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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28. 주일설교 근원적인 목마름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서론>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근원적인 목마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근원적인 목마름 즉, 고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독의 문제는 화려한 인기 있는 삶을 산 사람일수록 깊이 느끼는 허무감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 놓으셨을 때는 고독감 없이 살려고 지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사랑은 혼자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 놓으시고 함께 대화하며 사랑 속에서 행복을 누리려고 하셨습니다. <본론> 1. 아담의 범죄로 다가온 인간의 고독 그러므로 원래 아담과 하와는 고독이 그 인생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귀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짓지 아니한 고독이 저들의 영혼 속에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에서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서로 교제할 때 생명수가 하나님께서 흘러나와 그들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 마음이 얼마나 밝고 맑고 환해지며 즐거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하고 만나 보십시오. 마음에 즐거움도 행복도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이 끊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즐거움, 행복감 등에 목마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면 감춰 놓았던 마음의 실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 소망, 사랑, 평강, 희락, 즐거움, 행복감 등 이러한 것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 그런 것을 찾아 소유할 수가 없다는 절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땅에 살아야 될 아담과 하와가 가는 곳마다 땅이 그들을 반발합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옵니다.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사랑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고독한 곳에 원수들이 그들을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땅에서 화평을 누릴 수가 없어요. 땅이 아담과 하와와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문제는 둘이가 함께 잘살아야 되는데 부부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섬기려고 하니까 그것이 힘들거든요. 이상이 꽉 막고 참으로 같이 있어도 좋은 남편을 섬기는 것은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괴씸하고 쥐어박고 싶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섬기고 살려니까 별로 마음에 재미가 없어요.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여러분 남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강아지도 다스리려면 달려드는데 아내를 보고 잔소리를 자꾸 하면 아내가 고분고분 받아들이나요? 며칠 전 텔레비 인터뷰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남편들에게 아내하고 절대로 다투지 말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아는 경우에 있어서 아내와 말 다퉈 이기는 남자가 한 번도 못 찾아봤다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말을 할 줄 몰라요. 다투어 가지고서는 그 말의 천재인 아내에게 어떻게 이깁니까? 제비같이 재잘거리는데... 완전 집니다. 그러니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어 부부간의 갈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담도 하나님께 꾸짖음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책임을 아내에게 다 짊어졌습니다. 내가 다 했습니다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었을 때 아담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있으라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이중변명을 했습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이유는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아내를 안 만들어 줬으면 괜찮았을것인데 언제 내가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내를 만들어서 내게 준 하나님이 책임이 있고 또 그 아내가 나를 꾀기 때문에 그 꾀임에 내가 안 넘어갈 수 있습니까?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그러니 변명을 하되 자기가 짐을 짊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다 짊어졌으니까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참으로 여자는 어린 아기를 잉태하고 아기를 낳고 아기를 키우는 너무나 어렵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홉 자녀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우리 어머니에게 말씀은 안 드렸지만 내내 동생을 낳을 때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어머니가 죽을까 싶어서 걱정이 끊이지 않았었어요. 그리고 또 어머니가 꼭 말하기를 내가 너의 동생을 낳을 때 죽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죽더라도 동생들 잘 돌보고 사랑해 주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하시니까 내가 그 다음 어머니가 어린 아기만 가지면 아버지가 밉더라구요. 아기 그만 낳고 살면 좋겠는데 왜 죽음의 위험을 무릎서고라도 아기를 낳으려고 하느냐. 그것이 바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느낄 수 있는 슬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부부간에 서로 정신적으로도 갈등이 있고 대화가 되지 아니하고 서로 잘했다 못했다 아웅다웅하고 싸우게 되어 있어서 가정에 평화가 없고 외로움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살면서도 서로 말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그 뿐 아니라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가 있어 결국 살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죄 때문에 그냥은 못나오고 죄 때문에 제사를 지내야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대화가 잠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저들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서 재물을 드려야 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는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상징적으로 양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야 되는데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가인은 자기가 손써 농사지은 농작물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아요. 율법과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서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이 안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벨은 어린 양을 잡아서 태워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리니까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 향유를 맡으시고 기쁘게 받아 드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벨에게는 복을 주시고 가인에게는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심사가 고약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얼굴이 요사이 그 모양이냐? 얼굴이 좀 밝고 맑고 환하지 왜 그러냐? 그러니까 가인이 하는 말이 왜 내 동생에게 축복을 주시고 재물을 받으시고 내 재물은 안 받습니까? 네가 올바르게 했으면 왜 내가 재물을 안 받겠느냐? 네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서 내게 제사를 드렸었으면 내가 받았을 것인데 네 손으로 만든 농작물로써 내게 재물을 드리고 내가 안 받아들였지 않느냐.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직선적인 일을 많이 합니다. 영국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좀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안 해요. 