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요 3:16-21)

2015.11.15. 주일4부 예배

<서론>
오늘 저는 감사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을 추수가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됨을 기뻐하여 추석일을 정하고 국가적으로 즐거워합니다. 미국에서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적 감사절기로 삼아 온 국민이 잔치를 베풀어 기뻐합니다. 감사절에는 기쁨과 사랑과 감사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부모 형제 이웃 간에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즐거운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본론>
1. 사랑과 감사는 선물을 드림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왜 감사절 예배를 특별히 드리고 감사절을 손꼽아 기다리고 하는지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과 감사는 선물을 드림으로 표현이 됩니다. 선물이 없는 사랑과 감사의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을 의도적으로 줄 수 있어요. 아주 미워서 저거 오늘 콱 거꾸러져 죽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선물은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선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선물을 주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반드시 많이 사랑하면 많은 선물로써 사랑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지 아니하면 아무리 마음속에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말을 해도 그 거짓말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려면 얼마나 선물을 드리는가를 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사랑을 측량하실 때 사랑을 가지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선물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하든지간 그 선물을 드리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협박을 받아서 아들을 하나님께 내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랑을 측량하실 때 사랑의 마음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그것으로써 시험을 했는데 창세기 22장 1절로 2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저는 제가 주님을 믿고 성경을 처음 읽을 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야산에 가서 제사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하셨으니 마음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식인종들이 하는 일이 아니냐? 사람을 잡아 잡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어디 계시냐? 아브라함 대신 제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대꾸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장작을 걸머지라고 하시고 횃불 들고 종들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모리야산까지 가서 종들보고 “나는 아이와 함께 저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 올테니 여기 기다려라.”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장작 걸머지고 횃불 들고 그 다음 자기는 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아들이 “아버지, 여기에 번제를 드릴 뗏목 나무도 내가 걸머지고 가고, 불도 회에 붙여서 올라가는데, 아버지께서 제물을 잡아서 드리려고 칼도 잘 들도록 갈아서 오는데 하나 안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다. 제물은 무엇으로 드립니까?” 내가 아브라함이었으면 그 자리에 기절했습니다. 세상에, 100세에 낳은 아들을. 지금 초립동이 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데. 그 아들이 직접 관찰한 자기가 관찰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장작도 있고, 횃불도 있고, 여기 칼도 있고, 제물 드릴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제물이, 짐승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돌려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가서 형식적으로 제물을 드리고 오자.” 그렇게 거짓말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눈을 맞춰주고 “얘야, 제물은 하나님이 예비하신다.” 얼마나 간결하고도 정직한 말입니까? 뭐 여기서 온다. 저기서 온다. 그런 소리 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예비하신다. 아 그래요?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들과 함께 제단을 짓고 난 다음에 최후에 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고 그랬다. 그 아들의 그 아버지라고 이삭이 신앙이 돈독하지 않았었으면, “어 아버지? 어제 무엇을 잘못 잡쉈습니까? 노망하셨습니까? 나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나를 잡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아버지가 잘못 들었어요. 나는 아버지 따라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굿바이.” 그러고 튀어버리면 그 뿐입니다. 그런데 그 17살쯤 된 소년인 이삭이 아버지 하나님이 아버지께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순종해야지요. 묶으십시오. 팔 묶었습니다. 발목 묶었습니다. 번제물은 목에 대동맥을 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입을 막고 칼로서 대동맥에 갖다 댔는데 참, 내가 지금 간이 덜컥덜컥 뛰어요. 그때, 하늘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외독자 이삭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외독자 그 아들도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니 드리는 것 보니까 진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 증명되었다. 사랑이 증명되었다.” 사랑은 선물을 줌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 하고도 선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보니까 산 넝쿨에 산염소를 천사가 벌써 잡아서 머리를 풀에 엮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아들 대신에 그 산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고 내려왔습니다. 창세기 22장 9절로 12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야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사랑과 감사는 선물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히 계속 하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죽는 사람이 “야~ 내 숨이 넘어가기 전에 내 대학 졸업장 가져오너라, 내 상장 가져오너라, 다이아 반지 있는지 빨리 가져와 내가 보게 하라, 은행 통장 빨리 가져와.” 숨넘어가면서 그런 말을 한 사람도 없었고 그런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최후의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하나님, 이 두 분 중에 한분을 찾지, 세상에 있는 재물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겠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심정을 다하여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십시오.

