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으신 예수님
(사 53:7-12)

2016.5.1. 주일4부예배

<서론>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으로 더러워진 부패한 인간의 핏줄을 이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몸만 빌려서 성령으로 태어난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들여 온 몸의 피를 다 흘리시고, 6시간이나 고통 받으신 후, ‘내가 다 이루었다’하시고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죄 덩어리가 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니 하나님이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바로 보지 아니하시고 등을 돌렸습니다. 말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가운데 하나님조차 고개를 들쳐버리니까 그가 외친 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가 가장 겁을 먹고 있던 것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3년 반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의식주를 같이 하며 진리를 가르쳤던 제자들이 다 달아났습니다. 한 마리도 남지 않았습니다. 한 분이 아니고, 한 마리입니다. 그 중에 열 두 명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다른 사람은 이름도 없이 소리 없이 도망쳐 버렸고, 언제나 큰소리 하고 뒷감당 못하는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 들려오는 고함소리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님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인데 전부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 속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러고 육체의 고통은 우리가 어떻게 형용하겠습니까? 손에 손 밑에 가시가 들어도 아파 못 견디는데,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로마 군인들이 씌웠습니다. 막 눌러 씌웠습니다.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못을 양손에, 양발에 포개서 찔렀으니 그 아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섯 시간 동안 그 고통 가운데 계시면서 그를 견뎌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 가실 때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이 뼈 속에서 나온 말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하늘 보좌 버리고 사람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을 걸었는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어 가지고서 버림을 받았으니 말로 다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이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그가 올라올 때 그 마음이 흔들거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 안했지만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 다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과연 이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시험이 다가오면 마음이 흔들거립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모습이 변하고 성령께서 그 산을 뒤덮고 모세와 엘리야, 두 구약시대 선지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인도해낸 분이고,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격려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이 되어 고통스러울 때 격려의 말씀을 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한마디 말, 그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잘했다고 할 때, 그것이 보통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시련을 통할 때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 비관적인 말, 욕하는 말이 그 생명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의 격려하는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내려와서 곧장 예루살렘으로 와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가끔 마음이 흔들흔들한 것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도 흔들흔들 해봤었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영으로,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통하는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본론>
1. 나를 대신하사 벌 받으신 예수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모든 면에서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은 내 탓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탓이 아니고, 우리 남편 탓으로, 우리 아내 때문에, 서울 시민 때문에, 김정은이 때문에, 탓으로 돌려선 안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탓으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사 예수님은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심이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도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세상 것 다 잃어버려도 갈보리 십자가를 놓쳐버리면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죽어도 갈보리 십자가를 끌어안고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갈보리 십자가를 끌어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보리 십자가 거기에서 주님이 나를 위해서 해주신 역사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평하다가 뱀에 물려 죽게 됐는데, 수많은 사람이 뱀에 물려서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어갈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뱀을 만들어서 높이 달아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서 뱀에 물린 사람마다 그걸 쳐다보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이 바로 나를 상징한 것이라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의 뱀, 사탄에서 물려서 온 인류가 죽어가고 있는데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지만은 그 장대에 매달린 뱀을 쳐다보듯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쳐다보기만 하면 나음을 얻습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이는 절실하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주님이 날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당히 중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중요한 사람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 대신 죽을 턱이 있습니까? 이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들’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 한 사람과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걸머진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여기 의란 것은 한평생에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가 의인 것입니다. 천당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모기 새끼 한 마리만한 죄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는 사탄의 성품이요, 부패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걸머진 자기가 죄 덩어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청산해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데 그 의로움은 죄를 일생에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한 번도 안 지은 분 한번 손 들어봐 주십시오. 제가 칭찬을 해주길 원합니다. 칭찬 아니라 업고 이 교회를 한 바퀴 돌라 해도 돌 것입니다. 나는 죄를 안 지은 사람 한 사람 봤습니다. 대전에서 부흥회 할 때, 그날도 꽉 장소에 사람들이 찼는데 “여기에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 앞으로 나와 보라” 하니까 한 사람이 손들고 나오려고 하는데 뒤에 허리춤을 잡고 잡아당기고 그래요. 한 40대 되는 남자인데, 그 부인하고 같이 정신병 고치러 나왔다가 죄 없는 사람 나오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일어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정신병원에서 우리 남편 데리고 나왔어요. 불러내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정신병자 이외에는 죄를 안 지었다는 사람 없구나. 우리가 다 죄를 지어서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보혈이 우리 죄를 씻어주신 것입니다. 