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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5. 부활․성찬주일설교 산 아래의 예수님과 산 위의 예수님 (눅 9:28~36) <서론> “산 아래의 예수님과 산 위의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사는 존재는 언제고 헤어져야 되고 언제고 죽어야 되는 것입다. 그래서 옛말에 생자필멸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이별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이별하여 산다는 것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인데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죽음과 관계없이 태어났습니다. <본론> 1. 아담과 하와의 태어남과 죽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지으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도 죽지 않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죄를 짓고 난 다음에 그들은 죽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내가 결정하게 되면 그 가운데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이 주장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분별하는 주권자인데 아담과 하와가 불쑥 나타나서 하나님 좋아하시는 것 우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싫어하는 것 우리가 좋아합니다. 우리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정면 대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대주권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명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첫 번째 죽음이 형이 아우를 쳐죽이는 비극인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과 아벨이 농사를 지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될 때 가인은 곡식을 가지고 재물을 삼았고 아벨은 어린 양을 잡아 피를 쏟고 태워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누누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곡식을 거두워서 재물로 드린 가인은 재물을 용납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재물을 용납 받지 못했는데 그 동생 아벨은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그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불로 태워 재물 드리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화가 나서 들에서 동생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첫 살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유전 받아 태어났고 죄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2.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죽음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죽음은 마귀의 최첨단 사용기구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이유로 해서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이 죽음이란 것은 영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은 없어진다고 그러지 않아요. 죽는다는 것은 교제가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졌다. 관계가 두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관계가 두절되고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으니 영적인 세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야 되겠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죽은 영혼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영이 살아나고 하늘나라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이 죽으니까 자연적으로 따라서 육체도 죽게 되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인간이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선포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을 파고 흙을 먹고 살다가 흙 속에 죽어 장사지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는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이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지구를 돌보는 주인으로 있지 않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반역의 처소로 이 지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구에 있는 모든 동식물은 다 저주를 받고 죽게 된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의 모든 생물은 다 죽게 된 것입니다. 만물이 사람 때문에 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21절로 22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 산천초목이 모두 다 아담과 하와의 종인데 아담과 하와를 따라서 사망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사망이 꽉 들어찼습니다. 미국의 한 공동묘지에 어느 가을 신문에 이상한 광고가 났습니다. 11월부터 석달동안 공동묘지 수리를 하기 때문에 문을 닫습니다. 죽을 분은 좀 늦춰서 죽으십시오. 참 말은 되기는 되는데 무서운 말이지요. 그 공고를 본 그 동네 목사님은 다음 주 설교 제목을 크게 써서 붙이기를 ‘죽으면 휴일이 없습니다.’ 석달 후에 오라고 하는데 죽으면 휴일이 없으니까 휴일에도 장례를 지내야지요. 죽음에는 휴일이 없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만히 혼자 있을 때 생각을 하면 이상한 생각이 생깁니다. 제가 모시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온 우리 교회 노인들이 한분 두 분,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도 여기서 매주일 마다 만나고 서로 반가워하던 상호간인데 얼마 안 있으면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 두고 헤어진다는 것 괴로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주님 오실 때까지 사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 중에 가장 고마워해야 될 것은 원수가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상처를 입고 분노해 계신데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림으로 하나님이 분노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마음대로 어느 시간에 아버지에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목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해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10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오리지널 계획대로 우리는 죽음의 저 건너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죽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망을 멸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동서양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마음에 믿고 입으로 공개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면 아멘 하십시오. 입술로 고백하면 아멘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역 3년 반 동안에 굉장한 갈등 속에 계셨습니다. 