예를 들면 우리 한국 사람은 동료를 만나면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가? 감기 걸렸는가 보다.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영국 사람은 만나면 너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절대 그 말 안 해요. 무슨 말을 하느냐. 요새 일이 많으니까 모두들 다 피곤해. 너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일할 때 쉬어가면서 쉬엄쉬엄 해야지 너무 일하면서 안 돼. 꼭 빙 둘러 가면서 말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너 얼굴이 왜 그래? 영 보기가 흉한데... 저도 우리 성도들 만나면 제일 겁이 나는 것이 가까운 사람이 만나면 만나자마자 요사이 피곤한가봐요. 오늘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어째요? 그러면 내 마음속에 진짜 건강이 안 좋은가보다. 사람들 보기에 이렇게 나쁘게 보이니 진짜 나빠질까보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러나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만나자마자 야~ 요사이 얼굴에 광채가 나는데요. 참 보기 좋습니다. 건강하게 보이는데요. 그러면 내 마음속으로 건강해지는가보다 젊어지는가보다. 기분이 좋다구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네 얼굴이 왜 그러느냐? 왜 화를 내고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난 다음 화가 나니까 들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동생하고 입씨름을 하다가 돌을 들어서 동생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형제간에 미워하면 원수보다 더 무섭습니다. 동생을 쳐 죽인 일이 처음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사랑이 있고 이해와 동정이 있어야 되겠는데 질투가 있고 살인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기르려거든 꼭 내 말 기억하십시오. 부자가 되지 마십시오. 재산을 갖지 않으면 자식들이 안 싸웁니다. 집이라도 한 두 채 가지고 있으면 누가 더 많이 가지는가 반드시 싸웁니다.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이 자식을 길렀는데 자식 둘이 밤낮으로 싸워서 소문이 났어요. 어릴 때부터 싸웠는데 왜냐하면 과자를 사오면 과자를 나눠주는데 형에게 하나를 더 주면 자식이 자기 동생에게 자랑을 해서 동생이 형하고 싸우게 되고 반드시 공평하게 나눠야 되는데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 탐욕이 있고 서로 더 잘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꼭 따라오는 것입니다.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6~8)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원수가 되어 있지요. 부부간에도 서로 논쟁을 하고 아웅다웅 하지요. 자식을 낳아 놓으니 형과 아우가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지요. 가인과 아벨이 이와 같은 슬픔을 가져왔으니 집안이 콩가루 집안인 것입니다. 평안할 곳이 없어요. 그러니 그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후손들이 정말로 평화를 가지고 사랑을 하고 이해와 동정을 가지고 고독을 뛰어넘어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대인관계는 좋습니까? 대인관계도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웃과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하면 좋겠는데 이웃과 관계 속에서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인관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쉽게 볼 수 있어요. 국회 가십시오 국회! 모였다하면 싸웁니다. 한번은 어부가 게를 잡아서 자기 바구니에 잡는데요. 배에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는데 뚜껑을 안 닫습니다. 그냥 잡아서 넣고 잡아서 넣고 하는데 국회의원 두 사람이 산책을 하다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국회의원인 것을 말 안하고 어부를 보고 여보세요. 게를 잡아서 뚜껑이 없는 통에다 넣으면 기어나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분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국회에 가 보십시오. 국회의원들이 누구든지 좀 잘나가는 사람 귀를 잡아서 당기잖아요. 게는 뚜껑이 필요없어요. 잡아 넣어 놓으면 기어 올라오는 사람 밑에서 잡아 당겨가지고서 게는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꼭 국회와 한가지입니다. 그 말을 하고서 국회의원 두 사람이 걸어오면서 입에서 쓰디쓴 침이 나오더라는 간증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서로 끄집어 당기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평안이 없습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해 아래 사는 사람은 삶이 다 수고롭고 애써 살아가는데 일평생에 근심과 수고만 있지 소득이 뭐냐는 것입니다. 시편 25편 16절로 17절은 더 비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읽어 주십시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참말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생애를 살펴보면 외롭고 괴로운 일이 많고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2. 모두가 느끼는 정신적 감기인 고독 고독은 모두가 느끼는 정신적인 감기입니다. 나는 고독하지 않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감기 안 걸린다. 감기 안 걸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감기는 다 걸립니다. 그런데 감기가 너무 세기 때문에 감기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 면역성이 약해지면 감기가 쉽게 들리는 것입니다. 감기 균이 강한 것이 아니라 면역성이 약해지면 감기가 걸리는 것처럼 고독도 한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속이 비어있으니까 쉽게 고독해지지 주위 사람들이 안 돌봐 주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의식중에 사모하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목이 마른데 무엇에 목이 마른지 알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결국 알고 보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그 목마름인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로 5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결국에 우리가 목마른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을 찾지만 그 속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해답이 아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영혼 속에 하나님을 찾는 갈급한 마음이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마음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 계셔야 만족하지 하나님 없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사람이 하나님 없이 집을 짓고 가정을 이루어도 하나님이 안계시면 행복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야지 하나님 없이 인간 홀로 행하면 고독은 한없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마음속에 한없이 이해와 사랑과 동정을 받고 싶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해를 해주고 사랑해주고 동정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고,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그렇고, 인간 상호 간에서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이것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데 내가 어쩌다가 교회 나오느냐. 하나님이 만세전에 나를 아시고 보시고 예정하사 택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받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 너도 이웃에 대해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너는 하나님이 택해 주시고 거룩하게 만들고 사랑받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으니 너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을 베풀어 주라고 하는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좋은데 이웃에게 그렇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보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가지고 돌보아 줄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자식이나 인간 상호간 사이에서도 반드시 내가 먼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려고 해야지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면 그와 반대로 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절대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악과라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선악 가치평가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 판단에 갈등이 반드시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볼 때 남편 마음에 좋고 나쁘다를 결정해서 평판을 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선악 판단을 합니다. 