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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 ( 전 1 : 1 - 11) 2015.7.26. 주일4부 설교 ‘행복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늙어가고, 사망의 그림자가 모든 인간을 덮어씌우는데 우리도 이 땅에 후회 없이 살고 행복하게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기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을 살아가면서 진정 너는 행복하게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이 쇼를 하느냐? 1. 죄책과 정죄의식에 사로잡힌 삶에는 행복이 없다 여러분, 죄책과 정죄의식에 사로잡힌 삶에는 절대로 행복이 없습니다. 큰 죄, 적은 죄가 마음속에 들어앉아서 참소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기쁘고 행복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어서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이란 것은 행복한 동산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셔서 행복한 동산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행복한 동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으되 선악을 아는 분별의 권세는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하는 권리는 절대 주권적인 권리인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것은 모두 다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안 식구면 아버지가 이건 ‘좋다 나쁘다’ 결정합니다. 회사의 사장이 이것이 ‘좋다 나쁘다’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문제는 하나님이 ‘좋다 나쁘다’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도 결정하겠다. 당신이 결정한 것은 나쁘고 내가 결정한 것이 좋다. 논쟁이 붙으면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울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거기 들어와서 “하나님은 그렇게 결정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결정 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대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과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으면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상대하고 대적할 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 죽는다. 영혼이 죽는다. 육혼만 있고 영혼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깜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와 대화하는 가운데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오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로 10절에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야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야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으면 숨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에 숨어야 되고, 이웃 사람에게 숨어야 되고 늘 스스로 변명하고 숨고 살 때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죄를 다 청산해버릴 때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사람은 마음에 죄책감이 있을 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는 그 마음이 죄책감으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시편 32편 2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다 자복하고 나니, 그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훼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시 32:5) 라고 말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고 복을 받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대신 담당하고 청산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나와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죄와 허물은 영혼의 병입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영혼의 병인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수로 활동하는 전용대 목사님은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전신마비가 되어서 겨우 산지팡이를 짚고 교회오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옛날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를 걸을 때면 절뚝발이라고 놀림 받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주인이 뒤따라오면서 소금으로 “에이~ 재수 없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버스나 택시도 손을 들어도 안 태워줍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괴로워서 늘 술을 취해서 살고 여러번 자살을 도모했으나 하나님이 자살을 허락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는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을 읽다가 마음속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자기 같은 절름발이 버림받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통곡을 하고 울고 그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몰라주어도 주님은 나와 같이 계신다. 세상에 아무 친구 없어도 주님만은 내 친구가 되신다. 그래서 기쁘게 제가 집회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그 기쁨이 넘쳐났었습니다. 최자실 목사님께서 “야 너는 하나님 찬송을 부르고 영광을 돌리라고 절름발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예수님께만 영광 돌리고 찬양 부르고 씩씩하게 살아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기의 인생 사명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인생사명으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모두 다 태어날 때 두 가지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은사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한 가지는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욕을 잘하면 그것도 은사로써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은사가 없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사명이 또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고 올라오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엄마의 사명, 아빠의 사명도 사명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안내하고 돌봐주는 것도 사명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도 알고 사명도 아는데 이 전목사에게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너는 노래는 부르는 것이 사명이다. 잘 부르든 못 부르든 불러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가진 것은 많지 않으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명을 다하고 사니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고 의지할 수 있으니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하나님이 없는 즐거움은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솔로몬 왕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즐거움을 다 누려본 사람입니다. 