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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삶과 고독 (창 2:18) 2016.4.17. 주일4부 설교 <서론> 오늘 ‘혼자 사는 삶과 고독’이란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 산으로 불러내어서 그는 야훼 하나님을 대표하는 선지자로서 경쟁이 붙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우상으로 떨어져 나가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줄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신은 야훼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우상숭배가 많았던지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만 해도 450명, 아세라 신을 섬기는 사람들 400명, 850명 대 엘리야 한 사람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주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갈멜 산에 모여서 각각 자기들의 신을 향한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에 장작을 쌓아놓고, 짐승을 잡아서 그 위에 얹어놓고 불은 피우지 말고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제물을 태우는 그가 곧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이 불로 응답하는 신을 하나님으로 모시자고. 그래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와서 아주 큰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아놓고 짐승을 잡아 각을 떠서 얹고 엘리야는 겸허한 제단 쌓아놓고 자기 혼자 제물을 제단에 얹어놓고 엘리야가 말하기를 “너희는 숫자가 많으니까 먼저 불을 내려오도록 기도를 하라.”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바알이여, 바알이여, 아세라여, 아세라여, 불을 주소서. 이 나라는 당신의 것입니다. 불을 주소서.” 대답이 없으니까 엘리야가 놀리는 것입니다. “아, 너희들 신은 잠이 와서 아마 잠을 자는가보다. 못 들으니까 불을 안 내려주지 않냐? 그렇지 않고는 너희 신이 사무실 문 채워놓고 놀러가 휴가를 즐기는가보다. 깨워 일으켜라.” 그러니 퉁퉁 닳은 바알신과 아세라신 제사장들은 더 뛰고 굴리고 칼을 가지고서 자기들 몸을 그어서 피를 흘리고 그래도 아무 흔적이 없는데, 이 엘리야가 야훼를 향한 단 위에 장작을 펼쳐놓고 “물을 갖다 부어라.” 그래 물을 갖다 부으니까 물이 도랑으로 흘러내리고 그런데 무릎을 꿇고 “야훼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인 것처럼 불을 내려서 이 제물을 태우소서.” 그러니 벼락같은 소리가 나더니 진짜로 벼락이 그 제물을 때리니까 순식간에 다 타버리고, 물도 다 말라버리고, 그 주위에 모여온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장면을 보고 “야훼가 참 하나님이다. 야훼가 참 하나님이다.” 그래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람을 다 잡아라.” 다 잡아가지고서 시내로 내려가서 혼자서 칼을 들고 목을 벱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야훼의 예배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예루살렘 시내로 들어가서 그가 쉬고 있는데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연락이 왔습니다. 왜 그렇게 우상을 섬기는 신들의 제사장들이 많으냐하면 아합이 결혼을 할 때 이스라엘 여인을 취하지 않고 이방여인을 취했는데, 그 부인이 이스라엘에 시집올 때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시집올 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이세벨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너를 목을 내가 안 치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리라.”고 그 전달을 받고 난 다음 엘리야가 혼비백산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용감하게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해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850명의 목을 치고 그러던 그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전달한 협박을 듣고는 아예 그렇게 무력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겁쟁이가 되어서 집에서 쉬다가 그대로 일어나서 도망을 치는데 종 데리고 유대 변경에 들어가서 유대 국경에 종은 혼자 있으라고 하고 광야를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걸어가다 지칠 대로 지치고 더 못 걸어가니까 할 수 없이 로뎀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가지고서 “하나님 좋습니다. 이제는 내 목숨 거두어 가시옵소서.” 사람이란 탁월하게 용감한 면도 있지만 형편없이 맥 추지 못하는 겁쟁이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대개 타락하는 데는 언제 타락하느냐? 이방여자들하고 결혼하면 타락해요. 아담이 하와의 꾐을 받은 것이 유전이 되어가지고서. 하와의 말을 듣는데, 부인이 예수를 잘 믿으면 여간 고집 부리는 남편도 결국 예수 믿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부인이 예수를 안 믿으면 남편이 믿어서 부인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을 보면 남편이 죽을병이 들리기 전에는 안돼요. ‘폐병이 들렸다, 암이 들렸다,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된다, 교회 가면 산다.’고 하니까 부인이 살릴라고 교회에 데리고 와요. 그 이외엔 남편 따라서 교회 나오는 부인은 제가 50년 목회하면서 별로 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아내가 예수를 믿고 남편보고 가자고하면 조금 고집 부리다가 포기하고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장가 안 간 아들 있거든 장가 조심해서 보내십시오. 예수 잘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아내를 맞이하면 큰 복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걸 볼 때 하나님께서 신앙을 여성들에게 많이 준 것입니다. 요사이는 대통령도 여성들이 많이 되니까 앞으로 여성천지가 될 줄 믿습니다. <본론> 1.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었습니다. 여러분의 형상과 모양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거울 앞에 서면 여러분의 형상과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고양이를 갖다놓고 ‘이게 내 형상과 모양’이라고 한다고 누가 믿을 사람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고도 내 형상과 모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보고는 내 형상과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봬도 내가 하나님 형상과 모양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형상과 모양입니다. 그럼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하나님과 닮았어요. 이 우주에 하나님이 가장 높으시고 그 다음에 높은 분이 여러분과 나인 것입니다. 천사들은 우리 섬기라고 만든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 잘못 만나가지고서 마귀에게 짓밟히고 도적질 당하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지, 우리 할머니가 타락만 안했으면 요사이 다 어깨에 힘주고 아주 당당하게 살 것인데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사람의 모양을 쓰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처럼 보여야 사람과 교통이 되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온 것처럼, 여러분 사람이 속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다 별 볼일 없는 육체로 된 존재로 생각하지만 속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하나님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굉장히 귀하지요.