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3. 성찬주일설교

정죄와 심판
(요 8:1~11)

<서론>
“정죄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소란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리새교인과 율법사들이 한 여자를 끌고 오는데 신발도 벗어버리고 옷매무새가 다 흐트러지고 머리가 다 산발이 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치고 기세당당하게 주님보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행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사람의 생명을 죽이라고 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율법조차도 어기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하면은 그는 하늘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조소하고 핍박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절대로 지켜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거역하면 구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즉시 허리를 굽히더니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적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성경에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짐작컨대 예수님이 십계명을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 중에 칠계명이 간음하지 말라는 구절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로 쳐 죽여야 할까요? 살려야 할까요?”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더라도 이 여자를 살려야 된다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쭉 한번 살피더니만 “이 여자를 돌로 쳐라!” 그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결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이니 율법대로 이 여자에게 돌로 쳐라! 그러나 이 여자를 정죄하거나 돌로 쳐서 심판하는 대는 자격이 있어야 되므로 돌로 치기는 치되 스스로 죄가 없는 자가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이 여자를 심판하지 못한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라. 그러나 칠 자격을 인정받고 쳐야지 자격 없이 죄인이 이 여자를 돌로 치면 도리어 살인죄로 그도 돌무더기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엎드려서 또 글을 쓰는데 이번에도 무슨 말을 썼다는 말은 없지만 주님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감추인 죄악을 하나하나 들춰내어서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어깨너머로 손가락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몰래 지은 죄를 예수님이 폭로 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깊이 느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으니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돌멩이를 다 던져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이 여자가 혼자 울면서 있습니다.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살펴보니 아무도 없거든요.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느냐 하면 이 여자가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자를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때문에 이 여자를 죽여서는 구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살려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보면 심판하기를 원합니다. 온갖 욕을 다하고 발가벗기고 손가락질하고 심판해서 짓밟아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의인이 아닌 이상 이웃을 심판하지 못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죄인임이 입증되었으므로 심판을 집행할 의인을 찾았습니다
내가 의인이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 같으면 죄인된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는데 나도 감추인 죄가 있으면서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면 자기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6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롬 8:7)
죄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까 돌로 치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써 칠 수 있지 죄가 있는 사람이 죄인에게 돌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것입니다.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예수님 사람 구원하는 사랑도 어기지 아니하고 둘 다 멋있게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2. 죄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의인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죄인을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의인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죄인이 있는데 그를 칠 의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검증을 받고 돌로 쳐야만 하는데 아무도 양심상 의인이라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하시고 글로 쓰니까 자기의 죄가 드러나니까 예수님 어깨 너머로 쓰여진 자기 죄를 보고 다 도망을 쳤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3.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태양빛 같은 하나님과 성경의 계명 앞에 흠과 점이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23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디카이오스라는 헬라어인데 죄가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가슴을 펴고서 내가 왔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자격자가 의인인 것입니다. 이런 의인이 되어야 죄인에게 심판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이 없습니다. 죄인은 천지에 가득한데 그것을 심판할 의인은 한 분밖에 없어요. 의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돌로써 치면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돌로써 심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주님은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율법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은 있는데 재판관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죄인은 천지에요. 그러나 그들을 심판할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된 사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여러분,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 죄를 지었으니까 죄인이다. 천만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는 다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어요. 왜 죄인이냐, 아담과 하와 우리 조상이 죄를 짓고 난 다음 그 조상의 핏줄을 타고 난 우리들은 모두 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의 유전을 받고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서 죄 짓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배워서 죄 지은 사람 없습니다. 아예 죄인이 되어서 태어나기 때문에 다 죄지어요. 여러분 중에 죄 안 지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죄를 안 지은다면 또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왜 죄 짓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누가 죄 지으라고 가르쳐 줍니까? 안 가르쳐 주어도 죄는 잘 짓습니다. 왜냐,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죄를 짓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요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 앞에 서게 되면 모두 다 죄인으로 드러난 것이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모두 다 죄인이므로 주님이 구원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지 정죄하러 오시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판결을 내리신 것과 같이 주님은 여러분을 보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로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판내릴 판정을 내릴 사람이 세상에는 없어요.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구원하려고 하시지 심판하시려고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9장 10절로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저 예수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주의 말씀을 증거한다고 하면서 가는 곳마다 죄인들하고 섞여서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니 저런 사람이 무슨 우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보고 “너희 선생이 죄인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니 너희 선생도 별 수 없는 죄인이다.” 그때 예수님이 그 말을 아시고 “이 사람들아, 의원이 어디에 필요하냐! 병든 자가 있어야 의사가 필요하지 않느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에 죄인이 있는 곳에 내가 있지 죄인이 없는 곳에 내가 있을 필요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제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제가 목회 중에 들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너무 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 안 돌봐줍니다.” 