남편에게 남편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이야기하게 되면 다투게 되지요. 다투게 되면 그것을 잘 정리 못하면 큰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 자신도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원하되 육신으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삶의 처지인 것입니다. 내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갈등입니다. 자기 스스로 갈등을 다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다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음에 선을 행하려고 해도 육체가 악을 행합니다. 마음에 사랑하려고 해도 육체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하고자 하는데 육체는 평안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갈등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속에도 갈등이 있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부부간에도 서로 갈등이 있고 자식 간에도 갈등이 있고 이웃 간에도 갈등이 있고 인간존재는 어느 곳에 가나 갈등이 있고 갈등은 결국 대화가 잘 안되므로 고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치명적인 병인 고독의 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독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을 갖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로 절대로 마음속에 고독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제일 첫째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만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들어질 때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면 죄악이 담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청산해 주신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서 꼭 천당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행복하려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무엇이든지 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자식을 낳고 기르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친구들 사귀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집도 짓고 성도 지키고 예수님이 우리 생활에 가장 근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꼭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생명의 은총의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생명수이신 사랑의 주님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생명수를 통해서 여러분 인생에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공짜로 마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수가 뭡니까? 끝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없이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데 끝없이 한없이 사랑해 줄 수가 있나요? 이 세상에는 대개 부모가 한없이 사랑해준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부모도 자식을 한없이 사랑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상호간 한없이 사랑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자다가 꿈을 잘못 꾸는 것입니다. 한없이 사랑해주는 부부가 없어요. 부모 자식 간에도 한없이 사랑하느냐. 옛날에는 그랬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안 그래요. 그러니 이웃 간에 서로 한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끝없이 주시는 한없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짓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더러운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 대신 죽어 주시는 분이 주님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이 없는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 사랑하사... 설명을 할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줄 정도로 사랑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영생을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작정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과 사마리아로 건너가다가 수가성 우물가에 잠시 쉬는데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대낮에 물동이를 어깨에 매고 물 길러 왔습니다. 물은 아침에 길던지 저녁 해질쯤에 길르지 대낮에 물 길러 안 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대낮에 물 길러 왔느냐. 사람 만나기가 싫었어요. 나는 사람이 싫다. 사람 없을 때 물동이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다 만족을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섯 번째 남편을 발길로 차버리고 여섯 번째 한 사람 또 하나 갖다 놓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여자 상당히 인물이 좋은 것 같습니다. 호박 같으면 어떻게 다섯이나 갈아치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돈도 꽤 있는가 봐요. 남자들이 그 돈 보고 찾아왔으니까. 그러니 인물도 있고 돈도 있고 명망 있으나 이 세상에 자기가 마음에 만족을 느끼고 위로해주고 동정해 주고 사랑해 줄 남자를 찾지 못해서 여섯 번째 남편은 결혼도 안하고 오다 가다 만나서 데리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자의 마음을 다 알기 때문에 물 기르는데 물 좀 주시오 하니까 깜짝 놀라서 쳐다보면서 당신 유대인이요? 유대인들은 우리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취급하는데 어떻게 대낮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자가 물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허허 웃으시면서 물 달라 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줄 당신이 알았으면 도리어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며 그분이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무슨 웃기는 소리합니까? 이 우물은 깊고 두레박도 없는데 당신이 무슨 생수를 내어준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르는 물은 다시 또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그러니까 그러면 그 생수 내게도 좀 주십시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만히 쳐다보시더니만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 그러니까 난 남편 없어요. 예수님이 맞았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발길로 차버리고 지금 여섯째는 오다가다 만나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니 당신 내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오? 우리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야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예배가 여기서 보든 예루살렘에서 보든 상관이 없고 오늘날은 하나님이 특별한 장소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보는 자를 찾는데. 그럼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나서 생수를 얻게 해 주십시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이 여자의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매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아. 