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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사랑 (고전 13:1-13) 2015.12.27. 주일4부예배 <서론> 오늘은 “율법과 사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폭풍이 불어 닥치면 가로수도 뽑힙니다. 정원수는 말할 필요 없이 뿌리채 뽑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밤에 바람이 불고 야단을 쳤지만은 앞동산에 그 많은 나무가 까딱없이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산에서 자란 나무는 흙 밑에서 서로 뿌리가 껴안고 서로 붙잡아주기 때문에 폭풍우를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정원에 있는 나무는 고독하게 혼자 고고히 ‘날 좀 보소~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그런데 바람이 부니까는 볼 일도 없이 뿌리 채 뽑혀버리지요. 그러나 산에 있는 수풀은 흙 밑에 서로 뿌리를 내어서 끌어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끌어 안고 있어. 저리 바람이 많이 불면 여기서 더 힘을 보태어주고, 그래서 서로 사랑의 뿌리로 밀어주고 땡겨주고 하기 때문에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관용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는 사랑이 없는 율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발이 빠른 사람은 원수 앞에서 도망을 치는데 발이 빠르니까 백 보를 뛰었어요. 그러나 발이 빠르지 못한 같이 있던 형제는 백 보를 못 따르고 오십 보 밖에 못 따라 갔습니다. 그래 원수에게 피하고 난 다음에 오십 보 짜리가 백 보 짜리를 보고 비웃습니다. “야 저기 겁쟁이야. 뭘 백 보나 달아나? 나처럼 오십 보 달아났으면 되지.” 그 오십 보 달아난 것은 그가 용감해서 달아난 것이 아니라 뛰지 못해서 오십 보 달아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인 것입니다. 돌멩이를 물에 던져 보십시오. 작은 돌멩이는 ‘퐁당~’하고서 물에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큰 돌멩이를 던지면 ‘풍~덩’ 그렇게 하고 그 즉시 물에 가라앉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물에 가라앉기는 똑같습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한 가지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이 있고, 다른 죄인은 자기가 죄를 짓고도 죄인인 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이 세상은 비난의 소리로 가득하여 모두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적은 죄인이다. 나는 너보다 많은 죄를 짓지 않았다.” 그렇게 율법을 가지고서 자기와 이웃을 비교하고 평론하면 너도 나도 다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죄는 그 질에 있어서 나쁘고 좋은 차이는 좀 있을지는 몰라도 죄인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격은 똑같은 것입니다. <본론> 1.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향해서 그렇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많이 사용하는 율법과 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성경에 있습니다. 바리새교인과 사두개교인들이 한 여자를 머리채를 휘감아 끌고 성전으로 오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놓고 주님께 묻는 말이 “주여, 이 여자가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써 쳐 죽이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리이까? 율법으로써 그 여자를 판단하여 돌에 맞아 죽으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 글자를 쓰셨습니다. 요사이 아스팔트 같으면 주님 손가락이 닳아도 글이 안 써지겠지요? 그때는 보들보들한 모래에 그리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글을 쓸 수 있는데, 예수님이 글을 쓰는데 어깨너머로 전부 다 보았습니다. 무슨 글을 썼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손에 돌을 들고 이 여자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 여자는 불안과 공포에 산지사방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적었습니까? 예수님이 손가락이 글을 쓰자마자 한 사람, 두 사람 돌을 두고서 돌아 달아났습니다. 나중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정죄 받은 그 여자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죄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이 그들이 돌에 맞아 죽을 만한 지은 죄를 전부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이 글을 적는 걸 보면 자기들이 감추어놓은 죄악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돌로 쳤다가는 그 다음에는 자기가 돌 맞아야 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다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보니까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 주여” 하면서 “아무도 없는데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돌아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고 살아라.” 그것이 율법과 사랑의 비교인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서 있는 법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사랑을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이고, 율법은 사망입니다. 율법이 엄히 시행되는 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한 집안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엄청나게 무섭게 율법적으로 행하면은 애들이 기가 죽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집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면 생명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노라(요한복음10장10절)” 율법은 도적입니다. 그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유대민족을 다스렸습니다만, 율법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내가 다 이루었다.”하실 때,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 율법의 정죄를 벗어버릴 수 있는 건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밑에 엎드리면 큰 죄인이나 적은 죄인이나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 너는 용서 받았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 짓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항상 용서와 사랑이 따르는 것입니다. 율법의 곁에 있으면 항상 정죄와 죽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5장 25절로 30절에 보면 탕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아들을 키웠는데 그 둘째가 자기 몫의 속한 재산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을 해서 그 재산을 가지고 도시 속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완전히 거지가 됐습니다. 의지할 데가 없어서 도시에 어느 사업가에게 의뢰했더니 돼지 치는데를 보냈는데, 유대인들은 돼지가 제일 천한 짐승으로 봅니다. 돼지를 쳐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월급을 주려고 하면 그것도 못 되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같이 나눠먹고 사는 형편에, 그는 자기의 비천함을 느끼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께 돌아오니깐 아버지가 뛰어나와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이 자식아. 