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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고전 15:12-19) 2016.3.27 주일4부예배 <서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두드러지게 죽은 자를 살리신 사람은 바로 나사로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 밖에만 나가도 벌써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사로를 살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고, 정신이 돌았다고... 얼마나 흉을 많이 봤던지 그 동생 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주님 제발 이 일은 손 떼십시오. 오라버니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오라버니가 안 살아나면 선생님의 명함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꾸짖었습니다. “마르다야, 내게 네게 말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느냐? 예수님이 하도 강하게 나오시기 때문에 마르다가 마리아와 함께 무덤 문을 굴러 열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무덤 문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 한마디에 나사로가 온 몸이 새롭게 되어 살아서 나왔습니다. 지금 아멘은 하지만, 겉으로. 괜히 그렇지 과연 살아나겠는가? 그런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놓고 난 다음, 그 다음 당신 자신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살아 일어났습니다. 그 왜 자꾸 이렇게 하시느냐? 기독교의 복음은 이론적인 복음, 학문적인 복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적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무슨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전설적으로 믿는 줄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것이 현실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의 죄를 사해주시고, 현재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현재의 병을 고쳐주시고, 현재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시고, 현재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현재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현재 우리의 운명과 생활에 연관성이 있는 복음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밥 주냐?” 그런 소리 제가 많이 들었어요. 옛날에 전도사 시절에 한국이 훨씬 못살 때 “교회 나가서 예수 믿자.”면, “예수 믿으면 밥 주나?” 기가 막힙니다. “예수 믿으면 밥 주지요.” “어디? 우리 가족 식구들 좀 먹여봐라.” 여러분 예수님은 밥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넘게 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난 다음 열 두 바구니 남았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넘치게 주시는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본인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공개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세 번에 걸쳐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수난의 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직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2절에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께서 자기의 수난당하는 것과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직접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 예고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그가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가 그에게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묻혀 오실 사건을 전달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 체험을 하시고 난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 밑에 내려오니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비참해 하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귀신이 아들에게 들어가면 발버둥을 치고 지랄을 했습니다. 온 전신에 상처투성이고, 피투성이고, 그러니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그 아버지가 뛰어와서 “내 아들 좀 살려주소. 당신의 아들, 제자들은 못 고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아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완전히 고쳐주시고 주님께서 누가복음 9장 44절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더라’ 언제나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곧장 자기가 비참하게 순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야기였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31절로 33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로마정부 대표자인 빌라도가 유언비어를 막는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무덤에 파묻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은 원수들은 예수님이 살아날까 싶어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예언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의 대변자 빌라도에게 가서 군대를 동원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하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서 살아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로 66절에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그런데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니까 예수님 부활을 본 경비병이 혼비백산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로 4절에 보면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물론 우리 기독교 복음은 여자 성도들이 아니면 부지가 될는지 몰라요. 어느 교회든지 교회가면 2/3는 여자성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론 그 여자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자들 멱살을 잡고 나중에 천당에 데려갈 것을 믿고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저도 50년을 목회했지만 여자성도들 아니면 교회가 안 됩니다. 체험했습니다. 정말 여자성도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되겠어요. 그런데 초대교회 주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 떴다 놓았다 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나타난 것은 보잘 것 없는 여자들인 것입니다. 그것도 귀신들려서 길거리에 헤매고 다니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 그런 여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고 예수님은 그 여자들을 교회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는 왜 그러냐면 여자들의 인격은 짐승만도 못했습니다. 아주 여자는 인격이 없어요. 