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고 남자를 먼저 짓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여자를 지으시는데,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돕는 배필인 여자를 만들어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마취시킨 후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요사이 병원에 가면 수술할 때 마취를 시켜놓고 수술하지, 현대 과학의 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사람 지을 때 벌써 마취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남자를 잠재워놓고 마취를 시킨 것인데 창세기 2장 20절로 23절에 보면 아담, 하와 우리 사람이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야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서 볼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워 놓고 옆구리 뼈를 취했어요. 머리뼈를 취하지 아니라고, 발뒤꿈치 뼈를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옆구리 뼈를 취했어요. 머리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었더라면 여자가 남자 위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하나님이 머리뼈로 안 만들어서. 그래서 집에 들어가서 마누라 보고 벌벌 떨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 술 취하면 집에 들어와서 “여 있느냐~ 내가 왔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혼이 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를 만들 때 발뒤꿈치로 만들었으면 남자가 짓밟을 수도 있으니까, ‘내 발뒤꿈치가 무슨 잔소리 하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거 아닙니다. 옆구리 뼈를 취했다. 옆구리는 동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인권상 똑같다. 남자는 여자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뭘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서 그런 소리 하는 것입니다. 옆구리 뼈를 취했어요. 그러고 이 옆구리 뼈라는 것은 가슴을 말하는데,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이성적인 관계도 아닙니다. ‘네가 잘했다, 못했다’ 하는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고, 또 상하의 관계로 아닙니다. 발뒤꿈치 뼈로 지은 것이 아니니까, ‘누가 더 훌륭하다, 못하다’도 아닙니다. 가슴뼈로 지은 것은 사랑을 가지고서 서로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폭력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이 사랑으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보면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했지 아내를 부려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의 가슴에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하나님이 됩니다. 남자는 부인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남자인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가 안겨서 피하는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도를 사랑한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사랑해서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요새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여러분이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 살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남녀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어서 살되 ‘이론적으로 너가 나보다 약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폭력으로 다스려야 되겠다.’ 그것도 안 되고, 폭력보다 더 나쁜 이론을 가지고서 ‘꼼짝 못하게 하겠다.’고 하는 것도 나쁘고, 동등한 인권을 가지고서 사랑으로 교제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잘했다, 못했다.’ 다투지 말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사랑으로서 덮고, 부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벌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인들에게 너무 비용을 월급을 적게 주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자니까 방문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내가 물어보죠. 보통 남편에게 “하루에 비용을 얼마나 드립니까?” 좀처럼 대답을 안 해요. 그것을 여기서 말했다간 가정싸움을 일으킬까 싶어서 말은 안하겠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대화가 잘 통해야 되는데, 가정문화원 두상달 장로님은 부부가 대화할 때, “~구나”를 많이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나”가 굉장히 효과를 발생한다. 여러분 “구나”가 뭔지 알고 계십니까? “구나”란 것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이 “뭐 못나서 그랬구나. 무능력하니 그랬구나.” 이렇게 꾸짖지 말고,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아이고~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네.” 무엇이든지 “구나”로써 결론 지어버려요. “많이 아팠겠구나. 많이 섭섭했겠구나.” “구나”로 해버리면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슬며시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하여 맞장구를 쳐주면 부부는 물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큰 위로의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정을 받을 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했냐? 뭐 손실을 많이 가졌거니 못난이 하고 데리고 살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 말고, 기왕 끝난 거 “아이고 고생했구나, 마음이 아팠겠구나, 좋았겠구나.” “~구나”를 지금부터 많이 사용하십시오. 한번 옆에 계신 분에게 “은혜 받았겠구나.” 한번 해주세요. 그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구나”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남자, 여자 즉 하나님의 삼위일체 같이 우리도 혼자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그들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전도서 4장 9절로 12절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리니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인생에 혼자 산다고 큰소리 할 것 못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되면 굉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독의 나쁜 점 왜 고독이 나쁘냐 하면 이웃과 마음을 터놓을 친면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외롭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때는 인생을 살다가 어려움을 당했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인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정말 뼈저리게 외로운 때인 것입니다. 저는 짧은 인생은 아니겠지만 80년을 살면서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체험했습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저희 아버님이 나갔다가 떨어졌습니다. 걸렸으면 좋은데, 떨어졌는데, 그 때는 빨치산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부산 근처를 뒤흔들던 빨치산이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31번지. 