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용서, 새사람
(눅 15:11-32)

2016.3.6.주일4부예배

<서론>
회개, 용서, 새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기록한 탕자의 이야기 중에 둘째 아들이 방탕한 삶을 통해 상속받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아직 상거가 먼데도 뛰어 나가서 아들을 부여안고 말하기를 “내 아들아, 잘 왔다. 너를 환영한다. 사랑한다.” 그 둘째가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범죄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렇게 말했는데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도 못했어요. 아버지는 종을 보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아들이 된 증거인 반지를 갖다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그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이 아들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았다.” 아버지가 억세게 좋아합니다. 그래 탕자가 된 두 아들, 둘째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밤늦게까지 밭에서 일을 하던 맏아들이 흥분하고 분노하여 집에 와서 대문 밖에서 죽치고 앉아 아버지를 나오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나오니까 그가 땅을 치면서 “아버지 대체 이 집안이 꼬락서니가 무엇입니까? 둘째가 아버지 재산 다 가지고 나가서 창기와 탕진(가산)하고 왔는데 그를 이렇게 좋아해서 큰 공로를 세워서 돌아온 자 같이 품에 품고 야단입니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지금까지 지내왔는데 내 친구들하고 먹고 놀으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었으므로 나는 이 아들을 용서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얘, 너는 나와 함께 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 동생 통회하고 회개하여 돌아오니 얼마나 좋은 일이고 용서하고 사랑하자.” 그 맏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람 잘못 봤네요. 나는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꼭 말은 안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라는 이 두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어야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 브록만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에서 세계적 지성들이 제시한 최고의 발명들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 매우 의외에도 위대한 발명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지우갠데, 지우개가 없었다면 문화 도덕도 과학도 지금처럼 위대한 완성도를 보여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지우개가 없을 때에는 음악을 작곡하다가 틀렸으면 찢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되면 전체를 다 찢고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낙심하게 되고, 시간도 걸리게 되고 큰일입니다. 그러나 지우개가 있기 때문에 작곡하다가 잘못되면 지우개를 들고 싹싹싹~ 지워버리고 새로 싹싹싹 그리면 시간도 절약이 되고, 노력도 절약이 되는 것입니다. 지우개 덕분에 그 부분만 싹싹 지우고 계속 작업해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지우개는 굉장한 발명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고, 나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입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용서라는 지우개가 있기 때문에 싹싹싹 지우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허물을 용서하든지, 지우개로 지움을 받고 지워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인생이 훌륭한 작품으로써 빛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랑은 용서의 열매이다 사랑은 용서의 열매인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을 못해요. 사랑합니다. 하고 침을 탁 뱉고 돌아서면 그게 사랑인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도 용서도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그 다음에 사랑이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3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내가 이웃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내려다보고 계시다가 “나도 너 용서한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로 15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너는 용서를 안 하는데 나보고 너 용서하라냐? 그런 일은 없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는 얼마나 해야 되느냐? 끝없는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쭉 돌아보시고 난 다음,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나는 이거를 읽을 때 낙심이 됩니다. 아무리 해도 일곱 번도 용서를 못하겠는데 칠칠이 사십구, 사백 구십 번을 용서를 하라니. 그래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 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용서가 사랑을 문을 엽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째 아들인 요셉이 꿈 자랑 하다가 형들에게 잡혀서 애굽으로 종으로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죠? 세월이 흘러서 애굽에서 가슴에 꿈을 품고 산 요셉은 하나님이 그 꿈을 통하여 국무총리가 되게 됐습니다. 근엄한 국무총리가 됐어요. 그런데 가나안 일대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습니다. 야곱도 자식들 보내서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게 한 것입니다. 애굽은 요셉의 선한 통치 하에 풍년일 때 양식을 모아놓아서 먹을 것이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니까 요셉이 나가서 “가나안에서 온 형제들 들어오게 하라.” 그래 형제들이 들어왔는데 열 명이 들어왔습니다. “너희들 형제가 다 몇 명이냐?” 저게 열한째 동생인줄 모릅니다. 국무총리가 됐으니까, 자기들이 종으로 팔아먹었으니까 알 수가 없지요. “예, 우리 가나안에 한 아버지의 자식들인데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한 아들은 없어졌고, 한 아들은 아직 어려서 먼 길을 걸어오지 못하므로 집에 놓아두었으니 우리 건강한 열 명이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요셉이 “거짓말 마라. 틀림없이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정탐하러 왔다.” 자기 종을 불러서 이 중에 한 놈을 묶어라. 그들이 “아유 우리는 성실한 아버지의 자식들로서 정탐을 하든지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고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합니다. “봐라. 그때 요셉이 살려달라고 손을 (발발)비빌 때 그때 살려주었을 것을 그때 그 애절한 눈총을 보았지? 그 잘못을 이제 우리가 핏 값을 갚아야 된다.” 그들의 제일 맏인 르우벤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자고 하였는데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걔를 팔아먹더니 핏 값을 이제 지불하도다. 