요사이 북한 김정은이가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유 우방국가에서 꾸중을 하지만 뭐 김정은이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그 여자들은 숫자에도 안 들어가요.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 밥 먹여주려고 숫자를 헤아릴 때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숫자에도 안 넣었습니다. 그러므로 법적으로 재판을 받을 때 부인들을 증인신청을 내리면 증인으로 안받아주었습니다. 여자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도 증거를 대어도 안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여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얼마나 멋있게 했던지 여자를 첫 증인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박수 한번 크게 치십시오.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세월, 그때만 본 것이 아니라 다가올 세대도 보았던 것입니다. 소위 정치인들이 법조인들이 여자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여자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도 아니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해서 처음 여자들에게 보였다. 그러니 이 기가 막힐 사실입니다.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여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서 보았으니 거짓말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라면 여자라도 남자 옷을 입혀서 보여줄 것인데 당당한 사람들 다 아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인정받지 못하는 여자의 입에서 봤다고 말하게 하셨으니 진짜로 봤기 때문에 봤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는 증언을 안 들어주는데, 안본걸 봤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봐도 안 봤다고 하고 안 봤다고 안 봤다고 그러고. 그러니까 아 여자가 우리 봤다 해도 안 봤다 인정을 안 해줄 그 여자에게 당당하게 우리가 봤다고 하나님도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으니 저도 혼돈이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로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 만인이 안 믿어줄 그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어요.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였다 한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더라’ 뻔한 소리지요. “뭘 여자들이 보았다고 하노. 거짓말로.” 그렇게 말하고 말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은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기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자신을 보여 주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절대로 여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나 로마 모두 여자를 천시했고 법정 증인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증인이 여자였음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자가 봤다고 하는 (것은)진짜니까 여자가 봤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봐도 증인으로 인정 안 해줄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런 여자에게 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맡겼다는 것은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수차례 주님이 나타났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로 13절에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장 14절에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요한복음 20장 26절로 28절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을 본 사람이 증거할 (때) 전에 도마가 말하기를 “나는 그 손 못 자국에 손가락 넣어보고, 옆구리에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고야 믿겠다.”고 했거든요. 그 주님께서 그 다음에 제자들이 식사하는데 나타나서 “도마야 이리 오너라. 손가락 내 여기에 손 넣어보아라. 손 구멍에 손 넣어보아라. 그러고 옆구리 여기에 넣어서 갈비뼈를 만져보든 창자를 만나보든 만져보아라.” 그러니까 도마가 기절초풍 했습니다.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서 “내 하나님이시여. 내 주님이시여.” 주님은 진실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한복음 21장1-4절)’ 예수님이 “얘들아 물고기가 있느냐?” “못 잡았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물속에 뛰어 들어갔어요. 헤엄을 쳐 나오고, 다른 사람들은 배를 가지고 나왔는데 예수님께서 모닥불을 피워놓으시고 고기를 잡아 생선을 불에 굽고 계셨습니다. 참 베드로 같은 제자는 재미있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잡힐 때 죽어도 예수님과 같이 죽고, 예수님을 부인 안하겠다고 한 다음에 그 자리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밥과 생선을 먹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참 기가 막힙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또 사랑한다고 한 다음에 언제 안 사랑할지 모르니까. “주님 내가 사랑합니다.” “내 양을 쳐라.” 조금 있다가 또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여라.” 그 다음에 또 있다가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자꾸 물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 헬라어에는 동사의미가 다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가? 거기에 예수님께서 ‘필레오’란 말을 썼습니다. ‘아가페’는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고, ‘필레오’는 친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목숨을 바쳐 사랑하느냐?” “내가 필레오합니다.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그 다음 또 “아가페로 사랑하느냐?” “필레오로 친구로 사랑합니다.” 이 마지막에 주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친구로서 사랑하느냐?” 하니까 “아이고 주님, 내가 친구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 또 부인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십니다. 나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께 와서 여러분 보고 물으십니다. “너 나를 필레오하느냐? 친구로 사랑하느냐?” 나는 여기 앉은 여러분 100%가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 외에 성령까지 모셨으니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줄 믿습니다. 사람은 변화무쌍합니다. 마음에 작심사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한번 사랑했으면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예수님의 명칭에 붙은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예수님, 영원한 구주, 영원한 치료자.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인 것입니다. 