그는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서 1천 명의 부인들을 데리고 살면서, 상아와 정금으로 만든 보좌에 앉아 그 눈과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누렸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모아놓은 그 거대한 재산을 상속으로 받아서 화려한 집을 짓고 거기에 들어가서 한두 명도 모시기 힘든데 천 명의 부인을 모시고 어떻게 삽니까? 그래도 그것이 행복인줄 알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 그 부인 이름도 모를 것입니다. 나는 자라나면서 항상 우리 어머니 기억력을 놀랍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저를 부르려고 하면은 여섯 일곱 명의 이름을 다 불러가지고서 저를 부릅니다. (11:47)우리 있으면 “용기야~” 그러면 될 건데 어머니 마음은 “용기야~”하고 싶은데 “혜숙아. 현숙아. 용우야.” 그 다음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전부 가서 “예? 예? 예?” 뛰어가보면 “내가 널 불렀다. (다른 사람은) 잘못 불렀다.” 사람의 기억력이 한도에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제가 사람 이름은 가끔가다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이래도 기억력 상실은 아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노래처럼 이름을 많이 부르면서도 아흔 네 살 까지 살더라. 여러분, 기억력을 상실 안하려면 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뛰어난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열왕기상 10장 23절로 25절에 보면,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 하지만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부귀영화 공명은 헛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귀영화 공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그 부귀영화 공명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고 사명을 받고 인생을 살면 큰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목표도 없고 꿈도 없이 어영부영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2.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을 살아라 허무와 무의미의 삶에 사람들은 다 몸서리칩니다. 우리가 매일 신문을 펼칠 때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신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얼마나 사람들이 허무와 무목적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솔로몬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 1:1-11)” 내가 왜 다 읽은 줄 압니까? 치매에 안 걸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허허허허 우리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나? 자기가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의 종이니까 일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신앙상담을 올 때, 희망을 잃어버리고 꿈을 잃어버리고 낭패 당한 경험만 가득히 갖고 이 세상에서 살 필요가 죽어야 된다고 한 사람이 많이 옵니다. 그 사람들을 붙잡고 당신은 살 가치가 있다고 그것을 늘 말을 해주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의 목회 카운슬링 책에서 제가 읽었는데 하루는 중년 남자가 들어와서 목사님 사무실 의자에 푹 주저앉으면서 “목사님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빈 손 든 사람입니다. 나는 목사님하고 의논해보고 대답을 못 얻으면 나가서 자살하겠습니다.” 그래 목사님이 “뭐가 없다는 말이요?” “나는 직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수입이 없습니다.” “그러면요?” “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돈벌이 못하니까 이제는 나를 버리고 떠나려고 합니다. 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아버지가 무능해서 교육도 못 받고 있습니다. 나는 식욕이 왕성한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생활이 어려우니 친구들도 다 떠나가 버리고 친구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흰 종이와 연필 한 자루를 주면서 “내가 묻는 대로 거기에 대답하시오. 당신은 친구가 없다고 했는데 오늘 찾아온 목사가 당신의 친구인 것을 모르느냐? 친구가 친구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친구가 있다고 적으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 아내가 완전히 떠나지 않고 아직 떠난다고 협박만 하고 있으니까 아직도 아내가 있다. 셋째로, 애들이 아버지가 양육을 못하니까 길거리에 허덕이지만 그러나 내 이름을 부르는 자식들이 있다 적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은 부귀영화 공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암에 걸려서 남은 생명이 삼 개월 밖에 없다. 육 개월 밖에 없다는 최후선고를 받고 좌절과 절망에 처해 있는데 당신은 없어서 못 먹는다고 하니까 건강이 있다.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러면서 쭉 적어내면서 일어서십시오. 읽으십시오. 나는 무엇이 있다. 무엇이 있다. 무엇이 있다. 무엇이 있다. 전부 있다고 (적으십시오) 목사님이 여보시오.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어.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없다고 당신 탄식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에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없는 것은 제쳐 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당신 아직 부자입니다. 그리고 있는 자에겐 더 주고 없는 것은 빼앗아 갑니다. 성경 말씀에 주님이 없는 자는 있는 것조차 빼앗기리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멀리 합니다. 같이 있으면 손해나니까. 없다고 말하지 말고 있다고 말하면 다 친구가 됩니다. 뭘 좀 얻어먹을까 싶어가지고서... 여러분, 절대로 없단 말 하지 마세요. 있는 것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주라 그리하면 줄 것이요. 또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하는 것처럼 있는 자에겐 더 주고 없는 자에겐 있는 것조차 빼앗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그만큼 가치를 가지고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됩니다. 없는 사람은 가치가 없지 않습니까? 살 존재 가치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존재 가치를 예수님만큼 느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갈 가치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막힐 때 우편 좌편 강도가 매달렸는데 그 강도를 매달았을 때 “우리는 가치가 없다. 우리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사회에서 격리됐는데 사회에서 우리를 심판해서 사형에 처했다.”고 생각했는데 강도 한 사람은 “이것 봐라? 예수님 이 분은 좋은 일만 하고 다 죽어 살리고 고쳐줬는데 이 분은 왜 못 박혔을까?” 그래서 한 강도는 생각하기를 “아 이분은 유대인 국가보다 더 크고 로마보다 더 크고 위대하므로 사람들이 질투를 해서 십자가에 못박(았구나)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주님, 주님이 오는 날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그러니까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지도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누가 너를 기억해 주겠는가?” 그러니까 꾸짖었습니다. “야 이놈아 너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당연한 사람이다. 죄가 많다. 그러나 이 분은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분이다. 