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극한적인 고통과 한없는 위로 (사 53:1-12) 2016.10.30 주일4부예배. <서론> 오늘은 ‘극한적인 고통과 한없는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어가던 주님을 바라볼 때 아무리 동정한다 해도 우리 동정은 견줄 데가 없습니다.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 산에서 매달려 고난을 당하는 그 모습은 우리로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축복의 만 분의 일(1/10000)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몸 찢고 피 흘리신 그 대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고 죄와 불의를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정 없는 대가를 지불했지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와 선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값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선물도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인 은혜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어떤 행위를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은혜와 선물은 순전히 공짜로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위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누구도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린도후서 1장8~9)’ 엄청난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때문에 그 고난을 이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위로가 없으면 고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도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고, 어린이가 엄마를 보면 대단한 강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위로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절망에 빠진 이 세상에 위로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했으니까 그 고난의 높이와 깊이를 체험,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한없이 큰 높은 고난에 그것을 잴 수 없이 감사하다는 표현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다 이루었다(내가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세상 뜨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남겨 놓은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조그마한 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어요. “내가 다 이루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는 너무나 위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로써 잴 수가 없으니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고르자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통도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으면 그렇게 깊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은혜라는 것은 깊은 고통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주시는 은혜는 우리가 가지고 당한 고통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너무나 은혜가 높기 때문에 고통이 아무리 깊어도 예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메울 수 없는 고통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평안과 믿음, 소망, 사랑,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첫 인류 조상 아담이 우리에게 죄와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망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죄 짓지 않은 의인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 사망으로 종살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로 18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의 혈통을 통해서 온 세상 사람이 다 죄를 지었어요.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 인류의 조상을 아담이라고 부르니까 처음 아담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의 탈을 쓰고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 한사람을 통해서 온 세계 70억명이 죄인으로 태어났는데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십자가 걸머진 은혜로 주시는 구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우리가 선물로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고린도전서 15장 21절로 22절에 보면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다 살았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살아났다.” 참 죽는 것도 쉽고, 우리 보기에는 사는 것도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쉽게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서 죽지 아니하셨으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중형벌과 삼중절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은 다 버림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저주를 받았다는데 사람은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저주를 받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반역한 그 죄가 환경의 저주를 가져옵니다. 땅에 저주를 하지,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 대화를 못할지언정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는 땅, 점령한 처소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우리가 사는 땅이 저주 받아..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살아야 되기 때문에 오중형벌과 삼중절망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죄악의 벌을 받으니까 첫 번째 죄요. 두 번째 허물과 더러움을 씻지 못하고 허물과 더러움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이 형벌이요. 그 다음엔 병들고 육체가 죽는 것이고, 그 다음엔 저주와 가난으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는 것이고, 다섯째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이 죽고, 범사가 저주를 받고, 육체가 병들어서 고난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형벌을 당한다는 것은 극악한 범죄자나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로써 가능한 오래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도록 고안된 형벌이 십자가 형벌인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으면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채찍의 끝에 쇠고랑인지 짐승의 뼈 같은 날카로운 것을 달아서 때리면 몸에 파고들어가서 땡기면 몸이 터져서 피를 쏟는 것입니다. 원래 40대 때리게 되어 있는데 40에 하나 매를 그대로 용서를 안 해주고 때리면 죽어버린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으면 먼저 끌려가서 채찍을 당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을 맞으셨으므로 쇠나 뼛조각이 달려있는 채찍에 예수님이 맞을 때마다 살점이 터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후에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지고 갈 힘조차 없었으며, 그래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 산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탈수증이 생겨서 물을 몹시 원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모욕적으로 아주 식초가 되어 있는 포도주를 마시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면 3일 동안 살아 있습니다. 그 달려서 피를 흘리면서 3일 동안 달려있는데 예수님은 6시간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얼마나 부대꼈던지 예수님은 6시간 만에 “다 이루었다.”고 세상을 뜨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한정 없는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고통을 다 당한 것입니다. 2. 극한 고통이 가져온 한없는 위로(극한 고통이 가져온 극한 위로)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극한 고통이 극한 위로를 가져옵니다. 그가 사람으로 와서 인간을 위해서 한없는 고통을 당했는데 그 예수님이 당한 고통은 인간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한없는 고통을 당해도 예수님께 나오면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위로를 받지 못하면 사람이 살아나갈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더라도 예수님께 나가서 기도하면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고롭고 피곤하고 우울증이 마음을 짓누를 때 참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람 마음이 쇠약해지고 우울해지면 지옥에 가는 것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그 마음을 위로받지 못하면 정신병원에 가야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저는 고통의 수렁 속에 빠졌습니다. 제 마음에 위로를 주셔서 고통을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의 은혜가 와서 마음에 고통이 사라지고 아주 행복한 위로의 영이 마음을 접수해줍니다.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고 즐거움이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참 그 위로 그것은 사람의 말로써는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3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모습을 여기에 기록한 것은 이만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온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형편에 있어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위로해 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인간 고통을 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하나님 아들로써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산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나와 꼭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당하신 극한 고통은 극한 위로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이 아무리 심할 지라도 여러분 고통을 위로로써 치료하지 못할 그리스도의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사야 53장 3절로 4절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고난당한 것은 우리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당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해석해서 하나님에게 자기가 잘못해서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제가 왜 여러분에게 어렵게 해설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이사야 53장만 알면 그 속에 천국의 은혜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도 이사야 53장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면 정말 대단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죄를 짊어지고 질고를 짊어지고 슬픔을 당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6절에 그는 실로, 가짜라는 것이 아니고,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쇼한다고 인간을 위해서 고난당한 척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진짜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질고가 가져오는 슬픔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찔렸습니다. 