왜 갈등 속에 계셨느냐면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살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하루는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주님이 기도하시는데 주님 얼굴의 모습이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치고 몸이 햇빛처럼 희어지더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니까 이것 웬일입니까? 천년 전에 세상을 떠난 모세와 수백년 전에 떠났던 엘리야가 옛날 모습을 가지고 그 변화산상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말하시고 주님이 안 올라갈 마음을 먹고 구세주 되기를 포기하려고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 같은 것 능히 참고 쉽게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걸머지는 것이 그렇게 괴로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통곡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세 번 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니까 내 뜻대로 마시옵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기회는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나 도저히 희생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 구주될 것을 포기합니다 하셨으면 포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고 우리는 다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갈등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개발한 사형도구 중에 가장 흉악한 도구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몇 번이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라. 나의 뜻은 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강제를 할 수 없지 않느냐. 너의 선택을 네가 권한을 가지고서 정하라. 그러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에 변화산상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서 그 장면을 그들이 보게 합니다. 변화산상이 시간과 공간이 정지했습니다. 정지하지 않고야 모세와 엘레야가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옛날 그 모습으로 나타나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돌아가실 것이다. 만일 포기하고 싶거든 지금 포기하는 것이 좋다. 다음에는 포기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대개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겁을 집어먹고 들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까지 못 알아 들었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 고난당하신 것을 이야기 했다기에 제가 그것을 읽어보고 예수님께서 죽을 것이냐 죽지 않을 것이냐, 십자가를 질 것이냐 안 질 것이냐. 마지막 기회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시라도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그 자리에 두고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4. 예수님의 산 아래의 삶과 산 위의 삶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고 하늘나라가 임하여 있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이 산 아래 죄와 병과 마귀와 죽음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로 3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예수님은 예루살렘 올라가서 고통을 받고 별세하실 것을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권세도 있고 포기할 권세도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받아들여서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할 것을 결정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결정 내렸습니다. 결정 안 내렸으면 그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가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산 위에 따라왔다가 어~ 주님 온데 간데 없네? 가버렸어요. 주님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장애를 받지 않습니다. 영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한정된 시간이 어찌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한 발짝을 두면서도 영원한 세계에 다른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어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알면서 주님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소원은 이 잔을 마시지 아니하고 엘리야와 모세를 데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하는 것이 인류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기 때문에 여러분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있을 동안에 산 아래에는 마귀들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눅 9:37~43)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하고 그들 손을 잡고 아버지께로 갔었으면 산 아래 귀신 들린 어린 아이 같은 고통당하는 수많은 인류들은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인류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산 아래를 택하고 산 위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산 위를 택해서 그대로 갔으면 오늘 우리 부활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 위에 올라가시지 아니하시고 영혼이 잘못되고 범사가 저주에 허덕이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선택해서 이들을 위해서 죽음을 당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미국 장로교의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인 멘로파크 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존 오트버그 목사님이 「우리는 만나면 힘이 납니다」 「Everybody’s normal till you get to know them」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을 알기 전까지만 정상이다」라는 뜻인데, 알고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모든 사람이 다 비정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많이 압니다. 그런데 그냥 있을 때는 정상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사람 아닌데? 알고 보니 비정상이네? 내가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결혼하고 난 다음에 얼마동안 살다가 회의가 들어서 신앙상담 와서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요~ 그런 사람이었어요. 숨어 있었지... 우리 마누라 저런 여자가 아닌데... 왜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런 여자인데 가운을 둘러 쓰고 있어서 못 봤지... 우리가 기대하던 사람 보다 다른 사람인 것을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고슴도치의 바늘을 든 의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모두 비정상이며, 그래서 서로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인생이 마치 고슴도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고슴도치는 그 몸에 3만개의 바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몸에 3만 개의 바늘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 하면 찔리면 독이 올라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슴도치 부부는 포옹하거나 키스하지 말아야 합니다. 