내가 “천만에요. 예수님은 당신 같은 죄인 찾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의인은 예수님이 찾아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거에요.” 우리나라에는 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와 계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죄인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인들이 계신 곳에 와 계시고 여러분은 죄인이므로 예수님이 더욱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여러분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은 자비를 말하는 것이고 제사는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율법으로써 심판하기를 원하니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그러므로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이 있는 곳에 와야 죄인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그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시고 지극히 사랑하셔서 죄인 괴수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죄가 드러나거든요. 이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죄를 깨달아 알고 죄인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죄인이라고 알고서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면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냥 고기만 잡고 있을 때는 그가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데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으니까 자기 죄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 엎드려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고 감옥에 가두려고 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대낮에 햇빛 같은 빛이 비치면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를 보자마자 사울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서 기독교 역사상에 전무후무한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에 느끼는 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보혈의 목욕탕에 우리를 목욕시켜 주시고 사랑의 타올로 몸을 닦아 주시고 주님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주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하늘나라에서 멀리 떠나있는 죄인을 찾아서 구원시키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예수님이 와 계신 것은 의롭게 사는 의인들은 의인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지만 죄인을 주님께서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죄인 곁에 지금 와 계신 것입니다. 절대로 죄인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구박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꼭 한 분밖에 안 계신데 예수님 밖에 안 계시는데 예수님이 심판을 안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심판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안 계세요. 그밖에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유전적으로 죄의 유전을 타고나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 예수님은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아버지의 피가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배총이라는 것이 굉장히 기적적인 기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피가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아이를 만드는데 그 배총을 통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피는 한 방울도 못 들어오도록 막는 것입니다. 피는 몸속에서 자생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받아들여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아버지, 어머니의 피를 받아서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태어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유전을 조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유전은 하늘나라 유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유전 속에는 죄를 짓는 유전이 없습니다. 그런 DNA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고 못해요. 왜냐하면 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우리같이 죄인이 죄를 짓지 의인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의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도덕을 닦고 수양을 닦고 노력을 해서 구원을 받지 않는 것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는데 그가 그 때문에 죄를 짓고 있는데 노력을 해서 태어난 죄성을 없앨 수가 없어요. 죄의 유전을 없앨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도리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그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옛사람은 아무리 아무리해도 옛사람이에요. 예를 들어 말하면 피부가 검은 사람은 아무리 아무리 씻어도 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검은 피부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아무리 부르짖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 없이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죄 없이 어떻게 태어납니까? 예수님 이외에는 죄 없이 태어날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새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날 때는 어떤 유전을 가지고 태어나느냐. 예수님의 유전을 타고 태어나는데 예수님의 유전은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는 의의 DNA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여러분 속에 죄를 짓지 않는 DNA 유전이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기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나는 죄인으로서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옳습니다. 여러분 의롭게 못살아요. 그러나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옛 사람은 주고 새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태어났을 때 여러분의 영 속에는 죄를 안 짓는 유전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 DNA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죄를 안 짓는 유전이 예수를 통해서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 죄는 물러가라! 쉽게 죄를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기적인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연적으로 태어났을 때는 죄인으로 태어나고 예수님을 통해서 태어날 때는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고 예수 믿고 의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유전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죄를 안 짓는 유전, 나쁜 습관을 안 저지르는 유전, 병에서 고침 받는 유전, 축복과 형통을 가져오는 유전, 죽어도 천국으로 올라가는 유전이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그 유전이 있어요. 그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므로 새로운 유전이 내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변화된 자기를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화상을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이긴 사람이다. 나는 불의를 이긴 사람이다. 병을 이긴 사람이다. 저주를 이긴 사람이다. 사망을 이긴 사람이다. 왜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유전이 내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그것을 꿈꾸고 그 유전이 들어온 것을 믿고 여러분 나는 죄를 이긴다. 나는 허물을 이긴다. 나는 병이 와도 병을 이긴다. 저주와 가난을 이긴다. 죽음을 이긴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기는 유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보화가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유전이 들어와 있으므로 여러분은 죄 없이 중생했고 허물 없이 중생했고 병 없이 중생했고 저주 없이 중생했고 지옥 없이 중생해서 그 유전이 속에 들어 있으므로 이것을 알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 유전이 여러분 몸 속에서 역사하므로 아무 고생 없이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여러분 수분과 양분을 끌고 올립니까? 안 끌어 올립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습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수분과 양분을 끌어올려서 가지에 전달해주어서 가지에서 수분과 양분을 받아가지고서 열매만 맺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 안에 너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는 가지에 불과한데 가지가 자꾸 나무 역할을 하려는 것입니다. 