한 번도 죄를 안 지은 사람처럼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같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죄 덩어리가 하나님 의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나 위하여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그 다음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허물을 걸머지고 있는데 허물은 제하고 성결함을 주기 위한 보혈인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뭐고 허물은 뭐냐고 꼭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죄는 성품 그 자체, 생명 그 자체의 모습이 죄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동양 사람은 DNA가 동양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이 안 됩니다. 동양사람 덩어리니까 우리는 동양 사람인데, 서양 사람이 동양사람 안 됩니다. 나는 하루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서양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데 아주 얄미울 정도로 우리 한국말을 잘해요. 아주 문자는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한국사람 아닙니다. DNA가 서양 사람인 것입니다. 죄인은 DNA가 죄인이 돼있습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허물은 죄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저지를 일들이 허물로 칭해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입고, 먹고, 마시고 한 모든 것은 다 허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없는 사람이 없어요. 죄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어서고 앉는 곳에 전부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의 열매는 허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피를 흘려서 죄를 사할 뿐 아니라 허물도 씻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결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5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영원히 효과가 있는 보혈인 것입니다. 과거에 죄와 허물을 청산하고 말았다면 현재 어떻게 합니까? 미래의 죄와 허물을 씻는다면 현재에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 대신하여 피를 흘렸는데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피인 것입니다. 영원이란 것은 영원한 미래도 되고, 영원한 과거도 되고, 영원한 보혈은 어느 곳에나 계시면서 언제나 동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십대 소년이었을 때 용서하고 씻어주신 그 보혈이 지금은 팔십 노인이 되어서도 용서하고 씻어주고 그대로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옛날 것이 되지도 않고, 미래의 것이 되지도 않습니다. 항상 현재의 나를 씻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들어가면 샤워를 하지 않습니까? 미래에 할 샤워, 과거에 할 샤워만 있다면 현재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샤워는 언제나 스위치만 넣으면 물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피는 무릎만 꿇으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여 오늘 내 영혼을 목욕시켜 주시옵소서. 오늘 정하게 해주시옵소서. 죄를 씻으시고 허물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꼭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병 고침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때 양 날개를 가진 구주인 것입니다. 한쪽 날개는 죄를 사하시고, 한쪽 날개는 병을 고치시고, 하나님이 병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예수님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병 안 고친 데가 없습니다. 병자들은 다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함조차도 ‘야훼 라파’라 ‘병 고치는 하나님’ 그러므로 십자가 바라볼 때 예수님이 과거에 병을 고쳤다. 미래에 고칠 것이다. 우리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과거의 예수님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며 미래의 예수님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어떠하다고요? 동일하시다. 그럼 지금 나의 죄를 사했으면 지금 나의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큰 실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날개만 치시고 한 날개는 접어놓은 것. 죄는 사하지만 병은 안 고친다. 지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앞으로는 안 나오고 뱅뱅 돕니다. 뱅뱅뱅뱅. 뱅뱅뱅뱅. 앞으로 나가야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기 때문에 한번 너풀거리면 교회가 쫙쫙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의 병을 사생결단하고 건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병을 짊어져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유대시대에 삼십대를 맞으면 죽는데요. 그 군인들이 무지막지하게 쇠고랑을 가지고서 치면 마지막에는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못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 맞았습니다. 온 덩어리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저 사람이 나음을 입고, 저 사람이 나음을 입었다는 말 아닙니다. 나하고의 관계인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패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음으로 어찌할 수 없이 여러분이 경험 하거나 못하거나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몸이 찢어져서 질병의 대가를 다 청산해 버리신 것이니 이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 신앙을 만세반석 위에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료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103편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느니라’ 그가 베푸는 은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날 여러분을 불러서 복음 전도자로 삼으시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실 것입니까? “너 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하고 사람들에게 죄 용서함 받는 복음만 전하고 병은 못 본체 해라. 내가 있을 때는 했지만 이제는 안한다.” 그렇게 말했습니까? ‘저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내가 채찍을 맞음으로 다 나음을 입었으니 예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한 날개 가지고 날려고 하는 것은 절름발이 복음인 것입니다. 두 날개를 가지고 날아야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비상하게 발전한 것은 두 날개를 가지고 날개 쳤기 때문에 발전한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와 치료가 함께 성도들에게 나타나서 교회가 일취월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자란 것입니다. 여러분, 지역장 구역장도 계시고 그냥 평신자도 계시는데 예수를 전도하라고 하면 그냥 입술로 죄 사함을 받는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다른 날개도 있습니다. 병도 고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 날개를 잊지 마십시오. 나의 병을 대신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구원의 말씀이 나오면 반드시 병 고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바늘이 가는데 따라 실이 있는 것처럼, 예수 용서하실 때 언제나 병이 치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저주를 예수님이 담당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땅에서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겠다고 아담을 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저주를 몸에 걸머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라디아서 3장 13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니 이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시고 “내가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저주를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여러분에게 주기 위해서 매달렸기 때문에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이 나의 저주를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니 나는 복덩어립니다.” 그렇게 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수하시고 얼굴 닦기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시고 “야 너 복덩어리다. 아브라함의 복을 네가 받았다.” 그렇게 말하십시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너희 입술에 말한 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덩어리라고 자꾸 말하면 그 사람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나의 죽음을 대신하시고 부활, 영생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죽을 이유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당신 스스로 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음부에 내려가서 사흘 동안 음부에 계시다가 죄와 허물을 다 청산하고 의로움 회복했을 때 주님은 음부를 극복하시고 부활해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죽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천국 대합실인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좋은 곳이지만 그건 대합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책임을 지고 앉아있는데 우린 천국 대합실에서 예수님 강림할 때를 기다리고 예수님이 강림한 날 같이 아베크해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음부의 대합실입니다. 