영원히 죄를 용서해주시고, 영원히 허물을 없애주시고, 영원히 치료해주시고, 영원히 축복해주시고, 영원히 천국을 주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넘어져서는 또 일으켜 주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켜 주시고, 그래서 한꺼번에 여러분이 모두다 천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서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다가 비뚤어진 길로 나간다고 저버리지 마십시오. 주님은 끝까지 여러분 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하신 후 40일 지난 후에 약 500명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로 9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다’ 500여명이 보는 앞에서 주님 마지막 명령을 내리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올라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이후로 오늘날에도 종종 필요하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엠마오로 가는 길거리에서 엠마오가 아니고 자기의 고향 땅으로 가는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굉장한 승리를 갖다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을 폐한 것입니다. 옛날에 한국 정부에서는 천 냥 빚을 지면 40일 동안 여유를 주어서 40일 동안 갚지 못하면 목을 베었습니다. 그러므로 천 냥 빚을 진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40일 지나고 길거리에 걸어 다니지 아니하면 아 죽었구나. 빚을 못 갚아서 죽었구나. 그런데 당당하게 서서 어깨에 힘줘서 다니면 아 빚을 졌어도 40일 이후에 다 갚았으니까 저렇게 당당히 다니는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빚을 다 갚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다 청산 돼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는 빚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핏줄을 받은 사람들은 다 죄인인 것입니다. 다 죽음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은 아담의 핏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생명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여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예수만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첫 아담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모두다 사망의 핏줄을 쫓아서 다 죽은 사람이다. 그 다음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인 것입니다. 피가 다릅니다. 아담의 피가 다르고, 예수님의 피가 다릅니다. 아담의 피는 죽은 핍니다. 부패한 핍니다. 썩은 핍니다. 아담의 피를 받은 사람은 다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몸속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피이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성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인류가 되어야 되요. 새로운 조상인 예수님을 모시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상에 60억 인구가 살지만 아담의 자손들은 죽은 피를 가지고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피를 가슴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사망을 당하고 예수님의 자손들은 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옆에 계신 분에게 “당신은 영생의 사람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천국에 올라가시기 전에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예수님은 첫째 보혜사인 것입니다. 첫째 보혜사.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 우린 우리 힘으로 예수 못 믿습니다. 보혜사란 것은 하나님께로서 보내신 분으로 항상 같이 있어 도우는 분인 것입니다. 도우는 분이 있어야 우리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는 처음 보혜사고 다른 보혜사가 오겠다는데 그 처음과 다르냐는 말이 뜻이 다릅니다. 처음 보혜, 아 같은 보혜사는 ‘알로스파라클레토스’ ‘알로스’는 ‘똑같은 쌍둥이’인데 한사람, 두 사람인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은 ‘헤테로스’입니다. ‘이 사람과 이 사람’은 ‘헤테로스’ 예요. 그 예수님께서 ‘알로스파라클레토스’ ‘나와 꼭 같은 보혜사.’ 너희를 돕기 위해 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같이 계시니라. 헤테로스가 아니다. 나하고 전혀 다른 보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상에 외롭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돕는 자. 예수님과 꼭 같은 보혜사 성령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는 바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보혜사가 같이 계시면 손으로 잡아보고 느껴야 되겠는데 그렇지 않지 않아요? 여러분, 바람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활 속에 24시간 중에 바람을, 공기를 느끼는 때가 몇 번 있습니까? 전혀 느끼지 않은데 숨 쉬고 있잖아요. 지금 숨 쉬고 계십니다. 지금 파라클레토스 보혜사는 지금 숨 쉬는 공기와 같이 여러분하고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려울 때, “성령 보혜사시여 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날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성령이 역사함으로 마음에 확신이 오고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고 좌절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돕는 이가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꼭 같은 돕는 이가 여러분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거철이 다가오면 강연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강연을 할 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면, 보혜사 성령께 부탁하면 멋진 말을 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가서 성회를 많이 인도했는데 문화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나, 우리하고 습관이 달라요. 그런데 10만 명, 30만 명, 100만 명의 군중이 모인데 갑니다. 그 군중들 앞에 서면 겉으로는 안 그런데 속은 덜덜덜덜 떨립니다. 그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때는 목이 너무 떨려서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을 갖다 “ddddd...dear friend” 더구나 한국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이 인정도 안하지요. 그때 기막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보혜사 성령님. 나는 못합니다. 안돼요.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셔야 돼요.” 그러면 바람같이 공기같이 마음속에 평안이 들어오고 담대함이 들어오고 기쁨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교하고 난 다음에 그 설교를 들어보면 ‘이거 어떻게 내가 저렇게 기막힌 소리를 했는가.’ 놀랄 지경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돕는 자가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가시면서 우리의 병을 처치하고 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마태복음이 아니고 마가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우리 건강하게 살라고 축복하고 떠나신 것입니다. 