터 적은 사람까지 인생에 지은 가장 험난한 죄악을 적어 나갑니다. 예수님 어깨너머로 보니까 자기들이 지은 죄를 하나 둘 다 적어 나가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이 여자에게 돌로써 쳤다가는 그 다음 예수님 돌에 맞아 죽겠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꾸 글을 써내려가니까 아이구 나는 지금 소에게 물을 줘야 되겠는데 바빠서 가야 되겠다. 나는 아침에 조찬 기도회가 있는데 빨리 가야 되겠다. 나는 사람 만날 일이 있으니 빨리 가야 되겠다. 다 돌멩이를 놓고서 달아나버렸습니다. 한참 만에 예수님이 허리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어요. 돌만 천지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고개를 들라. 널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살펴보고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니 집에 가서 다시 죄짓지 말아라.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나 예수님은 살리는 일에 치중을 했습니다. 사람이 율법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람 밑에 율법이 있고 사람 위에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지요. 그러나 계명을 하나님보다 사람보다 높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가 율법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칼이라면 군인들은 율법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칼을 가지고 수술해서 사람을 살립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보시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 사람 죽이는 칼로써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밀밭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성경말씀에 안식일에 타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식일 밀밭 사이로 오는데 배가 고프니까 밀 머리를 꺾어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교인이 보고 선생님이여 어떻게 안식일에 타작을 합니까? 밀을 먹은 것도 타작입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까? 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어떻게 타작을 합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정말로 깜짝 놀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지 사람을 평판하고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모든 것을 해석해야지 사람을 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안식일 날 성전에 보니 병든 자가 있는지라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쳤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안식일이 거룩한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안식일 날 병 고치느냐. 그러니 예수님이 이 답답한 사람아, 안식일 날 저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쳐준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주님은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우주 만물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지 사람이 우주 만물을 받들기 위해서 있다고 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랑으로써 해석해야 율법이 되지 율법을 사랑 아니고 율법 그 자체로 해석하면 무서운 살인검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그러므로 제사장, 레위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 등은 예수님 시대 다 열심 있는 율법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내용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율법을 우상으로 만든 사람인 것입니다. 율법은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제켜 놓고 율법을 우상으로 삼아서 율법으로써 사람을 판단하고 평론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있지 죽이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시키기 위해서 준 하나님의 등불인 것입니다. 율법을 보고서 비로소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하므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지 회개하면 그 율법은 살리는 검이 되며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 예수께 나와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키웠는데 둘째가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상속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상속을 아버지께로부터 탈취하여 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한 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렇게 하자.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소서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더기를 입고 전신이 병든 상태로써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소문을 들으니 둘째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빨리 뛰어나가서 아버지가 뛰어 나가서 그 목을 얼싸 안았습니다. 왜 아버지가 뛰어나갔냐면은 옛날에 유대인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를 비난하는 자를 돌려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동리로 돌아오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간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그를 끌어있지 아니하면 동네사람들이 돌로써 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리 사람들이 보기 전에 미리가서 아들을 끌어안으려고 가서 목을 끌어안고 울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라. 아들 된 증거로... 그 다음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잔치를 베푸는데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내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은데 형이 들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데아버지가 저를 환영했으니 나는 이런 집에 안 들어가겠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율법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므로 끌어안았는데 형은 율법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동생보다 높습니다.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 나는 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창기와 더불어 아버지 가산을 다 탕진한 이 녀석을 왜 받아들입니까? 나는 이 아들이 죄짓고 추악한 놈이요 율법대로 심판을 받기를 원하지 나는 집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 보고 얘, 얘는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아났지 않느냐. 내가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너는 늘 나와 같이 있었으므로 이 집안 재산이 다 네 것 아니냐. 그로써 만족하고 들어오너라. 들어와서 동생하고 같이 화목하자. 안 들어갑니다. 나는 이런 놈의 집안에 안 들어갑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안 들어갔습니다. 잔치에도 참여 안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사는 우리들도 이 교회에 나오는 율법주의자들이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하던 놈이 다 교회 나와 있으니 이런 교회에 나는 안 온다. 나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으니 나 같은 사람 있는데만 가겠다. 그러면 그 사람 어디 갑니까? 지옥밖에 갈 데가 없습니다. 천당에는 죄인들이 올라가는 곳이지 의인이 올라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천당에 의인이 올라가는 줄 압니까? 천당에 가면 의인 없어요. 모두 죄인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 받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받은 사람이 올라가지 하나님 없이 의롭게 되어서 당당한 사람 천당에 못 올라갑니다. 한 사람 하나님 성전에 바리새교인과 세리가 왔는데 바리새교인은 하나님, 나는 저 뒤에 있는 세리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같이 죄를 안 짓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훌륭하지요? 그런데 세리는 뒤에서 나는 세금쟁이로 다른 사람의 세금을 늑탈하고 죄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죽일 놈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둘이가 그렇게 기도하고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누가 더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느냐? 보통 사람들은 다 앞에 바리새교인이 더 의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금식하고 착한 삶을 살았으니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야. 자기가 죄인 아니라는 사람은 내게 상관이 없고 저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는 죄덩어리인 세리가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어진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한 대로 사마리아인이 율법도 없고 의식도 없어도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준 그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내동댕이 치고 간 그 사람은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되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그 가운데 모시고 지켜야 올바른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1963년 인종차별 철폐 시위 행진이 경찰견과 소화 호스에 맞닥뜨렸을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집안에 폭탄을 던지시오.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오.” 흑인 인권운동자로서 워싱턴 네거리를 대모하는데 경찰관들이 와서 호스에 물을 뿌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하니까 “우리 집안에 폭탄을 던지시오. 그래도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오.” 특히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나오면서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그래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면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써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이웃의 잘못을 사랑으로 도와줘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데 힘을 다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를 율법으로 판단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죄가 드러나게 해서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 회개하고 보혈을 믿게끔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선생으로서 우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지 우리를 죽이는데 사용해서는 안 되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우리도 우리보다 못난 사람을 비평하고 판단하지 말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율법을 통해서 볼 때 다 죄인 되고 멸망 받아야 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걸머진 그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으로써 우리는 화목하고 사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