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은혜
(롬 8:32-39)

2016.11.13. 주일4부예배

<서론>
‘고통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람들은 늙은이나 젊은이, 어린아이들까지도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아담은 우리 있는 데까지 이 고통을 상속으로 주고 있습니다. 왜 고난이 이처럼 끊임없이 다가오느냐? 그 질문을 우리는 마음속에 합니다.

<본론>
1. 불순종과 고난
천사가 아닌 이상 이 세상에 고통을 어떻게 이기고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불순종이 고난을 가지고 오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로 15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들어오면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경쟁은 괜찮지만, ‘저 사람이 망해주면 내가 우뚝 서겠다. 저 사람을 망하게 해야 된다. 나만 성해야 된다.’ 이런 잘못된 경쟁 심리는 우리를 죄를 짓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유대나라는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늘 받아 왔습니다.
요나시대는 앗수리아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리아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앗수리아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와서 임금과 신하들, 주요 인사들을 그냥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녀들에게는 눈알을 뽑아 버립니다. 눈알을 뽑아가지고서 끌고 가니깐 사람이 두 눈 뜨고도 종으로 끌려가면 기가 막힌데, 눈알이 뽑혀서 끌려가고, 모든 사람들은 노예로 육체노동의 짐승처럼 끌려갔었습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앗수리아가 망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저 망하지 아니하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내렸습니다. 그 계시가 뭐냐 하면, ‘앗수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만에 무너지겠다. 그러므로 네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40일 만에 수도는 무너지리라!’ 그렇게 경고하라고. 그 말을 듣자 요나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 대항하던 앗수리아를 40일 만에 멸망시켜 주겠다니깐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내가 왜 우리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좋아할 것이지, 망하지 말라고 경고하러 가겠느냐!’ 그는 짐보따리 하나 사서 들고 니느웨 정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치기로 했습니다. 요나 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의 정 반대인 다시스로 가려고 항구인 욥바에 가서 배표를 사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순조롭게 하나님을 피해서 떠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바다 가운데 나갔을 때 갑자기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나중에는 얼마 있지 않아 하늘이 새카맣게 안 보이고, 폭풍우가 얼마나 심하던지 배가 온통 파선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선장과 선원들이 “왜 이렇게 갑자기 풍랑이 바다에 이느냐? 저 하나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가보다.”고. 탄 사람들을 다 모아가지고서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오는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래서 저들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이 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느냐?” 그러니깐 요나가 “앗수리아가 망하게 됐는데, 내가 40일 이후에는 앗수리아가 없어질 것이니깐 회개하라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는데, 알다시피 이스라엘 사람이 앗수리아를 미워하니깐 니느웨성이 무너지기 위해서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치고 있다.” 선장이 얼굴이 샛노래집니다. “세상에. 그럼 이 배는 물에 가라앉는 것 아니냐? 어떻게 해야 되겠나.”, “날 물에 던지십시오. 그러면 잠잠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선장과 선원들이 “미안하지만은 죄 없는 사람이 함께 죽어선 안 될 것이므로 당신은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고 당신을 물에 던지겠다.” 붙잡아서 하나, 둘, 셋 착 던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라고 사명을 준 사람이 사명을 다하기 전에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 가운데는 큰 고기가 뭐 떨어진 게 있으면 먹으려고 따라다니다가 큰 고깃덩어리 하나가 떨어지니 받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런 물고기가 요사이는 사실은 없지만 주님께서 그때, 그 시간에, 그런 물고기를 만들어서 요나를 삼켜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물에 던지고 난 다음에 곧장 바다가 잠잠해져요. 뱃사람들이 큰일 날 뻔 했다고. 사람 조심해서 태워야지 돈만 보고 태웠다가 큰일 나겠다고. 그들은 아주 혀를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천지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을 치고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이 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서 1장 11절로 12절에 보면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불순종을 회개할 때까지 바다가 흉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볼 것은 ‘내가 무슨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는가? 무슨 명령에 불순종했는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면서 고통에서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2. 고통은 회개케 하는 도구이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는 자에게 고통은 회개하게 하는 때이다)
또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는 자에게 고통을 주어서 회개케 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 열심을 내고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열심을 내고 기도를 하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89편 30절로 32절에 보면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고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함도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는 이유가 되지만은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고통을 보내서 회개하고 더욱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장 6~8절)’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면은 잘못하면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를 할 때마다 사탄이 와서 “너는 하나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채찍을 때릴 뿐 아니라 너 같은 사람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꾸 괴로움을 주는 것은, 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못 한다. 하나님이 그만큼 너를 사랑하지 아니한다.” 그런데 주 성령께서 저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너 아버님이 생시에 살아계실 때 아버님을 만나러 아버님이 계신 곳에 담대히 들어가느냐?” 