찔립니다. 고슴도치들은 떼를 지어서 다니지 않는데 서로에게 다가가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슴도치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서로 사랑하기 원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다 고슴도치 인간으로서 멀리도 있어야 안 되고 너무 가까이 있어도 안 되고 거리를 두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통당하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사역하셨는데 예수님 순수한 마음에 얼마나 인생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괴로워 하셨는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산 위로 불러올리신 하나님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인데 원하시면 언제고 하늘나라로 건너 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메시지를 모세와 엘리야가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헤아리는 나이는 하나님이 만든 대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 나이를 먹는 것은 시간으로 그저 때를 재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죽음에 쌓여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난 다음 여러분의 영혼은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이 유한한 육체 속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육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치명적인 타격을 갖다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 떠나도 사망아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괴롭히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사망을 제켜 놓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하늘나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사 끝까지 산 아래서 고역을 하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고쳐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기를 원하시고 행복을 주어서 이 고난 많은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인데, 4~6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그 짧은 구절에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홉 번이나 강조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성경은 아홉 번 말하고 있는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모두 다 덧입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실 때 예수님 얼굴은 안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얼굴이 예수님 얼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예수님은 심판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잘못이 선고되고 주님이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을 우리가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치료를 가져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 던져 놓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신 2천년 전부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자도 아니고 혼자 고난 받은 자도 아닌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여러분과 인생을 함께 살기 위해서 성령으로 여러분 속에 와 계십니다. 그 예수님은 법적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으면 엄청나게 믿음으로 서서 마귀를 저항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저항하면 여러분은 피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엄청나게 저항하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을 주장하면 여러분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그것을 누리기로 작정하고서 낙심하지 아니하면 여러분이 그것을 누릴 수 있는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진리를 알고도 그 속에 살지 않습니다. 진리를 포기하고 사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 하나님이 얼마나 소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이것을 값을 지불했겠습니까? 여러분 구원받은 것은 이미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합법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사함 받는 것도 합법적이고 병고침 받는 것도 합법적이고 저주에서 해방받는 것도 합법적입니다. 하늘나라 법정에서 고소를 해도 여러분이 이깁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속 제물 뿐 아니라 우리 변호사이기 때문에 이깁니다. 마귀가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언제고 이 예수님을 붙잡고 일어나면 일어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희망을 갖고 싸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끝에 십자가의 무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산 위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산 아래 삶으로 도로 내려왔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보고는 산 아래 내려가지 말자. 이곳에서 살자. 그렇게 예수님이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여기 주막 셋을 지어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신천신지에서 살자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있을 것을 거부했습니다. 산 위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산 아래 인생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산 아래 인생을 버리고 산 위에서 살겠으며 천국에 살겠느냐. 산 아래로 내려가자! 산 아래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손잡고 피를 흘리면서 서로 고슴도치가 되어서 서로 찌르고 찔리면서라도 같이 살자고 산 아래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 집에 따라와서 계신 것입니다. 산 아래 동네에서 고통하고 사는 여러분과 짐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서 여러분 이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철저히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옛날은 다 없애버리고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잔을 들여다보니 아담의 원죄로부터 시작해 모든 인류의 죄가 예수님 앞에 놓인 잔에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추악하고 더럽고 상상을 초월한 죄악이 가득 담긴 잔을 마셔야 됐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잔을 보고 움츠렸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에게 그 잔을 마시라고 하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더러운 잔을 안 마시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다가 아버지가 대답을 안하시니까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그는 그 잔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잔을 마시고 일어나 골고다로 향해 죽음의 길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죄악의 잔을 마신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잔을 안 마셨으면 여러분과 내가 마셔야 되는데 여러분과 내가 마시면 영원한 지옥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아시죠? 