2.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있는지 안 그런지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했다. 이처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이 주는 선물의 내용과 양이 하나님의 사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염소새끼를 주셨으니,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길거리에 흔히 굴러다니는 염소새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송아지 한 마리 주셨으니, 양 새끼 한 마리 주셨으니... 그러면 사랑은 사랑인데 그건 흔하고 쓸데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이 감사주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사랑에 대한 것을 다시 한 번 보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누구를 주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줄 것 다 주었어요. 하나님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셨다. 그러니 여러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로 사랑을 하시되 최고의 사랑을 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을 하나님은 아들과 맞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예수님을 사랑한 것만큼 사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입니다. 죄가 없고 불의도 없고 추악도 없고 저주도 받지 않고 하나님 그 자신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여러분과 맞바꾸어 쳤으니 가치가 동등하지 않습니까? 한번 따라 말씀 해 주세요 “하나님이 저를, 예수님처럼 사랑하신다. 안 어지럽소? 이런 말씀하니까 어지럽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수마귀가 마음대로 짓밟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도 마음대로 여러분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화상이 하나님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보통 귀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 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먼저 하나님께 나와서 제물을 드려야지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제물은 제물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습니다. 최고의 값비싼 것은 내 생명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먼저 사랑했다면 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이 몸이지만, 가치 없는 몸이지만, 내 생명을 드리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다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2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들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아들보다 값싼 것은 아무리 세상에 귀해도 아들하고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들을 하나님이 내어주셨으니까 아들보다 못한 것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왜? 너무 값비싼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휴지처럼 던져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파괴적인 세력이 와서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사랑을 끊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굳게 묶어놓았기 때문에 이 보혈이 가치가 없으면 될 수 있는데 우주를 다 돌아보아도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갚진 것이 없습니다. 그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를 묶어놓았으니 우리가 쉽게 버림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가치 없이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8장38절-39절)’ 안 끊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밧줄로 여러분을 묶어서 여러분을 잡고 있고 여러분이 또 하나님 아버지를 품고 있고 그 엄청난 힘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니까 풀어지지 않습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을 예수님 이 땅에 오시기 600-700년 전에 이사야에 예언해 놓았었습니다. 이런 구주가 세상에 온다고, 한 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느 부분, 여러분을 사랑하는지,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허물이 많습니다. 허물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원죄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핏줄로 받은 원죄도 예수님이 걸머지시고 (어, 그다음은) 무질서하게 잘못 살아온 것을 징계로 다 채찍으로 예수님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이 채찍으로 맞아서 흐르는 피에 청산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린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거역하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는데 그것을 청산한 것입니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더 이상 안 냅니다. 예수를 믿고 나오면. 그러고 하는 것마다 안 되는 일, 저주를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신앙 자체가 그렇게 호락호락 들어왔다 나갔다 하지 못합니다. 저주가 일단 오면 아브라함의 축복이 따라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다 백만장자는 되지 않을지라도 예수 믿으면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가 부르짖습니다.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데 예수님 보혈이 같이 따라 일을 하시면서 부르짓습니다. 아담 조상의 저주가 다 사라졌다. 나를 의지하라. 나는 너희를 번창케 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참 할렐루야.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도 잘되고 범사도 잘되고 강건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널리 펴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추수감사 절기를 꼭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될 것입니다.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마라. 성경에 그렇게 성령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 나오지 마라. 여러분도 귀한 손님 대접하실 때 빈손 들고 하지 않지 않습니까? 요사이는 뇌물로 너무 먹어서 국가재정에 파탄이 나오게 하는 것이 그건 나쁜 일이지만 부정부패가 아닌 자기의 정성으로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3대 절기가 나오는데,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430년 동안 했는데, 거기에서 해방된 날짜를 유월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들 집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보따리 꾸려 걸머지고 애굽을 나온 것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았습니다. 농사도 안 되고, 목축도 못하고, 고스란히 굶어죽을 곳에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가 비와 같이 쏟아졌어요. 쏴아~ 쏟아졌어요. 