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종교도 있나요?
(눅 10:25-37)

2016.07.03. 주일4부예배

<서론>
‘사랑 없는 종교도 있나요?’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잠시 후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가고 그 역시 도와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내려가 치료해주었다는 말이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본론>
1.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장엄한 형식과 의식을 베푼 제사장이 아무리 엄격히 종교행사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좋은 종교라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유대교의 예식을 집행하는 중심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는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다닙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지대에 있으니깐. 내려가는데, 그 여리고는 세속적인 도시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술 취하고, 방탕한 도시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덮쳐서 돈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도 보면 여리고 평지에서 곡식을 농사를 지어서 예루살렘에 와서 팔고, 돈을 잔뜩 지갑에 넣어서 여리고로 내려오다가 잡혀서 얻어맞고, 돈은 다 뺏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만 그렇게 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었다는 거예요.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타락해서 여리고로 내려갔는데,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종교적인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 도와주지 않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사랑은 없습니다. 강도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보고서 율법의 준행자인 제사장이기 때문에 상당히 고약한 얼굴로 교훈을 하고 그대로 돌아가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 레위인도 오다가 역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그 강도를 보고 강도 맞는 사람보고 꾸짖고, 흉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주고 꾸짖어도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사랑이 없이는 종교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내려가지 않고서 이리저리 여행을 하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은 개라고 하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외국에 정복당해서 포로로 잡혀갈 때, 포로 잡혀간 그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순수한 유대인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위해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사람은 기름이나 포도주를 언제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칠어진 피부에 기름을 칠하고, 포도주는 병균이 들어 옮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부은 것입니다. 그러고 붕대를 감고 있지 않습니다. 긴 옷을 입고 있는데, 자기의 옷을 찢어가지고서 그 상처 있는 데를 감아 묶어 주고, 호텔로 갑니다. 그 사막이나 들에 있는 주막집이 호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가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그 주막집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것으로써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내가 올 때 돈이 더 들었으면 사업차 돌아오는 길에 돈을 갚아 주겠다”고.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좋은 이웃이 되겠느냐? 말할 필요 없이 선을 행한 사람이 좋은 이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누가복음 10장 30 ~ 31절)’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오직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지만 그는 그 마음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종교보다도, 율법보다도, 의식보다도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기는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냐니까는, 특별히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우연히 내려왔다가 말이 없어 그저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지나가다 그 상황을 보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입원을 시키고, 치료비 일부를 주면서 집주인에게 잘 돌보아주기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꾸짖지도 안하고, 교훈도 하지 않고, 이미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보고 꾸짖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적인 교훈을 한들 그 교훈이 그를 살리겠습니까? 먼저 살려놓고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은 이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입니다.