잘 왔다 잘와! 그래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그렇게 되지 않느냐? 얘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아들이 된 표적인 반지를 끼워 줘라. 그러고 주인만 신는 신발을 신기어라. 떼 중에 가서 제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도로 찾았으니 즐거워하자!” 그것은 바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이 밭에서 일하다가 늦게 돌아왔는데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풍악이 울리고 굉장합니다. 그래 종을 불러서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신 아버지가, 당신 동생이 몸 성히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었나이다.”, “이놈의 더러운 녀석! 이 자식이 왔다고 아버지가 저렇게? 아버지 좀 나오라고 해라.” 그래서 아버지가 나오니까 딱 버티고 서서 “아버지 나는 안 들어 갑니다. 자식하고 잘 사세요. 나는 아버지를 거역치 아니하고 충실하게 법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내 동생은 방탕하여 있는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돌아와도 그렇게 좋아합니까?” 그러니까는 아버지가 “얘야, 너는 나하고 같이 있으니깐 이 재산이 다 네 것이다. 내가 다 너에게 줄 생각이다. 그런데 네 동생은 아직 비천한 것이 세상에 나가서 안 죽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들어와서 같이 즐기자.”, “나는 그런 더러운 죄인하고는 같이 안 합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안 들어갑니다.” 그 형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표시하냐면 율법입니다. ‘율법대로 행하지 않은 자하고는 나는 관계하지 않겠다.’ 사랑이 아무리 권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게 들어가는 곳에 생명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율법은 생명이 없고, 행복이 없고, 심판과 사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나 율법은 걸리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사랑제일주의로 나아갔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엔 생명이 있고, 넘치는 은혜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 ‘비난 게임’이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벤 대트너 박사는 수많은 기업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했는데, 조직을 와해시키는 최악의 문제들은 모두 비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임 회피와 남 탓하기가 팽배한 조직은 그것이 국가든 회사든 비영리단체든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에너지와 시간의 낭비, 인력의 이탈이 일어나 결국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리학 연구결과를 토대로 ‘인간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비난을 돌리는 것은 우리 유전자에게 새겨져있는 본성’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난하는 본능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릴라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장난감이 망가지자 고릴라가 수화로 직원을 가리키면서 “이건 저 놈이 모가지를 잘랐지 내가 자르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트너 박사는 “이러한 비난 게임에 승자가 없으며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난 게임의 승리자는(비난 게임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게임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승리자가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서로 비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하와보고 “네가 어찌하여 네 남편을 꾀어가지고서 선악과를 먹게 했느냐”, “아니요. 저 사탄이 나를 꾐으로 내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먹었습니다.” 사탄은 그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변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의 피 속에는 율법과 비난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서로 쳐다보면 “너 때문에 내가 이 꼬락서니가 났다.” 남편은 “아내가 잘못해서 집안이 이 꼬라지가 났다.” 아내는 “남편 때문에 이 모양이 됐다.” 부모는 “자식 복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자식은 “부모가 안 돌봐주어서 이렇게 됐다.”, “국회의원이 나빠서 이 모양이 됐다. 장관이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대통령이 잘못해서 이래 되었다. 여자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잘못 되었다.” 사람들은 있는 듯 꼭 ‘남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자기가 책임을 걸머지지 않습니다. 그러고 쥐꼬리만한 율법을 가지고서 전부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행복해지는데 진실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얼굴에 큰 율법 간판을 들고 율법으로써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기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사랑을 주어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인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단체나 교회나 갈라져서 정죄하고 심판하고 물어 찢는 것은 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러한 단체는 기어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5절에 보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해라’ 비난은 또다시 다른 비난을 낳고,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파멸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비난 게임을 하면 비난해서 이긴 사람도 없고 진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망한다는 것입니다. 2. 사랑은 함께, 율법은 혼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면 친구가 많아집니다. 율법으로 나아가면 혼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서로 붙잡아 주는 삶이 사랑이요, 율법은 이웃을 심판하고 멀리하여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기독교 신앙은 뭡니까? 사랑하기 위한 신앙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율법을 들고 나와서 정죄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나니라’ 율법은 들고 나오면 그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면 전부 다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전부 다 죄인입니다. 너도 죄인, 너도 죄인, 너도 죄인,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면 “아유 저건 죄 아니다.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저거 가지고서 정죄할 수가 없다. 왜? 