병들어 사는 것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건강해야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저주를 철폐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아담이 범죄 하여 이 땅이 저주를 가져와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피투성이가 돼서 피땀을 흘리며 사는 인생들에게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저주를 다 함께 못박아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여러분께서 복이 있는 사람, 복 받은 사람이라고 늘 인정하면 그것이 여러분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어찌하여 없다고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와야 사람의 죄를 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예수님이 끌어안고 걸머지고 죽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지 사람이 짐승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는 여러분처럼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었다는 것은 실제로는 죽을 수 없는 분이 여러분과 나를 짊어졌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지 못했으면 나를 끌어안고 주님이 죽으셨다 영원히 파멸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여러분과 내가 하나가 돼있으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걸머지고 죽으시고 예수님의 생명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3. 죽은 자의 부활,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 하느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13절에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예수님이 우리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못하는 것은 첫 사람으로서 모범적으로 죽었다가 부활 못했으면 우리는 그를 따라 다 죽고 부활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살아나지 못했으면 우리는 거짓을 전파하는 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 되고 마니까. 그 믿어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로 15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고,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고, 예수 천당은 내 천당이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종교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 죄, 예수님의 죄, 불의, 예수님의 불의, 우리의 고통, 예수님 고통, 우리의 슬픔, 예수님 슬픔, 우리의 낭패, 예수님의 낭패, 우리의 죽음, 예수님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끌어안은 것입니다. 예수가 죽었을 때, 예수 죽은 초상집이 바로 우리의 초상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철저히 우리를 끌어안고 죽으셨는데, 부활할 때는 철저히 우리의 옛사람을 청산해버리고 부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중생한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눈에 보이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요. 속에 있는 새사람은 해방과 자유가 되어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죽어서 부활했으니까 우린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사람의 첫 열매요. 우리는 그 따라서 영생의 열매를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20-22절)’ 이럼 삽니다. 살아요.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서 기다리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같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죽으면 낙원으로 들어가요. 천국 대합실로 들어가요. 낙원에 있다가 주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서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와 같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서 사망을 선고 받고,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철폐 해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죽음의 문제는 철저히 예수님 안에서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무당을 하던 동리 할머니를 전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돼요. 성경책을 한권 사줬는데 그러니까 이 무당할머니, 당시 성경이 귀하니까 읽어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고 말씀하기를, 나는 집에 가서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 저 무당 할머니 성경 좀 읽게 해달라고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성경을 도로 가지고 내게 왔어요. “당신이 사줬으니 도로 받아가라”고. “아이고, 무슨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까? 좀 읽어보라.”고 하니까 “내가 성경을 가지고 가서 읽어보려고 목욕재계하고 머리 빗고 그러고 아주 정성들여 앉아서 성경을 읽었는데 세상에, 세상에 하나님이 잔소리가 왜 이렇게 많으냐? 하나님 같은 어른이 굵직한 말을 해서 우리들 같이 알아듣게 해줘야 하는데 쫘아아 잔잔한 잔소리만 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그래 내가 잔소리가 아니라 잔소리 같이 보이는 곳만 읽어서 그렇다고 굵은 데만 읽으라고, 신약성경만 읽지 구약은 읽지 말라고. 그래가 그 할머니가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성령까지 받고, 얼마나 열심히 되었던지 그 아들은 강제로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가 되게 하고, 그는 권사가 되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느냐? 성령이 오니까 하나님 말씀이 큰소리가 되고 잔소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이 없으니까 꼭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지요. 성경의 지식은 부활의 지식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분별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한동안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잘 사는 것. 요즘엔 ‘웰 다이잉’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작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삶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히브리서 저자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한사람, 한사람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가족과 이웃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지가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장13-14절) 당시에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죽은 사람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만일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슬퍼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시 동안 그들을 볼 수 없지만 큰 슬픔은 마음에 간직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장차 낙원에서 우리와 함께 만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