음부라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대합실입니다.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에도 보면 부잣집 대문 밖에서 얻어먹던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받듦을 얻어 낙원으로 들어가고 천국 대합실에 가고 부자는 죽어 그는 마귀에게 끌려서 음부에 내려갔습니다. 지옥의 대합실로 간 것입니다. 천국 대합실과 지옥 대합실은 서로 건너볼 수 있지만 가운데를 갈라놓아서 왔다갔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얼굴은 보아도 교제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다 천국 대합실로 들어가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죽음을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낙원 내 낙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히 끌어안고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상징하는 떡을 먹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가 된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겁낼 필요 없습니다. 낙원 대합실은 지상 대합실보다 훨씬 좋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절~26절)’

2. 우리의 잘못된 생각
우리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잠잘 때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면 갈보리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하나님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가 지금도 나의 영혼 속에 흐르고 있으니 내 영혼이 정결하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허물을 다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질병을 제하여 주시고 치료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 저주에 고난 받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사망에서 음부에서 건져내 부활 영생 천국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기도 한 번, 두 번, 세 번 하게 되면 아무리 잠이 안 오는 사람도 잠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오중복음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될 하나 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지식을 알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면 큰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주가 아니다. 우연히 전한 것을 누가 믿겠느냐? 출생 과정과 성장이 너무 평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런 평범한 상태로 태어났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나서 말구유에 강보로 싸서 누워있을 때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왔고 천사들이 찬양을 불렀다 하면 “아이고, 그것은 예수님께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신라의 박혁거세도 그랬다. 우리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흰말이 알을 하나 놓고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알을 까니까 박혁거세더라.” 아 그런 이야기는 힘껏 해봤자 사람들이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으면 안 믿는 자들이나 원수 마귀가 와서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보통 아기예요. 봄이 오면 연한 싹이 돋아 오는데, 바람이 불고 수분이 없는 메마른 광야에 돋아 오르는 싹 같으니까 그거 발로 밟아 버리면 부러질 것입니다. 그리고 흙이 없어서 뿌리가 겨우 붙어 있는 참 보잘 것 없는 그러한 상태로 어린 아기로 자라왔단 것입니다. 그러고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삼십 세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장 3절에 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일을 하려고 하면 안하는 사람이 다 배척을 합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인사가 되고 싶거든 한국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됩니다. 아예 죽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도 위대한 사람으로 안 태어난 것은 유대인이 우리와 성격이 꼭 같아서 위대한 인물로 태어나서 삼십 세가 되기 전까지 깃발을 날렸다면 십자가에 올라갈 시간도 없이 미리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하고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도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의 태어난 배경이 별 볼일 없고 평범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가족들도 그를 위대하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른 살이 되어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난 다음 성령이 임하여서 하나님의 사명이 그 때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년 반 만에 주님께서 사역을 마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정황을 확실히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6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는 실로 진짜로 가짜가 아닌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여기 우리라고 보지 말고 나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나는 완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고난과 질병도 내 고난과 내 병을 예수님이 짊어졌고, 찔림은 우리가 허물을 당해서 몹시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찔림을 받아서 허물을 청산해 주었고 영원히 산 죄악도 예수님이 변화시키기 위해서 대신 상함을 입었고 징계를 받아서 우리 평안을 허락하여 주었고 채찍에 맞음으로 병에서 고침 받고 치료함을 입었으니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관계를 꼭 여러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됐느냐? 죄의 용서를 받았다. 허물의 사함을 받았다. 병 고침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 부활 영생 천국을 받았다. 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으나 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통이 우리 위해서 받은 고통이요 나 위해서 받은 고통으로 그를 통해서 주신 오중복음을 우리가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 생각이 달라지고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용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죄악을 야훼께서 그에게 담당시키심
여러분, 우리가 오늘 고난당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가슴 저미도록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야훼께서 청산하기 위해서 그 아들에게 이 짐을 지우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짐을 그 아들에게 맡겼으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참 귀하게 여기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사야 53장 7절로 9절에 보면 아버지가 어떻게 여러분을 건지시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아버지가 보내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을 끌어안고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 무덤이 악인과 같이 있었다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어갔으며 그 무덤이 주인이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이기 때문에 부잣집 무덤에 더부살이로 들어갔다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가 악인이 되어서 악한 사람들과 같이 섞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대신해서, 예수님의 고난은 무엇에도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받은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고난은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첫 아담이 반역한 것을 깊이 가슴 저미며 아버지께서 이제 마지막 아담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인류를 만드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 우리는 새것을 체험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면서 주님은 이를 통해서 죄에서 씻어주고, 허물을 벗겨주고, 병을 치료해주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면서 희망을 주시고, 부활 영생 천국을 주시는 역사를 주시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오늘 이 시간 이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테이블을 우리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성찬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