내가 이미 저 죗값을 이미 청산하고 왔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다 보고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도 없이 책임을 지고 십자가를 걸머지셨기 때문에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용기와 힘이 생기고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기고 생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러 왔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니 그러나 나는 그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꿈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제가 조금 전에 말한 가로수나 정원에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산에서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잘 쓰러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서로 껴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거센 풍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뿌리가 서로 엉켜서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휘청거리고 너 나 없이 먹고 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숲의 나무들처럼 서로서로 끌어안고 붙들어주면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3. 예수님과 사랑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여러분 언제나 율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1절로 24절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율법이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어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상당히 해석하기 어렵게 기록되었습니다만, 다른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율법 하에 태어나서 삽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는 것이 율법이요, 듣는 것이 율법이요, 행하는 것이 율법이요, 삶 전체가 율법에 갇혀 있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저 놈 죄지었다”, 말하는 걸 들어도 “저 놈 죄지었다.”, 그 다음 가는 곳을 보고도 “죄 지으러 간다.” 모든 것이 죄 똘똘 뭉쳐서 묶어 놓아진 것입니다. 왜 그래 놓았느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내 놓은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도리가 없어요. 눈으로 보아도 구원 못 받고, 귀로 들어도 못 받고, 손으로 붙잡아도 구원 못 받습니다. 모두 정죄를 받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세요. “율법은 정죄한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모든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한 이유는 올 때, 갈 때 없게 만들어서 예수님만이 사는 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기역, 니은을 가르치듯이 율법의 정죄함을 모든 사람에게 다 알게, “다른 종교에 의지해서 구원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와 사랑과 구원이 있으니 예수께로 가자.”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께로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 율법 하에서 정죄를 받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사랑이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행복을 주시고 삶의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은 서로 다른 길이의 수십 개 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 관이 크고 작은 게 이루어져서 함께 소리를 내니깐 웅장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이외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없지요. 분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같은 말을 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세상에 내고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지요? 기후가 추워지면 철새들은 저 북쪽으로 날아갑니다. 북쪽으로 올라갈 때, 기러기들이 자기 혼자 날아가지 않습니다. V자형을 만들어 가요. 내가 기러기면, 여러분이 기러기면 내가 대장 기러기입니다. 왜 대장 기러기가 있어야 되냐면, 대장 기러기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므로 날개를 치면 바람이 위로 올라가죠 뒤에. 확~날개를 치면 바람이 위로, 그럼 약한 것이 그 강한 기러기 뒤에 딱 붙어 있으니깐 상승하는 기류를 받아 별로 힘 안 들이고 날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러기가 날아가면 꼭 꽥~꽥~꽥~소리를 냅니다. 그 왜냐하면, 앞에 먼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힘을 더 내줘요! 힘을 더 내줘요! 빨리, 빨리 힘을 내!” 서로 격려하면서 V자형으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로 말한 것인데, 신앙도 혼자서 예수를 믿으면 참 힘들 때가 많습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외로울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병들었을 때 혼자서 이겨나가려 하면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 신앙의 친구가 있어서 서로 합쳐서 꽥~꽥~ 하면서 힘을 합쳐서 기도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야 멀리 걸어가고, 함께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함께 해결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지치지 않고 멀리멀리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려면 서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사랑을 통해서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 붙들어주고 밀어주고 끌어안으면 멀리가고, 잘 가고,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야산에 있는 나무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폭풍우가 다가오면 다 뿔뿔이 헤어지고, 정죄하고, 나만 살겠다고 떠나고 마는데 산에 있는 나무들은 힘차게 뿌리를 뽑아서 서로 뿌리끼리 끌어안고, 너 죽고 나 죽고 죽어도 같이 죽지, 살아도 같이 살고. 그러니 아무리 바람이 와서 불어재껴도 끄덕도 없어요. 그러나 수려한 가로수, 정원수들은 그냥 뽑혀서 날아가는 것입니다. 경관이 좋게 하기 위해서 심어놓은 나무들은 경관을 위한 나무들이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랑의 뿌리를 내어서 서로 붙잡아주어야 역경을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멀고 험한 인생길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함께 걸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길도 사랑으로써 서로 격려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주님이시므로 사랑의 주님인 것입니다. 사랑밖에 살리는 힘이 없습니다. 율법 하에서 우리들 지은 죄를 예수님이 다 사랑으로 갚아버리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절대 의를 주님이 입혀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 받으면 예수님은 이미 그 사람의 죄를 다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절대적인 의를 옷으로 받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사람을 죽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나 윤리나 도덕이나 사랑을 빼버리면 의식과 형식에 불과하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센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어서 값 주고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가르치실 때,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일 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이 안식일날 등허리가 굽어진 여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분노하고, 눈을 휘둥거리면서 율법에 의해서 맞아죽어야 할 짓을 하고 있다고, 어디 안식일날 일을 하느냐고 그러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하는 의미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너는 안식일이라고 해서 소나 말이나 양이나 우리에서 끄집어내어 와서 물마시지 않느냐? 