우리 아버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우리 형제가 아홉인데, 내가 폐병에서 고침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로 온 집안이 불교에서 유교로,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아버님이 굉장히 회가 나서 나를 보고 “다시 불교로 돌아오라!”고. 그러고 내 위에는 누님이 한 분 계신데, 누님이 나의 전도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가 우리 집안에서 제일 하나님을 받아들였느냐? 역시 어머니가 제일 먼저, 어머니가 제일 교육을 적게 받은 분인데, 그래도 어머니가 제일 먼저 기독교 복음 전도를 받아 들였어요.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좋아한다면 내가 안 좋아할 것이 무엇이냐? 아버지나 형제들은 이해를 못해서 그러니깐 우리 기도하자.” 그래서 어머니가 기도함으로 우리 전 식구가 다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은 하늘 아버지, 우리가 부르실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하나님 형님, 하나님 선생님 그렇게 안 부르잖아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교육을 못 받은 사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 기도할 때, 나아가서 하나님 뜻대로 말씀을 못 드려서 응답을 못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은 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니깐.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서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아버지”하고 들어가면 “문 열어라.”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도 보면, 탕자가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니깐 아버지가 뛰어가서 탕자를 끌어안고 목을 맞추어서 “내 아들아 잘 돌아왔다.” 그 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거역했으므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합니다. 나를 종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 주시옵소서.” 아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자기의 아버지와 자기 관계를 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이 너를 품에 품어주지 아니한다.’고 그렇게 말할 때 여러분이 늘 알아야 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이 무엇을 잘해가지고서 율법주의적으로 칭찬받는 일을 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만 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오늘 이 자리에 왔으니 말씀을 듣고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반지를 끼워줘라, 신발을 신겨줘라, 살 찐 송아지를 잡아라. 하나님이 여러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사랑을 생각하고 감격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을 때리는 것은 좋으라고 때리지 나쁘라고 때리지 않는 것입니다.

3. 고통은 축복을 받는 그릇이다
(고통은 축복을 받기위한 그릇 소제이다)
또 우리에게 고통은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한 그릇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다가오면 회개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시편 40편 1절로 2절에 보면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린 사람을 기가 막힐 수렁에서 웅덩이에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기막힌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견고하기 위해서 고통을 보냈으나,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품어주는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그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 사함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생활을 파멸에서 건져주시고, 삼중축복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것이 없으면 감사하다는 말을 끝까지 해도 좋습니다. 저는 기도를 끝까지 오래하는 것을 평신도에게 배웠습니다. 불광동에서 개척했을 때, 천막교회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몇 사람 있는 성도들은 아침밥 지으러 다 가버리고, 홍은동에 산다는 서울시내 교회 장로님인데 아침에 새벽기도를 그곳에 못 나가니깐 우리 천막교회에 나와요. 제일 늦게까지 늘 기도를 해요. 그래서 저는 전도사였지만 아침 설교를 하고 기도 조금 하면 할 것이 없어요. 할 것이 없는 것보다도 내 마음이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 장로는 무엇을 늘 말을 하면서 몸을 흔들어가면서 기도를 하기에 옆에 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 그러지 마십시오. 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장로입니다.”, “아이고 장로님 잘못했습니다. 장로님, 무슨 기도가 그렇게 할 말이 많습니까? 나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전도사님. 아직 나이가 젊고 오래 안 살았으니깐 모르겠지만, 나는 함경북도가 내 고향인데 6.25사변 난 이후에 피난 내려와서 이곳에서 남대문에서 시장 장사를 하고 먹고 삽니다. 근데 하나님이 그동안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큰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내가 하나 배운 것은, 하나님이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듣기 원하는 것이니깐, 나는 그저 그저 감사만 합니다.” 그러고 곧장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잔소리 할 것 없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내가 생각에 ‘무식한 영감이 무식한 소리를 하는구나’그랬는데,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가만 보니깐 그 장로님이 한 말씀이 옳다 말입니다. 감사를 하면 됐지. 그 이후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날도 추운데 여러분이 시간 내어서 오후 1시 예배에 참석하려면 꽤나 참아야 됩니다. 그래서 1시 예배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 주시니 내가 여러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해요. 하나님이 그저 그저 감사만 하면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편 118편 5절에는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가면 고통과 축복이 앞뒤를 따라오면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 그릇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 마음을 넓히는 것이고, 축복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 찬양하고 감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에 서서 파괴된 심장, 파괴된 심정을 갖고 있지 아니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세계사 큰 영향력을 끼친 300명 중 60%가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이 다 고아였고, 루소는 태어나자마자, 파스칼은 3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골다 메이어도 고아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잃는 것만큼 큰 시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을 오히려 삶의 에너지로 바꾸었기 때문에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욱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절망하지 말고, 고난을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꿈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꿈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큰 꿈을 이루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훌륭히 성공한 사람들 중에 고난을 이긴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을 올바르게 이기면 큰 성공을 하는데 잘못하면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서 같이 사는 분 중에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에 이처럼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붙잡고 나섰으면 이런 것을 안 쓸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주변의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농락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 국민 전체가 큰 고통 속에 빠져 있는데 이때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쫄딱 망합니다. 