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 인
(눅 10:29-37)

2015.12.13. 주일4부예배

<서론>
오늘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을 했습니다. 개놈들.. 그렇게 취급을 했는데, 사마리아인이 왜 그렇게 됐느냐면 유대인은 바빌론, 앗수르 강대국가의 포로가 되어서 민족적으로 그 나라에 끌려가서 살다가 고향산천에 되돌아오고 했는데,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에 가서 있을 때 피가 순수하지 못하고 섞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피가 이방인의 피와 섞여서 태어났어요. 어머니가 이방인이라든지, 아버지가 이방인이라든지 한 편이 유대인이 아니게 태어나서 유대사회에 들어오려고 하니까는 유대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순수하지 않은 더러운 피를 가진 사람들은 개 취급을 하고 안 받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목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인이고 그런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물었고,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걸 율법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그렇게 살아라.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이웃이 누굽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이웃이 누구인 것을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웃이 누군가를 주님께서 대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누가복음10장30절)’ 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데 강도가 많으냐하면, 여리고 평지는 물기가 충분히 있어 비가 많이 오고 땅이 비옥해서 많은 양식을 산출합니다. 그럼 그 양식을 그들이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가서 그것을 전부 파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사마리아인은 돈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강도가 많이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물건을 다 팔고 난 다음에 돈을 허리춤에 묶으고, 포켓에 넣고,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자기 고향 땅으로 내려오는데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나 안 죽을 만큼 얻어맞고, 옷 다 빨가벗기고, 돈은 다 뺏겼습니다. 그런데 “사람 살려!”라고 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사장이 거기를 가다가 이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고 도와줄 생각을 안 하고 ,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단단히 보고 다니지 왜 저 모양이냐? 쯧쯧쯧” 그러고 지나가 버립니다. 제사장이 도와줄 줄 알고 고함을 쳤는데, 제사장은 유대종교의 수행자인데 그냥 지나가 버려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총총 걸음을 하고 그 길로 옵니다. 레위인은 의식주의자인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초하루날이다, 보름이다, 무엇을 먹어야 된다, 무슨 옷을 입어야 된다..’ 이런 형식과 의식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레위인도 보더니만 “아유 많이 얻어맞았군. 쯧쯧. 요사이에는 정신을 차리고 다니지 아니하고 정신없이 걸어가다가 저렇게 강도 맞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불쌍하다. 난 바빠서 도와줄 수 없구나.”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이제 죽게 됐습니다. 제사장도 피해서 가버리고, 레위인도 피해서 가버리고. 제사의식을 드리는 율법도 지나가고, 의식과 형식을 주장하는 의식적인 종교도 도움 없이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거리로 말을 타고 오다가 “아유 큰일 났구나. 여기 사람 생명이 죽게 됐구나.” 말에서 내려서 그 당시에 여행하는 사람이 물로써 포도주를 마시고, 그 다음 기름을 피부에 바릅니다. 굉장히 사막이 뜨겁고 고달프니까 기름을 발라 유하게 하고, 포도주를 목마르니 마시고 하는데, 아니 이 사람이 자기도 사막을 여행을 하니깐 그런 것이 있단 말입니다.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에게 상처 입은 데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포도주는 알코올성이 있기 때문에 균을 죽여서 곪지 않게 만들어 주고, 그 다음에는 기름을 부어가지고서 상처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자기 옷을 붕대로 만들 것은 옷 밖에 없습니다. 우리같이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붕대를 못 만들었지요. 두루마기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두루마기 쫙 찢어가지고서 아픈데 착착착착 감아서, 그 다음에는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아~이리 가시오.” 말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막집에 가서 이 사람을 내려서 방 하나를 빌려가지고서 먹을 것을 먹이고, 주인을 불러서 “이 사람 이 주막에서 입원을 했으니 치료해 주십시오. 두 데나리온 선불금으로 주고, 그 다음 내가 사업을 하고 돌아올 때 또 다시 들릴 테니까 이 사람이 그때 비용이 더 나오면 내가 비용을 갚아주겠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 보고 말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참된 이웃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피하여 가버린 제사장, 피해 가버린 레위인이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이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론>
1. 사랑과 율법
율법이 무엇이 율법이냐. 사랑이 없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법으로서 사람을 돌보면 안 잡힐 사람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큰 집회를 할 때,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보라”고 그러니까는 한 30대 되는 청년이 손을 착 들고 일어나요. ‘야~ 놀라운 분이 계시는구나.’ “나는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옆에 젊은 부인이 앉아가, 툭~툭. 보니깐 정신 이상이 된 사람 고치려고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날 배운 것은 정신이상자만이 자기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먼지와 티끌같이 세상에 죄가 없는 데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신다(요한일서1장9절)’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주셨으므로 그 보혈을 의지해서 영원히 용서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죄를 또 우리 몸에 붙으면 회개하고, 죄를 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에 보면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 제사장은 율법을 집행하는 사람인데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는 율법은 도와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모세가 율법을 받았지만은 율법은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죄지을 때 지적해서 벌을 받게 하는 것이지 사랑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은혜와 진리를 주십니다. 