예수님이 메시아구나. 그러자 마자 그의 마음속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순식간에 깨닫게 되었어요. 성령이 오시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대낮에 사마리아 시내로 뛰어 내려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함고함을 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 생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에 고독하고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소망이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솟아오르지 않습니까? 미움, 좌절, 절망, 미운 쓴물이 솟아오르고 마음에 평안이 없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면 쓴물이 달아지고 마음속에 의와 평강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물을 항아리에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잔칫상에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물로도 한 시간에 순식간에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맹물은 향기가 나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는 일등 포도주요, 향기가 났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생애에 변화가 다가와서 향기로울 뿐 아니라 취한다 말이에요. 취해. 포도주는 먹으면 취하지요. 많이 먹으면 정신을 잃는데 그래서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라파에 나가면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면 식탁에 꼭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조금씩은 마시는데 저항력이 약한 사람이 마시면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눈알이 팽팽 도는데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알콜이 조금 들어가면 눈앞이 팽팽 돌아요. 그래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주었는데 그것은 상징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포도주로 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 나쁜 사람도 한잔 들어가면 노래 부르면서 거늘거늘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믿음, 소망, 의, 평강, 희락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 목사들이 제게 와서 설교를 얼마하지 아니하면 교인들이 졸고 또 일어나 나가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졸지 않고 설교를 듣고 설교 중간에 안 나가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언제나 쉽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맹물을 잔치상에 갖다 준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갖다 주고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와 같이 당신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취해야 된다. 좌우간 교회 앉아 있을 동안에는 세상 잊어버리고 세상만사 잊어버리고 입 딱 벌리고 말씀을 즐겨야 사람들이 신령한 은혜에 취하게 되고 끝까지 잘 듣고 나가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에 먼저 취해야 된다. 당신이 성령에 취해가지고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면 성령의 역사가 교인들에게 나가서 교인들도 취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저의 설교에 취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슬퍼하고 고통당하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살지 말고 삶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취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안되지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충만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극대치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건져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갈대가 상해있는 것은 손만 대면 꺾어지는데 안 꺾고 바로 세워주려고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촛불에 심지가 다 되어서 꺼질려고 팔락팔락하는데 훅하고 하면 꺼지지 않습니까? 저절로 꺼지게 내버려 놓지... 그 만큼 주님은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은 심판을 베풀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한번은 이른 새벽에 주님께서 성전 뜰에서 가르치시는데 한 여자를 사람들이 끌고 옵니다. 머리채를 휘어감고 신발도 벗어버리고 울면서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서 군중들이 하는 말이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자를 돌로써 쳐 죽이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 말 듣고서 처리하겠습니다. 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온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어떻게 주의 종이 됩니까? 역습을 하려고 여자를 끌고 갔어요. 아주 동기가 나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으면 남자도 끌고와야 하는데 왜 여자만 끌고 옵니까? 벌써 동기가 나쁩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그들을 살펴보시다 말고 완전히 이 여자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에 돌을 들고 있어요. 예수님이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씁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십계명을 적었을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쭉 적어 내려가니까 이 사람들이 기고만장해 가지고서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명을 당신 적었는데 계명을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가 말했으니 돌로 쳐 죽여야지요. 주님이 한번 다시 고개를 들어서 쭈욱 보시고 난 다음에 한 사람 쳐다보고 글을 적습니다. 또 두사람 보고 글을 적습니다. 자기들의 숨은 죄가 예수님의 손가락 끝에서 다 적혀 나옵니다. 감추어 놓았는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알아냈는지 예수님이 그들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야~ 이 여자에게 돌을 던졌다가는 예수님이 돌을 들어서 나를 치면 반드시 죽겠구나. 한 사람은 슬며시 보고 야, 짐승에게 물 줄 시간이 되었는데 나 먼저 간다. 다른 사람은 아침에 아침상을 차리고 나와야 되는데 아침상을 못 차리고 왔으니 빨리 가야 되겠다. 나는 간다. 다 변명을 말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 만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글을 쓰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거든요. 여자여, 깜짝 놀랬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라. 그 여자가 눈이 퉁퉁 부어서 옆을 쳐다보니 아무도 없거든. 너를 죽이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는데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 죄짓지 말라. 그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당장 죽일 수가 있어요. 말 한마디로 돌로 쳐라 했으면 돌무더기에 쌓여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정죄에서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죄를 벗겨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정죄는 예수님이 받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지은 죄는 예수님이 내 죄라고 받아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었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일 아닙니까? 