가지가 물기를 빨아들이고 양분을 빨아들이려고 하는데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유전이 없는데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자기 힘으로 발버둥을 치고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습기와 양분을 끌여들여서 열매 맺으려고 하는데 하나도 안 맺어져요. 예수님께 꽉 붙어 있으면 예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죄인으로서 종교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옛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난 사람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서 새로운 유전을 받아서 그 유전의 힘에 의해서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다 죄인이 무슨 죄인을 심판하느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런데 죄 없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까 돌로 못 치지요. 우리가 젊었을 때는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뒤를 돌아보니 남은 것은 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이 죄를 우리 스스로가 청산할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 예수님만이 의인인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 했으니 이 세상에서 정죄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손에 돌을 들고 때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돌멩이 들 권한이 없어요.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 손에 돌멩이를 들고 때리실 줄 알았는데 손을 보니까 손에 돌멩이가 쥐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있습니까? 큰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를 때려야 될 그 돌을 없이 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돌을 없애기 위해서 대못을 박았습니다. 주님의 손에는 여러분을 때릴 돌멩이가 얹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에는 여러분 죄 때문에 심판받은 못자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손으로 돌이 없으니까 심판 안하지요. 돌을 쥐고 있으면 때리니까 심판하지만 돌이 없으니까 심판하지 않지요. 못자국만 남아있으니까 여러분의 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증거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6. 우리는 매일 이웃을 정죄하며 심판자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이웃을 정죄하며 심판하고 살아가는데 참으로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자기가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나중에 자기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이웃을 심판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심판하는 그 심판을 가지고 너도 한번 받아봐라. 네가 이웃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너를 심판하는 것이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5절로 37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그 다음에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비판하고 나면 나중에 그 비판 내가 받게 되고 우리가 정죄하게 되면 나중에 그 정죄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죄인이 죄인을 정죄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비판한 만큼 여러분이 비판을 도로 받게 되고 정죄한 만큼 정죄를 도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용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심판자가 아닌 용서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웃을 정죄하면서 심판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베드로는 7번 용서하면 대단히 많이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일곱 번을 일흔번하면 어떻게 됩니까? 계산 한 번 해보십시오. 490번인데 하루에 490번 죄를 짓고 와서 잘못 했다고 하거든 490번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은 한이 없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루에 490번이라도 회개하고 오면 용서해주라는 하나님의 그 용서가 얼마나 크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조금 죄를 씻고 나면 십자가가 더러워져서 몸을 씻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영원한 보혈로 그 양도 영원한 것입니다. 능력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루에 490번 죄를 짓고 회개해도 씻어서 하얗게 맑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보혈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는 우리가 정결하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7.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에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동안 주님이 그렇게 용서해 주셨는데 재림하실 때는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심판하지 않고 늘 용서해주지만 심판주로 재림할 때는 놀라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 지상에서는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으로 만납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 은혜의 세대가 지난 후에는 무서운 용서 없는 심판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아야지 주님 재림할 때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이웃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상한 갈대 흔들흔들 바람에 흔들려 꺾여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꺾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다 상한 갈대 같이 되어서 흔들흔들 흔들흔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이리 따라하고 저리 하면 저리 따라가고 그냥 확 비틀어버리고 싶은데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촛불이 꺼지려고 껌뻑껌뻑 벌렁벌렁 합니다. 그만 이렇게 하면 꺼져버릴 것인데 우리는 훅하고 끄지만 예수님은 그것 안 꺼지고 밝히도록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아야지 예수님을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한번 제자들 보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 주었는데 일만 달란트를 빌려 주었는데 그 사람을 불러서 갚아라. 갚지 않으면 너희 처자를 팔아서라도 갚아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울고 빌면서 조금만 말미만 주면 다 갚겠나이다. 살려 주십시오. 주님이 불쌍히 여겨서 오냐, 일만 달란트 다 가져라. 용서해 주었다.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서 뛰고 구르면서 그 집에서 나와서 길거리에 나오니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가 지나가는데 야야야, 거기 있어. 놀래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 채주가 야, 내 돈 백 데나리온 내놓아라. 기회를 주시면 내가 열심히 일해서 갚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너 처자를 팔아서라도 당장 갚아라.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이 주인에게 가서 이 사람의 행실을 고하니까 주님이 노발대발해서 도로 불러서 내가 네가 울고불고 하기에 일만 달란트를 용서해 주었는데 네가 동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해 줘야 되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니냐. 나쁜 놈 아니냐. 그러니까 이 놈 빚을 갚을 때까지 잡아서 옥에 넣어라. 이 비유를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일만 달란트의 용서를 받았으면 백 데나리온 조금 죄 지은 사람은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을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를 거저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심판하기는 좋아도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용서하면서 살아야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부는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관계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사상가는 부부관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부부관계는 3주 동안 서로 관찰하고, 3개월 동안 서로 사랑하고, 3년 동안 서로 싸우고, 30년 동안 서로 용서하며 산다.” 왜 아기자기한 애정이 없느냐. 다른 사람들은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 용서해주고 사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집사람하고 40년 가까이 살았지만 용서해 주고 살고 용서받고 살지 가슴에 뜨거운 로맨스가 있어서 아기자기하게 산 적은 기억 속에 별로 안 남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집에 돌아가시거든 남편을 용서해주고 남편은 아내를 용서해주고 용서로써 사는 것입니다. 왜 아기자기한 사랑이 안 생기느냐. 세월이 지나가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만 하면 못살아갑니다. 사람이 덤덤해야 같이 사는 것이지 서로 아기자기하고 서로 입에 넣은 것 나눠먹고 며칠 살 수 있습니까? 못삽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서로를 참고 용서하지 않으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인 것을 깨달아 알고 이웃을 심판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정죄하지 말고 심판하지 말고 용서를 하고 오랫동안 참으면서 살다가 천국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