주님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이 그 사람을 보고,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것 보십시오. 가치가 없으면 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너는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목숨을 지금 바치는 것이 너 때문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복이 있는 사람이 지옥에 갈 수가 없다. 낙원에 있어야지. 낙원에 같이 가자.” 여러분, 우리는 굉장히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 가치가 없었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시고 대신으로 여러분을 구원하겠다고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여러분을 건져냈으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값이 나가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예수님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 놓았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여러분을 보시고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가치를 가진 인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가치를 느끼게 될 때,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 때 마음에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 중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의 병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태어나서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영원한 행복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죽음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안돼요~다 살아야 돼요. 영원히 사는 길이 예수 믿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기나긴 세월동안 예수 믿으면 안 죽고 산다고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 ‘이러다가 나도 100살 안 되어서 죽으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에게 100살 이상 산다고 다 떠벌려놓고 난 다음에, 신문 부고란에 <조용기 가다.> 그래놓으면 어떨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 걱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3. 죽음과 무의 삶을 극복해야만 한다. 죽음은 무의 생활을 극복해야만 하는데, 우리가 성경에 보면 블레셋 국인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블레셋 장군 중에 골리앗이 있었어요. 우리 인생의 키가 두 배나 크고 억센 군인인데 블레셋 사람인데, 이스라엘 사람을 희롱하고 “너희 중에 남자 있으면 나오라! 한 번 대항해서 싸워보자”고..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은 그에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이 자리에도 앉아 계시지만은 여러분이 여러분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나는 잘할 수 있다, 나는 못한다. 자기를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화상이라는 것이 있어 자기가 자기를 보는 사진인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자화상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그 자화상에 따라서 합니다. 그래서 이 자화상이 부정적이면 모든 것에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렇게 합니다. 자화상이 긍정적이면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보자!’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자화상이 확실히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 주의 종들은 다른 교회 초청을 받아갈 때, ‘내가 참으로 이곳에 설교를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를 봅니다. ‘아유.. 내 자화상에 볼 때 나 같은 사람이 그 교회 가서 감당하지 못한다.’ 딱 자화상을 부정적으로 가지고 그러고 그 교회 들어가서 소개 받고 박수를 받아 강단에 서 가지고서는 비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설교하니깐 죽을 쒀 버립니다. (죽을 쒀요,) 자화상이 죽을 쑤면 행동도 죽을 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자신을 잃고 아주 절망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더라’ 이스라엘은 임금에서부터 군인 한 사람 한 사람까지 패배의식으로 꽉 들어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17살 쯤 되는 초립동으로서 아버지를 군인으로 와 있으니까는 자기 형님들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아이~ 이 모양입니다. 유대 사울 왕의 군대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나무 뒤에 흙더미 뒤에 숨고, 골리앗은 나가서 큰 소리 하고 그래서 다윗이 임금에게 나갔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아, 그거 내가 나가서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에~ 너 17살 쯤 밖에 안 되는 초립동이 어떻게 저 대장군하고 싸운단 말이냐? 너 어디 무엇을 잘못 먹었는가 보다. 어림없다!” 그런데 이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다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싸운다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양을 치다가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무리의 새끼를 물고 가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뒤에 따라가지고서 곰이나 사자를 찌르고 때리고 해서 그 새끼를 빼앗아 오고, 사자나 곰이 달려들으면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휘익 두른 그 물매에 사자나 곰이 맞아서 죽었습니다. 그는 그런 승리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화상이 그런 것으로 마음에 그림을 딱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나 곰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물맷돌 하나에 오케인데, 이 덩치만 컸지 저 고깃덩어리 골리앗을 뭐 두려워하느냐 아, 내가 나가겠으니깐!” 아쉬운 김에 사울 왕이 다른 사람들 다 못 나가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니깐 “그래 좋다 나가봐라. 너 내 옷을 입고 나가라.” 자기 갑옷을 입히고 착 칼을 차게 하니 줄줄줄줄 옷이 끌리니까, “아이고 이거이거 짊어지고 못 나가겠습니다.” 자기 목자의 도구에 돌 다섯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그 왜 다섯 개를 집어넣었냐면 골리앗의 형제가 다섯, 한꺼번에 다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거예요. 그래가 아주 포부도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데, 저 블레셋 군대 편에서 “이스라엘 싸울 용사를 내보내라!” 저 멀리서 올 줄 알고 바라봤는데 바로 곁에 와서 “내다! 여기 있다!” 아이고 블레셋 골리앗이 기절을 할 지경입니다. “야. 너 내가 개인 줄 알고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느냐? 내가 오늘 너 당장 죽여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겠다!” 그러니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하여 나오지만은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시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나오노라. 내가 오늘 야훼를 의지하고 너를 쳐서 공중의 새와 땅의 밥으로 만들터이니 나오라!” 그래서 물맷돌을 가지고 때리니깐 돌이 날라 가서 이마 요 중간에 때려가지고서 그 코를 깨고 머릿속에 들어가 버렸으니 안 뻗어질 수 있습니까? 넘어지는 것도 가서 골리앗의 칼로써 목을 베어서 그 머리채를 손에 들고 흔드니까는 그때야 이스라엘 군인들이 용기를 얻어가지고서 야!!하며 밀고 나갔습니다.