2. 이 세 사람 중 누가 선한 사람인가?
오늘날 예수님께서 이 교훈의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율법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을 한다, 레위인 같은 의식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도, 의식주의자도 아닌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꾸짖고 심판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법이니깐 법을 어기는 사람만 봅니다. 다른 사람을 전부 법의 안경을 가지고서 보아서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꾸짖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의 본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로 5절같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꾸짖는 이유는 율법을 자기가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고,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라고 온갖 결점을 다 드러내고 율법을 사용해서 위협을 가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이웃을 살피고 꾸짖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미워하는 것입니다.
의식주의자는 성전의 의식을 잘 지키고 행하는데 주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요사이에도 형식주의 신앙, 주일 교회 열심히 나가고,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다 따라서 행하되 자기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존경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형식주의자인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레위인에 속한 것입니다. 이 사람도 강도떼들을 만나 얻어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비난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 의식주의자들은 내용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내용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레위인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내용으로 보는 자비한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형식과 의식 속에 있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함은 율법과 의식을 다 이룬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면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율법을 가지고서 평론만 하면 그것은 종교가 타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보시는 선한 일
하나님께서는 훌륭한 설교, 천사 같은 웅변, 탁월한 지식,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위선자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고. 대단히 엄한 판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설교를 하고, 천사 같은 웅변을 하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면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고 존경하지만은 하나님은 내용이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위선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내용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사람을 소개할 때 보면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어느 대학에서는 석사 학위를 받았고, 어느 대학에서는 박사 학위를 받고, 그 경력을 보면 대단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제로(0), 아무 가치도 없다. 무용지물이라고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그럼 또 구제를 크게 하고 전력으로 봉사에 종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이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종교단체에 소속해가지고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종교가 있습니다. 요사이 중동에서 일어난 종교가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폭력행사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을 갖지 않고서 단체와 사람들의 모임에 소속되어서 사람들을 죽이고 불안과 고통을 가져오는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4. 참 사랑의 모범은?
참 사랑의 모범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한복음3장16절)’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에 쓰러져 버림받아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린 그 사랑은 참 사랑인 것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한 종교가 아닌 용서와 회개를 하게 도와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자꾸 남을 흉보고, 남을 얕잡아 보고, 남의 잘못을 욕하고, 자기가 대단한 신앙인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만 있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주님께서도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잡으면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제 2의 기회를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재생의 기회를 줘요. 다시 한 번 시작해보는 거다. 성경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성전에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침을 당하고, 그를 잡은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이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결점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고, 결국 버림받게 만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무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깨너머로 글을 본 사람들이 돌을 놓고 그대로 다 도망을 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저들의 감추인 죄를 손가락으로 적으심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 돌로써 때린다면, 그 다음 자기가 먼저 돌에 얻어맞아야 될 것으로 알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그 여자를 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어 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는 것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 짓는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개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 터이니 그렇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다른 데와 다른 것은 교회에 나와서 조금만 잘못하면 교회법을 동원하든지 국가법을 동원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위대한 일을 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있는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줘야 된다. 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회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지고, 다음 날은 금번 날보다 좋아지고, 내년에는 금년보다 좋아지고, 변화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때 이웃의 잘못을 비평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도움을 베푸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덮어서 그 사람이 재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한다. 용서를 해야 제 2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용서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 제 2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까? 율법을 시퍼렇게 칼날을 세워서 심판을 내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도살장이지.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자기도 똑같이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우리는 심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제 2의 기회를 가지도록 용서를 해주고 힘을 돋우어 주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이라고 하면 무법천지를 말하는 거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법천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와 허물을 심판하는 것은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속의 은혜로 회개와 용서를 계속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자를 잘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꾸짖으시고 잘못한다고 하시지만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용서하고 희망을 주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용서를 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리새교인과 세리가 두 사람 교회에 기도시간에 와서 기도하는데, 바리새교인은 “하나님! 나는 십일조 내고, 하나님을 법대로 잘 섬기고, 주님 기뻐하는 일을 하니 저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 저 세리같이 죄인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변화 받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랑하고 이웃 흉보고 나가는데, 세리는 교회에서 가슴을 치며 “주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고는 성전을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누가 더 의롭다 인정을 받겠냐?” 제자들을 보고 물으니깐 사람들은 “말할 필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의롭게 살고, 죄 지은 사람을 평론한 사람이 더 의롭게 되었다고 칭찬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하기를 “자기가 죄인이 죄를 고백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라고 간구하는 사람이 더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다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죄를 지어도 용서를 받고 재기할 마음만 있으면 주님은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아 재기할 힘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돌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데 우편 강도, 좌편 강도 그 강도는 국법으로도 무서운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형벌을 당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주님 우리는 평생 죄를 지었으나 주님은 지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기회를 한 번 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기회를 주시더라도 나무에 매달려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국가의 법에 의해서 형벌을 했기 때문에 정죄 당하여 지금 심판받아 죽고 있는데, 주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참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공평치 못하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죄를 짓고 고통을 가져오다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에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서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볼 때, 이 너무하다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독생자가 인생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자기의 고통을 끝까지 당하고 청산했기 때문에 회개하고 재기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이 주께 나오면 주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으로써 주님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아무리 죄악이 관영한 곳에 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자는 주님이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를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그의 있는 대로 우리가 너무 쉽게 사람을 평론하거나 심판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자리에서 “야 이놈아! 어쩌다가 강도를 만났냐? 이거 나쁜 놈 아니냐? 너 잘한 일이 있느냐?” 교훈을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 교훈이 그 사람을 바르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웃의 돌보심을 받아서 목숨을 건지어 제 2의 기회를 가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져서 기회를 얻어 인생의 기회를 한 번 더 갖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체생활을 하면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 훌륭하지 못 합니다. 단체가 살다보면 율법주의자들도 있고, 의식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사용할 때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평론해주나, 재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을 깨달아 알고, 회개하고, 제 2의 기회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율법주의자가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회개해서 다시 변화 될 기회를 주지 않고 막 받아쳐서 심판을 해 버리는 것은 그건 종교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자니 천사가 모여서 사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잘못한 일도 있고, 고약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언제나 남편은 아내가 재기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되겠고, 아내가 남편을 용서해 주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 잘 못 한다고 호통을 치고 앞길을 막아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아 다시 일어나서 훌륭한 사람이 된 사례를 이야기 해 주면서 격려를 하고, 용기를 얻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같이 큰 기관은 훌륭한 사람도 많이 들어오거니와 나쁜 사람도 많이 옵니다. 여러분 앞에 선 조용기도 나쁜 놈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만 찾고 나쁜 놈에게 기회를 주지 아니하면 그 나쁜 놈은 영원히 나쁜 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를 줘야 돼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주 나쁜 놈이 지금 벌을 받아 죽어가는 데도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낙원에 들어가는 기회를 줘요. 그것을 바라보고 나쁜 놈들이 서로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여러분 생애 속에 잘못된 것을 지적해서 꾸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알 것은, “주님 날 좀 밀어주십시오. 나도 일어나서 주님을 따르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래! 그래! 그 말 듣기를 원해서 내가 너를 꾸짖은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도 버리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재기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그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네 눈에 있는 대들보는 못 보고 눈에 티가 있는 이웃을 정죄하느냐’ 과장하게 말씀한 것이지만 내 눈에 대들보 같은 잘못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심판을 할 때는 언제나 희망을 주는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교회로 잘 이끌어서 돌보아 주어서 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다. 우리 교회가 사회 속에 있어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사람을 새 사람 만들 수 있는 처소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서로 마음에 뜻이 안 맞는다고 치고 박고, 때리고, 죽이고 하면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구출하겠습니까. 교회는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교회에 계신 것은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 위해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새 사람이 되지 못 합니다. 제 2의 기회가 있으면 하나님이 성령께 “성령이여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를 변화 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해서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사랑을 주시고, 믿음 주시고, 소망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늘 여러분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기다리고 있으므로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며 성령님을 경배하고, 믿고, 따라 나가면 성령은 여러분을 결코 변화시켜서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능으로 되지 않는 것을 성령은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 좋은 사람 만드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모셔드리면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 받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몸을 찢어서 살을 우리에게 주시고 피를 쏟아서 우리에게 음료로 주셔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변화의 원천이 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모여서 주의 살을 먹고, 주의 피를 마시고, 주께 감사하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여서 훌륭한 변화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