은혜는 사랑의 실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로 25절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라디아서 3장 23절)’ 이 세계를 우리가 따지면 아담, 하와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그때는 어떤 마음의 태도로 살았냐면 천진난만하다. 천진난만해. 죄가 뭔지도 모르고,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율법과 은혜가 무언지도 모를 천진난만이다. 그러나 그가 마귀의 꾐으로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양심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면 고통을 당하고, 양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양심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율법시대가 왔지요. 율법,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계명으로 사람을 벌 주는 것입니다. 그 율법시대가 언제 지나갔는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율법 산하에서 지은 모든 죄를 다 청산해버렸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죄가 상관이 없는데 “이 사람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람은 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고, “아닙니다. 내가 대신 죽었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저 사람 살인죄 지은 거 내가 대신 갚았는데 이 사람은 벌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소리로 “회개해, 끊임없이 회개해. 죗값은 내가 갚았으니까.”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 아닙니다. 은혜에요. 은혜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2장8절~9절)’ 크리스마스 선물 주듯이 오늘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으면 보혈이 값없이 우리를 씻어서 구원해주시고 천국에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고 당당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지 평생에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가 의로움인 것입니다. 평생에 한 번도 (죄) 안 지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 앞에 보통 사람은 부끄러워서 설 수 없는데 예수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 부끄러움이 없어요. 그러는 의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갈라디아서 3장 23절로 25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다’ 율법 밑에 있는 것은 초등학교 선생 앞에 있는 거와 같아요. “그 율법을 어기면 너 죄야!”하고 꾸짐을 받을 때 졸업하고,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예수님 반에 들어 왔습니다.”하고, 초등학교 율법교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들에게 채찍을 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의식주의적인 종교는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어떤 기구를 문간에 차려놓아야 된다, 몸에 무슨 부적을 가지고 다녀야 된다, 특별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러한 의식과 형식주의를 통해서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2절에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레위인이 의식주의를 주장하는 레위인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 14절로 16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와 권세를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이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을 음식을 먹어야 된다, 이런 물을 마셔야 된다, 이 절기는 지켜서 이 날은 아무것도 일하지 말고 있어야 된다, 오늘은 초하루다, 초하루 제사를 지내야 된다, 안식일 제사도 드려야 된다. 온갖 의식과 형식을 다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종교인데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주의나 의식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 인, 예수
여기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기름과 포도주와 붕대를 가지고 우리 주위에 와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전혀 의미를 모르고 교회 가서 목사가 설교해도 자꾸 꾸벅꾸벅 잠을 자면서 ‘아 이거 빨리 안 그치나. 아~지루하게. 억수로 길게 하네.’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안 계시니깐. 그러나 성령이 속에 계시면 마음은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어도 속에 성령이 ‘아멘,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자꾸 말씀에 동조를 하고 아멘, 할렐루야를 하니 잠잘 수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고 말씀이 마음에 달아요.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달고 들어도 들어도 피곤치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사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매력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끌어당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은 기가 막힌 천국의 매력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매력이 있어 여러분이 말씀을 증거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받고,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이 말은 성령이 여러분 속에 성전삼고 거한다. 이 성령이 항상 여러분에게 기름부음이 되시고, 포도주가 되시고, 또 위로와 보호가 되시고, 여러분 혼자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항상 너희와 같이 있겠다(요한복음14장16절)’ 예수님이 ‘나는 처음 보혜사요 성령은 다른 보혜사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함께 계신 자.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눈에 안 보이지만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같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속에 성령이 있으면서 ‘내 말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할 때도 먼저 성령님을 부르십시오. “성령님 기도합니다. 