우리 집 근처에 아지트를 만들어서 들어왔습니다. 밤낮으로 사람들이 죽어가요. 지방의 우익단체 지도자들은 죽어가요. 우리 아버님이 삼남면 교동리 우익단체 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하루 빨치산이 내려왔는데, 우리 아버님이 위채에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래채에 있는데, 아 빨치산이 탁 들어와서 사랑문 걸어재끼고 우리 아버지 찾습니다. “이 놈 어디 있냐? 도대체 이놈 민주주의를 한다고 이승만이 따라다니는 이 놈 죽여야 된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아래채에서 할머니 품에 안겨서 자곤 했는데, 아버님이 할아버지, 할머니 계신데 뛰어오니까는 아 그때 내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 아버님을 눕혀 놓고,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님 위에 드러누웠어요. 그 다음에 할머니가 또 아버지 머리맡에 주저앉았어요. 그러니 나이가 많으시니까 그때는 라이터불이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터 불을 딱 켜서 “이놈 어디 있나?” 찾는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고 눈부셔, 아이고 눈부셔, 아이고 그거 켜지마.” 노인이 눈 부신다고 말한다고 욕이 되지 않잖아요. 저는 50댄데도 불구하고 눈이 부신데... 그러니까 그 노인들이 고함치는 소리를 빨치산도 믿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놈 참 걸음 바쁘다. 빠르다. 벌써 알고 숨었구나.” 그러고 난 다음에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안 되겠다. 시골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그러셨는데 아무것도 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학교 갔다 오니까 아주 언제나 집안에 형제들이 많으니까 울고 고함치고 야단법석하는 집안에 조용하더라고요. 그래 가보니까 나 없는 사이에 짐 다 꾸려서 부산으로 이사 가버렸어요. 우리 형제간이 아홉인데, 전부 다 이사 데려가고 저만 남겨놓았었습니다. 그러고 저보고는 간단 말도 안하시고, 제가 안방에 들어가 보고, 부엌방에 가보고, 마당에 서서 보니까 참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심정이 생겨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고독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그런 괴로움을 느껴서 저는 시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외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 많이 교회에 보내주셨나 봅니다. 고독이 왜 좋지 않으냐 하면, 성경에 있는 시편 기자는 그러한 심정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102편 6절로 7절에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고난을 당해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올빼미나 부엉이처럼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고,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혼자 밥 먹고, 혼자 차 마시고, 혼자 취미를 따르고, 혼자 자고, 혼자 사는 사람 많습니다. 그 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1인 가구가 500만 시대에 도착했습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지난해에 우리나라 1인 가구가 500만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500가구가 넘었어요. 4가구에 한 가구가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왜 혼자 사냐?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사이는 ‘뭐 꼭 결혼해야 사는가? 혼자 살아도 좋다’고.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혼자 살 마음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됩니다. 30살을 넘기면 시집가기 곤란합니다. 30살 되기 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30이 넘으면 결혼하는 남자들은 자녀를 원하니까. 30살이 넘어서 자녀를 낳게 되면 고생 많이 해요. 그러니까 시집가실 분은 30살 넘지 말기를 바라고, 저 주례를 받으려거든 30살 안으로 결혼하십시오. 늙은 신랑, 신부는 제가 주례 안할 터이니까. 그 다음에는 이혼을 많이 해서 혼자 삽니다. 우리 자라면서 이혼이란 말도 못 들었는데 요사이는 약간 하면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해서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들 있습니다. 직장이나 취업 때문에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 주의 종까지라도 시골로 내려가면 그 사모님이 애들 관계, 교육 때문에 안 따라갑니다. 그러면 저보고 “목사님, 나 시골로 두지 말고 우리 마누라 있는데 도시로 좀 불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늘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것을 내가 어떻게 불러들이느냐? 네가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반역을 하고, ‘나는 못갑니다. 하나님’ 발버둥 쳤으면 몰라도, ‘예. 가지요.’ 베드로처럼 그렇게 한 다음, 이제 자꾸 못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주의 종은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이지, 직장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더라도 가야돼요.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직업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 그 다음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배우자와 이별합니다. 남편이 먼저 가든, 아내가 먼저 가든. 이 세상에 빠이빠이하고 간 결과로 혼자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혼자 사는 삶은 외롭습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취미생활을 하고, 혼자 자고, 혼자 깨는 것,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조차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혼자 살지 말고 함께 살아야 돼요. 그래 성격이 다른 사람 모여 사니까 마음에 상처도 오고, 쥐어박고 싶은 생각도 나고, 그런데 결혼하고는 입 딱 다물고 살면 됩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중에 오래 살았지 않습니까? 오래 사니까 잔소리, 쓸데없는 소리 하는지 몰라도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하라. 교회가 얼마나 우리를 용서하고 돌보아주고 오래 참고 해서 천당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내가 안 되어봤으니까 아내 성품은 모르지만 남편 되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니까 남편은 아내의 말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돼요. 함께 살라면 똑같이 주고받으면 이혼을 하게 돼요. 남편들이 아내의 피난처가 되고, 요새가 되어서 아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면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이 따라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많으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만성적인 고독으로 심장과 위장 같은 내장 기능에 장애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면역성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많으면 몸이 질병 바이러스에 약한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을 억지로라도 가지십시오. “하하하하하 여보십시오. 하하하하하 오늘 좋았어요. 하하하하하.” 아 천성적으로 많이 그렇게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굉장히 인상도 좋고, 건강해요. 