창에 찔렸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창으로 찌른 건데, 예수님 기록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찔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 허물이 누구 허물인가 보니까 내 허물이요.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하나님 앞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는데 그것은 우리 죄악 때문인데,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될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것, 그 징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고, 우린 하나님 앞에 화목하고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심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목자를 떠나는 양처럼 혼자서 반역을 하고 나갈 때가 많은데 그런 모든 죄를 예수님께 맡겨서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곁에 오면 우리 인간 존재를 영과 혼과 육의 존재를 예수님께 다 맡겨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다 지고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3. 우리를 대신한 예수님의 고통(우리를 대신한 그의 고통) 그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시기 전 6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계시를 받아서 적은 것인데,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면, 자기가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이상 입을 열어서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내가 지은 죄가 아닌데요. 이건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위의 잘못을 다 자기 것으로 끌어안았으니깐, 그러니깐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죄로, 허물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변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선지자의 사역을 보니깐 그렇게 고소를 당하고, 흉악하게 벌을 받고, 고통을 당해도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으로 고난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책임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이 죄도, 저 죄도 우리가 지은 것 다 예수님이 “내가 지었다.”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할 말이 없으십니다. 예수께선 “너 행한 것 모든 것은 다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내 죄다.” 그러니 예수님, 예수님이 내 일생의 죄를 대신 짊어 지셨으니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상 우리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장 8절)’ 마땅히 형벌 받아야 돼요, 여러분도 형벌 받아야 될 사람이요, 마땅히 형벌 받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 그 형벌은 예수님께 다 넘겨지고, 우리는 용서와 의를 받게 되고, 예수님께서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은혜와 용서와 사랑, 우리가 잘했다고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용서 받고, 사랑 받고, 우리가 오직 믿음과 감사로써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조금 이룬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이루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님이 다 짊어 졌다. 그래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음부까지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고,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롭다고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신 그 의의 뜻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분 계십니까? 저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죄를 안 지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목회할 때나, 은퇴하고 당회장을 받들어서 설교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근데 사람들이 자꾸 말하기를 제가 겁이 나서 곁에 못 온다고 그럽니다. 저는 성격상 무섭지도 아니하고, 또 무섭게 할 이유도 없고, 그런데 겁이 나서 못 온다고 그렇게 말 합니다. 사람끼리도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용서와 사랑으로써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믿음 하나가 천지간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으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자랑하고, 우리 스스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로 12절에 보면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이사야 53장 10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위해서 상함을 받고, 우리 질병을 예수님이 받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장 12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우릴 위해서 고난당한 것을 크게 기뻐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에 대한 용서와 의, 병에는 치료와 건강, 이 두 가지는 주님이 결사적으로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한 것 3분의 2(2/3)는 병 고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도시와 촌락을 다니면서 죄인을 찾아서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찾아서 고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 용서와 치료를 베풀어 주시고 가셨는데,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뜨겁게 믿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든 일을 위해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조건을 다 이루었다.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나가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조건을 다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여러분의 하나님 이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고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는데 필요한 조건을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조건이요, 여러분의 공로요, 여러분의 자랑이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세상에 오셨으니깐 굉장히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때문에 가난하게 됐어요.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부요케 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으면,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 나를 복 내려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가난합니다.’ 아주 잘못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따라 말씀해 보세요. “날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나로 부요케 하려 함이라.” 큰일입니다. 박수칠 일이 아니에요. 큰일입니다, 큰 일. 예수님 하나님이 이 땅에서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그 대가로 여러분을 부요케 하려 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요케 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서, 그래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다가 나만 천당 가겠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안 될 일이지요.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함께 삶을 즐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케 해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요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해 보세요. “내가 부요하게 되어야 된다.” 이게 내 믿음의 결과,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폭포의 아래에서 폭포를 쳐다보면 그 물기둥이 쏟아지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 고난의 처절함과 극한 슬픔이 모두 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나의 더러움을 씻어주기 위해서, 나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나의 저주를 제하기 위해서, 나의 죽음 대신 영생을 주기 위해서 고난당했다는 것을 쳐다보면 대단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루에 수십 번이고 갈보리 십자가를 쳐다보고, 쏟아져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입술로 받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장 10절)’ 여러분 아무리 알아도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요. 말씀이 대단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 보혈로 나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서 그 보혈로 더러움이 씻어지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입으로 말을 하면 그 말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보고 “나는 건강하고, 튼튼하고, 씩씩합니다.” 그 말을 하면 그 말이 여러분을 그렇게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하여 저주를 받았으니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주는 삶을 살아야지, 얻어먹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지. 우리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이런 짧은 세월 동안에 잘 살게 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사이 외국 사람들이 많이 한국에 옵니다. 외국의 목사들과 전도사들, 교역자들이. 오면 저에게 꼭 와서 묻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국은 이렇게 잘 살게 됐느냐?”고. 왜 구라파 사람들이나, 남미사람들이나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거든. 그러면 제가 대답하기 전에 어깨 좀 펴고 어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서 삶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 큰 소리 할 수 있어요. 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써 받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쳐다보면 감동될 일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위로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를 가지고 여러분 고통을 당할 때 확 이 위로를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위로를 받게 되면 아주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좀 무시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간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