성령님 내게 기름 부어주시고 도와주셔서 기도를 올바르게 하고 잘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고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께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이여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을 밝혀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고 읽으면 번쩍번쩍하고 깨달아 진단 말입니다. 성령이 같이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어려운 문제를 당해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선생이 여러분 속에 계시므로 “보혜사 성령이여 무슨 말인지 대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대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보다도 확실히 여러분이 다른 것은 성령이 보혜사로서 여러분 속에 와서 같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든 사람 마음속에 성령이 ‘내가 여기 있다. 나를 의지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선생님을 모시고 인생을 사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는 보혈로 우리를 덮어주니까 피는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7편 3절에도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이 상처를 싸매는도다’ 우리 마음을 싸매어주고, 고쳐주고, 돌보아주고,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3. 세상에 있는 주막 교회
여러분 해외여행을 간 사람들 요사이에 호텔에 들어갑니다. 옛날에 호텔이 뭔지도 몰랐는데 요새는 예루살렘 관광을 갈 때라도 관광회사에서 모집해가지고서 여러분 호텔로 배송을 시켜주는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도 그 당시엔 호텔입니다. 요새 우리 우리말로 말하면 주막교회입니다. 여기에 여러분 앉아있는 이곳이 호텔이에요. 천국호텔이라고. 천국호텔 주막교회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교회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첫째 일이 치료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침과 동시에 치료를 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천국주막교회인 이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모든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복음 전한다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죄 용서와 병 고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목마른 자에게 말씀의 생수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쳐서 씩씩한 사람으로 일어서게 만들어주면 주님께서 그 수고에 대해서 반드시 상급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확실히 모르는 것은 주님이 무엇을 확실히 행하시느냐.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확실하지요? 이거는 눈 감고도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확신한 것이 뭐냐. 병 고치는 것입니다. 교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병이 나아야 돼요.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가죽을 벗김을 당하고 얻어맞았는데, 그 다음이 저주에서 해방이 되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입술의 말로써 씨앗이 심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을 하는 것은 씨앗을 심는 것을 말합니다. 죄 사함에 대해서 말하면 용서와 의를 여러분 주위에 심는 것이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는 치료를 말하면 치료의 씨앗을 심은 것이고, 십일조를 드리고 주님이 아브라함의 복을 주신다고 말을 하면 축복을 심은 것입니다. 말을 해야 돼요, 말. 말이 죄 사함이 여러분께 다가오는 길목이 되고, 말이 치료가 되고, 말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입 딱 다물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혼자 걸어 다니면 궁시렁~궁시렁~궁시렁 잔소리를 자꾸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의롭고, 용서(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날 고쳤어요. 잔소리 말고 너 이 병은 물러가라! 난 나았다. 주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내게 주셨으니 난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요, 축복 받은 사람이다. 어떻게 됐든지 난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그 말이 밖에 나가서 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지!

<결론>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성경에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오병이어로 먹여주셨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관을 걸머지고 가면서 통곡을 하고 울고 있는 그 과부여인에게 주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청년아 일어나라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시고, 먹이시고, 죽음에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쌍하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치료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쌍하니까. 한번 따라서 말씀해주십시오. “불쌍하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보다 더 가깝다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웃사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옆집에서 조금만 큰소리를 내어도 시끄럽다고 경찰서에 신고해서 경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계층 간에 소음으로 시끄럽다고 싸움이 붙어가지고서 칼을 들고 와서 휘둘러서 칼에 찔린 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웃에 누가 죽었어도 누가 죽은지도 모릅니다. 고독사(孤獨死)라고해서 혼자 죽었어요. 죽은 지 한 달 만에 죽은 시체를 발견할 정도로 이 이웃과 담을 쌓고 너무나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선한 이웃이 사라져 가는 사회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선한 이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따지지 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은 다 우리 이웃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은 우리 지구상에서 사는 우리 형제요, 우리 이웃인 것을 알고 우리가 돌봐주어야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