마음에 우울한 심정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시고, 오늘부터 여러분 집에 들어가거든 “여보 나 왔어요. 하하하하하.” 장난이 아니고 그러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다고요. 전 요사이 웃는 연습을 하는데 어떤 때는 내가 들어봐도 안 웃을 자리에서 웃는데, 하하하하하. 마음이 아주 행복하고 평안하고 좋습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 오셨는데 제가 설교를 잘 못하더라. 하하하하. 괜찮아요. 웃고 지내는 것이 큰 축복인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거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그러므로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육체가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3. 2,3인이 모인 곳에 주님도 와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예수님이 나도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 이유는 여러분 우리 여기 거의 만 사람 가까이 왔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격려해주면 주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로 22절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아왔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과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로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화목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혼자 살기로 되어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서로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손잡고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은 다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화목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목을 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화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너 두고 보자.’ 두고 보자고는 화목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실수가 많은 것처럼 다른 사람 실수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루에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잘못했다고 오거들랑 일곱 번 용서해도 됩니까?”하고 제자가 물으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줘라.” 490번이라도 용서를 해주고 서로 손잡고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지 원수가 되어서 밀고 당기면 절대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18장29절)’ 우리를 우리가 어디 가든지 주님이 우리와 같이 있으므로 주님을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 모였으면 무슨 일을 해도 기도하고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지내는 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과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오늘 예배 필하고 난 다음에 병든 사람은 다 낫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처럼 낙심하여 절망하게 된 것은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유대 광야로 도망을 쳐서 로뎀나무에서 절망적이 돼서 “이제 나를 죽여주십시오.”하는 것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위기를 처할 때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야훼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열왕기상19장14절)’ ‘나 밖에 없다. 외롭다. 누구하고 의논할 사람이 없다.’ 굉장히 고독한 인생으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죽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도 혼자 살려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보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라’ 엘리야 혼자가 아니라 칠천 명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하고 찾아서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말씀을 늘 하고 계신 것은 외로울 때, 고독할 때,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니 저가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너희를 건지실 것이라. 그가 날개 밑에 여러분을 피하게 해주신다. 밤에 놀램과 낮게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니 재앙이 네가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 눈에 안 보이나 믿음으로 나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혼자라고 생각해도 실제로 알고 보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혼자 있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떠나기 전에 제자들 앞에서 어디론가 멀리 간다고 말씀하니까 제자들이 샛노랗게 되었어요. “아니, 있는 것 다 던져버리고 주님을 3년 동안 따랐는데 이제 우리를 그만 두고 가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가지만 난 곧 온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오래 떠나있지 않습니다. “내가 곧 온다.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다른 보혜사를 주사 항상 너와 함께 같이 계신다.” 보혜사, 그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한 것은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너를 돕기 위해서 항상 너와 같이 계신다.’ 그걸 보혜사라고 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돕기 위하여 보내사 항상 같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였는데, 예수님이 꼭 같은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의논하고 나가면 성령님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여러분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살든, 여럿이 살든, 주님과 함께 해야 외로움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온갖 전자기기가 넘쳐나서 이웃이 없어도 혼자 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전자기기가 로봇이 되어서 우리 생활 주변에 나타나지만은 그것들이 사람처럼 희로애락의 정을 갖지 않는데 쇳덩어리 인생과 마음이 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만이 메워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고독을 메워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가족을 버리고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속사람은 여러분은 사람, 물, 고기 덩어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사람은 천사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기뻐하고, 찬양하고, 아버지 앞에 즐거움을 나타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시편50편23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네가 뭘 하겠냐?” 이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요. 훌륭한 분이요. 앞으로 천국을 하나님과 함께 이끌어갈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