안식일이라고 물도 안 마시고 목말라 죽게 하겠느냐? 소와 말이나 돼지나 이런 것들을 끌고 나와서 물을 마시는데, 이 여자 짐승보다 귀하지 않느냐. 18년 동안 꼬부라져서 마귀에게 짓눌려서 고생을 당하는데 그것을 안식일날 고쳐주는 일을 했다고 해서 노발대발하느냐.” 이 여자 보고 “이리오라, 이리오라. 나을지어다!” 허리가 척 (나아버렸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은 어떠한 제도나 율법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살리러 왔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율법이나 제도라도 제껴버리고(젖혀버리고) 나와야 된다. 여러분 오늘 예배하러 오는데 머리카락 안 만졌다고 해서 “너는 오늘 교회 못 온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 “너 립스틱을 좀 진하게 해야 교회 올 수 있지, 립스틱을 이렇게 칠하지 안 하고 오면 올 수 없다.” 그런 것이 있습니까? 어떠한 조건을 세워놓아도 예수님은 생명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 제쳐놓고 들어와서 사람을 살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발가벗고 6시간 동안 매달려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 여러분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허물을 청산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저주를 제하시고,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길이요, 그분이 바로 진리요, 그분이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딜 가나 여러분과 나를 살리기 위해서 계신 것입니다. <결론> 사랑이 없는 율법은 서로 간에 하나됨이 아니라, 분열을 하고 파멸을 가져옵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시든 풀과 같이 생명력이 위축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사랑하며 살아나가십시다. 이 시대 한국의 지성으로서 불리는 위대한 교수가 계십니다. 그 어른 성명은 ‘이어령 교수’인데, “우리는 사회를 천리마를 죽이는 사회라고 말한다”고 그가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천리마가 천리를 뛰도록 응원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천리마에 짐을 지우고 그 무게에 짓눌려 죽게 하는 것이 한국사회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한국사회에 천리마들이 많이 생겨나야 세계적인 나라가 되고, 세계적인 국가가 될 수 있는데, 우리 한국사회는 천리마가 되어 오면 박수를 치고 더 잘 뛰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비틀어 놓고, 목을 비틀어 놓고, 뼈를 어긋나게 하고, 천리마가 못 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민족만큼 시기와 질투가 많은 나라 없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저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말 한 마디를 하는데, 50년을 목회하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으로서 지나온 세월을 깊이 생각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도 거짓말로 옷을 벗기고, 짓밟고, 멍들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는 것이 진저리가 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 기도를 여러 번 했었는데, “하나님.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겠으니까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는 상처를 입힐 수가 없으니 주님께서 데리고 가시든지 주님께서 처리를 하시든지 하십시오.” 이제는 세계적으로 많은 모임이 있는 곳에 와서 백 만이 모이는 군중들을 리드해 달라는 초청이 와 있어도 거부했습니다. 이제는 겁이 나서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든지 조금 집회를 잘하고 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죄와 심판이요, 손가락질이요.. 못 견디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욕을 얻어먹지 않지만, 뭘 하면 고통 속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시편 37편 1절로 6절의 말씀을 제게 주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야훼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며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러면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잠언서 22장 8절에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을 뿌리면 악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오늘 심은 것이 우리의 내일이 되며,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심는가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속 빙점’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일생을 마친 다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준 것이다. 악착스레 모은 돈이나 재산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남지 않지만, 숨은 적선, 진실한 충고, 따뜻한 격려의 말 같은 것은 언제까지 남는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말씀하였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 놓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남겨 놓는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사랑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겠다(마태복음24장12절)’고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식어가는 세대일수록, 더욱 열심히 사랑하기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여행 중에 주막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떠나려고 하는데, 주막에 있던 주막집 어린 딸이 톨스토이의 빨간 가방이 가지고 싶어서 아픈 중에서도 빨간 가방을 자꾸 만지고 어머니에게 이 빨간 가방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이 아이에게 빨간 가방을 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가방을 주려고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없어졌습니다. 톨스토이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데 이런 글자를 새겼습니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살면서 생각해봐야 할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입니까?” 둘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 누구입니까?” 셋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여러분 인생에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입니까? 지금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톨스토이의 말대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내년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축복해.” 말 한 마디라도 전달해서 청산하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