제가 마사이족에게 부흥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추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사이 족들이 반 발가벗고 춤을 추고 대단한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사이 동네에 집사님 댁에 차 한 잔 대접하겠다고 오라고 해서 따라갔는데 참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마사이족은 집을 소똥으로 짓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소똥이 질퍽질퍽합니다. 거기에 좋다고 앉아야 합니다. 안 앉으면 그날 부흥회한 것 효과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장로님도 따라가서 전부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어이고 집에 왔는데 잡술 것 없어서 어떻게 하냐고 하는데 우리가 아니에요~ 괜찮어요~ 안 먹어도 괜찮다고... 마사이족에서는 맨 입으로 손님을 보낸 적이 없다고... 커피를 타 드리겠다고... 그래서 화로에다가 냄비를 놓더니만 커피 가루를 잔뜩 부어가지고서 손가락을 드는데 손에 소똥이 덜렁덜렁... 그것을 가지고 졌는다고 해요. 커피 플러스 소똥입니다. 그래서 큰일 났습니다. 일어설 수도 없고... 그런데 거기 선교사가 날 보고 허리를 찌르면서 목사님 이것 안 잡수시면 오늘 보따리 싸고 쫓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주님이 마신 잔을 생각하고 먹어야지. 그리고 장로님들을 보고 이게 날 따라온 대가입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먹으라고... 그래서 끓여서 주기에 받아서 먹는데 진짜 소똥 향기가 진하더라구요. 커피인지 소똥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기도하고 눈감고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우리 장로님들 보니까 발 앞에 모두다 부어 놓았어요. 그래서 내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 장로님들은 비행기 멀미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약을 먹고 와서 다른 것을 먹으면 효과가 없어서 여기에 다 부어 놓았습니다. 나는 비행기 멀미 안 하기 때문에 까딱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 마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오면서 장로님들에게 비행기 멀미 두 번만 더하면 나는 소똥 장사다. 잔을 마실 때 그 잔에 무엇이 들었는가가 굉장한 관심사가 되는데 예수님은 그 잔 안에 있는 내용이 전부 여러분의 죄악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잔을 예수님께서 다 마셔 주셨습니다. 인간은 육의 생명과 함께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고린도전서 15장 20절로 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러분은 다 영생을 얻은 분인 것입니다. 기가 막힌 영광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얻었습니다. <결론> 이 세상과 인간을 하나님은 최고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죄의 종이 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결코 불퇴진의 헌신으로써 생명을 바쳐 죄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당신은 안 박히셨겠어요? 예수님보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부림칠 때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 위에 포개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통을 당하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해도 도울 수 있는 자가 있는 것은 아버지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고통당했고 예수님도 고통당했고 성령님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고통당한 사람만이 고통당한 사람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혀 고통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있던 사람이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 없지요. 내가 아주 좋은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6.25 사변 난 이후로 우리가 고통당한 이야기를 다 하고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더구나 나는 폐병 걸려서 쓰러지고 난 다음에 그 숨이 답답하던 것을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여러분 폐병 걸려서 폐에 구멍이 많이 뚫어지고 갈비뼈에 집착이 되어 있어서 숨이 안 쉬어져요. 드러누워 있으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벽에 기대 앉아가지고서 억지로 숨을 쉬어야지 자연히 그대로 내버려 두면 숨막혀서 화닥딱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늘 벽에 기대서 잠을 자고 했기 때문에 오늘날도 저는 걸상에 앉아서 잘 잡니다. 걸상에 앉아서는 잘 자는데 드러누우면 놀라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가운데 드러누워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내게 와서 위로가 되는데 어떻게 위로가 되느냐면 주님, 주님도 손발에 못이 박혔지요? 아팠지요? 주님도 옆구리에 창을 맞아서 심장이 터지고 피와 물을 다 쏟았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주님, 내가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하여 주님이 이기신 힘으로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고통 받은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고통 받은 주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위로를 못 받았지요. 성령도 우리의 연약하심을 도우시나니... 성령도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함께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을 능히 이해하고 담당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있더라도 오늘 여러분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그 고통을 깨달아 알고 함께 짐을 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버린 하나님 아버지는 십자가에 아들만 못 박아 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도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이 고통당하니까 성령님이 따라서 고통 당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이 같이 고통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떠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데, 유명한 장인이 만들면 명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든 작품이니 명품 중에 명품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주에 명품으로 지어졌다. 그러니 세상의 명품은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명품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