핏 값을 지불 하는 거야.” 요셉이 자기 동생인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자기들끼리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너희 성실성을 믿기 위해서 내가 너희 형제 중에 한사람을 묶어 놓겠다. 너희들 양식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 돌보시고 동생을 가뭄에서 양식으로 구출해줘라.” 그러고 난 다음에 요셉이 어디 갔습니까?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뛰어가서 뭐합니까? 엉엉~ 내가 울음이 나오네. 울었습니다. 자기를 팔아먹고 기나긴 세월이 지나서 이제 와서 만났는데 자기를 국무총리인줄 모르고 있는데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요셉은 울었습니다. 여러분, 용서가 있어야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회개하는 소리를 듣고 다 용서해주었고, 그들은 나중에 애굽에 내려와서 430년 동안 대 민족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평론하고 평판하고 죽이기만 할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넘치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고, 장래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 앞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 기도 응답의 조건
우리가 기도응답 받는데도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로 15절에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라’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악한 길에서 떠나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의 길을 계속하면서 기도해서 응답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악한 길을 떠나라. 그러고 겸손해져라. 교만하지 마라. 그러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시니 용서를 받고 하나님은 너희가 사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악을 계속해서 행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짓고도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장9절)’ 죄 없다 하면 거짓말 한다 했습니다. 다 죄를 지어요. 그 죄를 용서하게 달라고 하시면 하나님이 사해 주시고 그 땅에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회개 안한다고 그 자리에서 어제 김포공항에 제주도에서 날라오던 비행기 KAL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벼락을 때리면 살아남을 자가 있습니까?

3. 예수님과 용서
우리가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시간을 주시는데 어떤 것이냐면, 하나님은 꺾어진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않으신다. 갈대가 부러져서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언제고 꺾어질 것입니다. “그 (언제고) 꺾어질 거 볼 거 뭐냐? 차라리 확 꺾어버리지.” 그렇지 아니하면 등불이 팔랑팔랑 꺼지려고 하는데 “꺼지려고 하는 거 왜 그대로 두냐? 휙!”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몰인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갈대가 저렇게 하다가 스스로 나아질 수도 있고, 혹시 꺼져가는 심지가 불이 잘 붙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시간을 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생각에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보고 ‘저렇게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편히 사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서 열 두 벼락을 때려가지고서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 말입니다. 꺾어진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 제사장에게로 와서 예수님을 만나가지고서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모세의 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피할 길이 없어요. 소문으로 잡힌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그 유대인의 법은 굉장히 엄합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신발도 벗기고, 질질 끌려서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져졌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도 별 도리 없이 “모세의 율법대로 하려무나” 그렇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보시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황을 글로 쓰면서 있는데, 자꾸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시간 바쁜데 빨리 처리하고 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 보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고 난 다음, 허리를 굽혀서 그 사람의 죄를 손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들의 죄를 다 눈에 보고 있으니깐, 예수님 어깨 너머로 보니 자기 죄가 드러난다 말입니다.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였다가는 그 다음에는 자기가 돌에 맞아 죽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다 달아나 버렸어요. 죄 없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제가 한 번 대전에서 대부흥회를 하다가 부흥회 중에 “이 중에 죄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그러니까는 40대 쯤 되는 남자가 손을 탁 들어요. “당신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번 강단에 올라와라!” 그러니까는 30대 되는 여성이 그 허리춤을 잡고, 매달리고, 잡아당깁니다. 그래 “왜 당깁니까? 내버려 놓으십시오.”, “미쳐서 안수기도 받으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한말 했습니다. “미친 사람 이 외에는 자기가 죄 없다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3장23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몸 찢고 피를 흘릴 때, 모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우리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갚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에 대한 끝없는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어찌해도 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살려야 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고 몸부림 치고 있는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욕을 합니다. 근데 주님께서 욕을 받아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저렇게 하는데 죄를 돌리지 마시고 용서해 주시옵소서.” 