우리도 그 만나 좀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쏴아~ 그 다음에 고기가 필요하면 주기적으로 메추라기가 날아와요. 메추라기가 날아가지고서 땅에 나지막이 떠서 팔랑팔랑하고 날 잡으세요. 날 잡으세요. 바위에서 물이 나오고... 그것이 하루 이틀에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허덕일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습니다. 그것을 초막절이라고 말합니다. 초막절에 절기를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칠칠절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데 저주를 다 제하고 아주 풍년이요 좋은 수확을 하게 되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확을 거두어서 그 단을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손 들고 야훼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6절로 17절에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택하신 곳에서 야훼를 뵈옵되 빈손으로 야훼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헌물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3.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선물로 표시 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고, 우리도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창세기 29장 18절로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그 당시에 자기 외삼촌 되는 라반의 집에 야곱이 형을 피해서 도망을 쳐서 그 어머니의 친정집인 라반 집에 가서 숙식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이 아주 예쁜 딸 둘이 있었어요. 레아라는 딸은 맏딸이고, 라헬은 둘째 딸인데, 사람이 다 자기 보기에 다르겠지만 야곱이 보니까 이 라헬이 안력이 좀 약해서 그렇지.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처녀거든. 그래서 삼촌보고 그 나라 습관은 마누라를 데려오려면 7년 동안 서비스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 집에. “내가 7년 동안 일을 할 테니까 당신의 딸 라헬을 내 아내로 주십시오.” “아 나이도 먹고 내 딸도 잘 자랐으니 조카에게 딸 주는 것은 다른데 주는 것보다 좋다. 7년 동안 나에게 봉사하고 일하겠느냐?” “네 일하겠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하고 밤에 둘이를 서로 동침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는 오늘 같이 전깃불이 없었어요. 캄캄한 밤에 더듬어 코나 잡힐까.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라헬이 아니고 레아입니다. 언니예요. 아이고,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나를 속여도 분수가 있지. 7년 계약을 맺고 난 다음에 언니를 나에게 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까, “아이, 자~ 자네 조용히 해. 떠들지 마. 떠들지 마. 우리나라 습관에 동생 아무리 좋아도 동생을 언니보다 앞세울 수 없다네. 내 동생도 줄 테니까 자 조용히 해라.” 그럼 동생을 위해서 또 7년 동안 일을 해야 돼요. 그 외삼촌이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훗날, 조금 훗날에 얼룩덜룩이 나무를 가지고서 얼룩덜룩이 새끼만 놓으면 네 것이 되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으면 야곱은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삼촌이 아주 무시무시한 삼촌이에요. 그래서 라헬하고 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야곱이 라헬을 좋아했던지, 외삼촌, 라헬을 위해서 내가 7년 동안 또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자식 속도 없는 놈. 7년 동안 공짜로 해주겠다는 거. 너무 라헬을 좋아해가지고서.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에. 뭘 줄꼬. 정신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삼촌이 “그래그래.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더 일을 해라.” 그런데 야곱이 라헬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아내로 사기 위해서 7년 동안 더 일을 하기로 했는데 7년이 내게는 7시간 밖에 안 된다.” 너무 좋아서 7년이 7시간 밖에 안 될 정도로. 7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붙였지. 아주 잠깐 지나는 시간과 같더라는. 그러므로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데. 라헬을 위해서 7년을 서비스를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목숨을 다해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빈손 든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목사가 빙빙 돌아 말로써 신앙상담하고 안수 받으러 올 때는 돈 가지고 오너라 하더라. 그건 아니고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께 빈손들고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빈손 든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 동네에 이름난 죄지은 여잔데,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어요. 죄지은 여자가 향을 담은 귀한 그릇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채로서 발을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옥합을 깨뜨려가지고서 그 기름을 예수님 발에 다 부으니 기름 냄새가 집안에 꽉 들어찼습니다. 가롯유다가 “이 무슨 낭비뇨? 이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름 값이 요사이로 계산하면 한 2,000만원 되는 것입니다. 한 2,000만원 되는 기름을 발에 부었으니까는.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만 두어라. 너희는 발 씻을 물도 안 주었는데, 2,000만원이나 되는 향료로 내 발을 씻지 않느냐? 이는 용서받은 것이 많으므로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이 여자가 한 행동은 온 천하에 복음이 증거 되는데 나에 대한 말씀을 할 때 꼭 인용될 것이다.” 사람이 너무나 큰 사랑을 하게 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정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난한 과부가 겨우 두 렙돈 헌금을 가지고 와서 연보함에 돈을 넣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1장 3절-4절)’ 자기가 가난한 중에서 넣는 그 제물은 큰 제물이었습니다.

<결론>
감사절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려야만 합니다. 감사와 사랑은 반드시 물질로 증명 돼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가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조용기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사 돈 만원 드렸다. 만 원짜리 인생밖에 못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증거가 독생자 예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들 이삭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정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가지고 기도를 해야지, 사랑하는 증거가 없이 내내 달라고만 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기에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부르면서 입술로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의 뜻을 따라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선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게 참 믿음이 되고 하나님이 열린 문으로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