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주를 믿은 여러분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여러분 보통 사람으로서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이 미리 여러분을 아시고 택해서 불러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여간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내 자화상을 가지고 늘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내 자화상이 든든해지면 나중에 원수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번에 기침 감기가 들리기만 하면 메르스 병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병이 항복하나.. 우리 교인들은 안 그런 사람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 병이 이렇게 끓는데 조심하라하니 “목사님 벌써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이겨내었는데 뭐 이것을 두려워합니까?” 오히려 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건 자기 자화상이 이미 승리자로서 자화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약하고 두려워 떨고 힘이 없고 보잘 것 없는 나라는 비뚤어진 자화상을 가져선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어려울 때 그 자화상을 의지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화상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죽음과 무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죽더라도 주님이 때가 이르러 데리러 오시는 거다’ 그런 담대함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 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여러분 뒤로 물러가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여러분 전인구원을 받아 이 세상에 살면서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여러분인 것입니다. <결론> 주님 안에서 슬픔을 극복한 선교사 한 사람, 저하고 굉장히 친했습니다. 이분도 이제는 천국 갔지만은 토레이 박사님이요. 신학자 토레이 박사님이 강원도에 와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12살 된 딸을 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 그는 자려고 하는데 가슴이 미어져 잘 수가 없습니다. 그 딸이 아빠하고 부르던 그 음성이 귀 끝에 쟁쟁하고, 온 집안이 다 묘지가 된 것 같습니다. 새벽까지 잠을 못 잔 것이 거의 매일입니다. 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얼굴도 볼 수 없고, 성장해가는 과정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하루는 침상에서 일어나서 한밤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산책을 나갔습니다. 가로등에 기대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영이 성령님을 따라 기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체험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이 내 마음속에서 우물처럼 샘솟아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힘으로 용솟음 쳤다. 내 인생에서 그때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성령이 막 용솟음 쳐 일생에서 가장 처음 그는 기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사람이 인조설교를 예배해서 인조기도를 하면은 아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조라는 것은 그림을 그려서 성령이 오는 것을 구경시켜준다고 성령이 오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인조예배를 보지 말고, 자연 그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며 의지하고 부르짖으면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또 성령이 화려한 향기를 부어줄 때도 있습니다. 죽음의 슬픔조차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토레이 박사가 체험하고, 이 세상에 어떠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라도 성령이 오면은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성령의 생명이 와서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존 데반 출판사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에 대한 몇 가지 조사를 해서 통계를 냈는데, 첫 번째 질문은 ‘성경이 당신에게 유익이 됩니까?’하는 응답자의 86%가 미국 사람의 86%가 성경이 복의 근원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로 ‘어려움을 당한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65%의 미국 사람들이 성경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믿음으로 세워진 나라인 미국 국민은 대다수가 성경을 복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 사람들이 강하고 미국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국민 과반수 이상이 성경을 믿고, 성경으로 어려움이 있으면 해답을 구하고, 믿음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습니다. 행복한 삶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불행이 마음에 있고, 행복도 마음에 있습니다. 두 진영에서 여러분 마음에 사무소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 여러분이 선택할지! 늘 싱글벙글 웃는 80대 할머니가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그 비결이 궁금해서 말을 붙였습니다. “할머니~”, “하하하하하하”, “요즘 건강하시죠?”, “아유 하하~건강하고 말고 하하하~그저 위암이 말기가 되어서 그렇지~” 그렇게 잘 웃고 한 할머니가 위암이 말기가 되어서 그렇지 다른 것은 다 좋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질문한 사람이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할머니!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데 행복합니까?” 그러니까는 “야 이 사람아, 내가 가난한 집에 딸로 태어나서 시집와서 80이 되도록 살면서 집도 마련했고, 자식을 다섯 명이나 얻었고, 그러고 지금은 암에 걸렸지만은 언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니 행복하고! 어디 행복 안한 것이 있나? 하하하” 이 할머니하고 상담을 한 이 목사님이 자기가 여태까지 목회한 것에 헛일한 것 같다고 느꼈다고, 그 할머님이 대신 섰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무엇인지 긍정적, 적극적으로 보니깐 그 할머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감사한 것, 고마운 것을 말하고 웃고 찬양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매일같이 비가 오는데 행복해요?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지만은 누구의 가슴에도 행복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음과 무의 절망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행복과 기쁨을 파괴하려는 원수의 무기를 제거해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죄책이요, 무의미요, 죽음의 절망입니다. 이와 같은 병적 존재를 수술해 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의 은총으로 행복과 기쁨의 삶을 주십니다. 죄도 예수님의 보혈로 매일매일 씻고 청산해요. 삶의 의미와 가치도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삶의 가치를 얻을 수 있게 되고, 죽음의 절망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죽음 저 건너편에 안심하고 건너갈 수 있으므로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의 은총으로 행복과 기쁨을 여러분께 주었었습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나가면 어디가도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