캬~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니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관리들이 비웃으면서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그리스도이거든 자신도 구원하고 내려오라”고 말했어요. “만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구원하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정죄하고 저주하지 않으시고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에, 왼편에 살인강도가 같이 못 박혔는데, 강도 하나는 막 고함을 치고 목에 힘줄을 올려서 예수님을 욕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도 내려오고 우리도 내려오게 하라!” 그런데 그와 똑같이 살인죄를 지은 우편 강도가, 여기는 우편이라고 말 안 했습니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편이지 싶습니다. 좌편은 아니고. “주님!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 해 주소서.” 단지 회개가 그 회개밖에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자기도 온갖 죄를 많이 지었고, 죄를 회개할 여하도 없으니깐 살려달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를 내려다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히야~ 그 사람은 기왕 죄인이 될 바에야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회개로 얻은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체험하면, 그 용서와 사랑에 끌리어 우리도 용서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예수님은 주 앞에 나온 사람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기대가 크시기에 마지막 십자가 못 박혀 죽는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회개라도 받으면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네 회개한대로 될 지어다.” 믿음과 회개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에 감동하는 것은, 의식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주님에게 회개하고 나오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이 맡으시고 우리를 낙원에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인생 최고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고 자살 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만큼 예수님을 가슴 아프게 한 이도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서 심판받는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이 듣는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볼 때 “이 배신자야. 이럴 수가 있느냐?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다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도, 제자들은 고향땅 어부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삼 년 반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주님 죽고 장사지내고 말았으니깐 이제 고기잡이나 하겠다고 아침부터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는데 “얘들아~무엇이 있느냐?” 아 누가 갈릴리 해변에서 고함을 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이시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냥 그대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헤엄을 쳐서 나오고,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에 싣고 끌어 당겨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베드로는 훨씬 나보다 못한 것 같아.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도 잘하고, 또 주님이 오라하면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헤엄쳐 나오고, 주님이 제자들이 주 앞에 둘러섰을 때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베드로야.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배반해도 그렇게 혹독하게 배반을 하는가.” 그러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굽고, 부활하신 그 몸으로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러고 베드로에게 먹게 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언제는 사랑한다고 안 했나요!” 그러면서 “주님 사랑합니다.”, “내 양을 쳐라” 두 번째 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충격을 느꼈어요, 베드로가. “주여 주님이 압니다. 내가 사랑하는지 아닌지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깐 내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시나이다.”, “오냐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그 배신자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세 번 부인했으니 세 번 인정해주고, 주의 사도로서의 지위를 굳게 해 주어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다음 훌륭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나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언제 또 부인할지 자기가 어떻게 압니까?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에게 맡기는 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모릅니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이니까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용기 있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왜 용서하자고 하느냐면, 신학자 루이스 스미디스(Lewis Smedes)는 ‘용서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심지어 가해자가 뉘우치지 않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에게 가해를,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생각에 늘 그가 떠나지 아니하고 괘씸한 생각이 마음을 늘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미움의 감옥 속의 포로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게 되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감옥에서 풀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묶여서 멈춰있는 삶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용서밖에 없습니다. 스미디스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한 문을 통과하게 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께 나와서 그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히 흐르는 피로써 영원히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우리 자신이 용서할 뿐 아니라, 용서 받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쳐다보고, 이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몸을 찢어서 먹으라고 주시고, 피를 흘려서 마시라고 주시면서 나를 먹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산다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