자기가 짓지 않은 일 왜 자기가 책임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자기가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이 여자의 죄도 예수님이 끌어안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만이 여러분 비난하지 아니하고 정죄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버려도 주님은 여러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마음에 절실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구출해준 것처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랑으로 여러분을 구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로 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이 여자가 다시 범죄 할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변화시키는 능력을 이 여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 박사님 여러분 잘 아시지요? 이어령 박사님은 자신을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늘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마음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어령 박사님의 따님이 미국 남편하고 같이 사는 미국의 검사였습니다. 세상 뜨기 전에 그 남편하고 와서 저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했는데 신앙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의 아버지 되시는 이어령 박사를 위해서도 그가 평생에 기도해 왔다고 그가 말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 따님은 천국에 가시고 이어령 박사님이 예수님을 믿은 것을 볼 때 그 딸의 기도가 응답되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어령 박사가 자기가 예수 믿게 된 간증을 책에 기록해 놓았는데 뭔지 모르지만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목마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명예를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겼고, 돈을 벌려고 애쓰니까 돈이 생겼다.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병이 나았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위로함을 받으려고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글을 봐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고 느낌이 다가와서 절대고독을 느낄 때, 내 영혼이 목마를 때 어디로 가야 채울 수 있을까?” 온갖 것 다해도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갈증이 바로 진리에 대한 갈증이요 창조주에 대한 목마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수없이 우물을 파며 고독한 영혼의 광야를 통과한 후, 비로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만났는데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체험해도 목마름이 안 채워졌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알고보니 목마름이 채워졌다. 왜 근본적으로 여러분 만들어질 때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거든요.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원수가 되어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 목마름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말 믿으세요. 절대 하나님 이외에는 여러분 마음에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으로 세상에서 우물을 파던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처음과 나중을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소급해서 내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나의 일생을 주님은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교육과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 전체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도 주님이 끌어안고 미래의 잘못도 주님이 끌어안고 그 대신 여러분에게 생수를 부어 주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보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로 7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알파는 헬라원어에 처음 ‘ㄱ''이고 처음이고 오메가는 ''ㅎ'' 아닙니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가 된다. 그러므로 목마른 자에게 끝까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생수를 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 주님께 목마름을 가지고 오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쓴물이 달아지고 향기로운 생수로써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여러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무거운 짐을 네가 짊어지고 쓰러지지 말이라. 내가 대신 짊어져주마. 주님 십자가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주님이 우리 짐을 당신께 옮기고 걸머지시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러면 예수님 어디에 계시나요? 여러분 속에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계세요. 우리를 버리지 않고 여러분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곁에 계십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한없이 외롭고 고독해도 항상 변치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잡을 때 주님은 뿌리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다 날 뿌리쳐도 예수님은 나를 따라와서 나를 끌어안아 주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예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이 사람들을 찾아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살고 편안하다고 아무 사람 도움도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 주님 찾아오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죄지은 자, 병든 자, 고통스러운 자, 버림받은 자.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와서 주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그의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못났다고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여러분이야말로 예수님이 와서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예수님이 이곳에 안계시고 어디 계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에 목말라 살 희망조차 잃어버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생명수를 마시고 소생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헤밍웨이는 그 소설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노벨상을 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총으로 머리에 대놓고 방아쇠를 당겨서 자살했습니다. 자기는 말하기를 나는 전구의 전류의 흐름이 끊기고 필라멘트가 녹아버린 텅 빈 전등처럼 마음이 공허해서 살수가 없어서 죽는다.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는데 마음이 전등불이 간 고장 난 전구같이 텅 비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했다. 외로움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외로움이 장난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고독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습니다. 외로워 본 사람은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 것을 알 것입니다. 그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넝마를 입은 그대로 진흙투성이가 된 그대로 와도 주님은 받아 주셔서 여러분 속에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생수의 근원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나오면 주님은 여러분 삶에 들어오시며 그 들어온 자체가 구원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수를 마시고 소생되어 희망찬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기도 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가 외롭고 괴로울 때도 떠나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계시는 예수님 이 자리에 친히 와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느끼고 평안을 느끼고 소망을 마음속에 갖고 살기 원하오니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