우리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옛날에는 데모가 생겼다면 온 서울시가 거름더미가 되고 파괴적인 모임이 되었습니다. 데모라 하면 우리 한국사회가 완전히 거꾸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도 보면 15만이, 15만 명이 모였던지 50만 명이 모였던 지간에 상관없이 조용하게, 질서정연하게 데모를 했다. 그거를 보고 “아 이제 그릇이 되었구나. 우리 한국이 세계 국민들 앞에서 고난을 받되, 고난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국민이 되었구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데모가 우리 국민의 소양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만한 깊이가 있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고통은 하나님을 찾게 한다
(자만하다 고통의 채찍을 맞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찾고 의지하게 된다)
또 교만하고 자만하면 하나님이 채찍으로 때려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나가야 힘을 얻을 수 있지 교만하고 오만해서 자기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보면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 잠언서 8장 17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 선생은 삼층천 하늘에 직접 올라가서 주님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깊이 받았기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울 선생을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행하기 위해서 병을 주었습니다. 사탄의 사자 가시를 주었습니다. 바울 선생 같은 위대한 사도가 그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가시가 있어 교만하지 않아야 은혜를 보관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무슨 가시가 있느냐? 여러분 성경에 자세히 읽어보시면 바울이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 썼을 때 내가 복음을 전도해서 너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해서 할 수 있으면 너희 눈이라도 뽑아서 내게 주려고 했다느냐? 그런데 이 짧은 세월에 벌써 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리느냐? 탄식 스러운 편지를 썼는데 가만히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바울 선생은 안질이 있었는가 봅니다. 눈이 아주 나빴는가 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자기들 눈을 뽑아서라도 바울에게 주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알 수가 있느냐? 바울 선생이 편지를 쓸 때 자기가 직접 편지를 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전부 같이 있는 사람이 받아쓰기를 했지. 그리고 바울이 어떤 때는 편지를 써도 봐라. 내가 내 손으로 사인을 하지 않느냐? 그 말할 필요 없지 않아요? 그러나 눈이 너무 나쁘니까 바울이 큰 글자로 사인을 한다는 것은 그 마음의 진정성을 그렇게 표현을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교만과 오만한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바울이 화장실 출입도 못하지요. 눈이 안 보이니까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을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당한 뒤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버지를 떠나간 먼 나라로 가서 재산을 탕진하던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흉년을 만나 먹을 것조차 구할 수 없게 되자 그제야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고난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한 후에라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죄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세야 6장1절)’ 아모스 선지자도 ‘야훼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장 4절)’ 그렇게 외쳤습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천만 성도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때 들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안 될 일도 다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온통 요란스럽지만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이하게 발전하고 향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아시아를 복음이 활성화되어서 구라파를 복음화 하는데 도움을 허락할 줄 확실히 압니다. 아시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활성화되고, 성령 충만이 오고, 하나님의 기적이 따르면 예수님이 다가올 날이 가까워 왔다고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고통은 영적인 힘을 기르게 한다
(고통의 괴로움을 극복함으로 영적 힘을 기르게 된다)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함으로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극복한 사람이 기도도 잘하고 영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참으면 그것이 인격적인 영적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히브리서 12장 11절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 괴로움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이 같이 계시는 분에게는 어떠한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나무가 강하고 곧게 위로 뻗어 자랄 수 있는 것은 왜 그런지 압니까? 보십시오. 대나무 큰 나무도 아닌데 폭풍우가 와서 다른 나무들은 막 쓰러지는데 저 대나무는 안 쓰러진다 말입니다. 푸르청청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 대나무에 ‘마디’가 있습니다. 대나무가 환경이 나빠서 잘 자라지 못할 때 고통스러울 때 마디를 만들어요. 그러고 또 자라고 마디를 만들어요. 그 마디가 대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말라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 대나무가 어려울 때마다 마디를 만들고, 그 마디의 힘에 의해서 또 자라고 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름 트렁크의 알루미늄이나 다른 쇠로써 트렁크를 만들어서 저기에 있지 않아요. 써보니까 몇 번 안 굴러서 터져 버려요. 그래서 저 대나무는 속이 비어도 저렇게 뭡니까? 고난을... 반지, 반지를... 자기가 반지를 만들어 꽂아 그래서 그 분도 트렁크를 만들 때 트렁크에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씩 반지를 만들어 사용해 보니까 드럼통에 대나무 마중처럼 주름을 몇 개 넣어 보니까 옆에서 가해지는 충격의 4배가 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굴러다녀도 터지지 않아요. 그 희한하지요. 그런 여러분 드럼통에 마디라고 할까요? 한국말도 모르겠네. 그 마디를 넣으면 그 드럼통이 굉장히 강해져요. 그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기도하고 있는 마디를 만들어줘요. 그 마디를 많이 가진 사람은 여간 어려움을 당해도 파멸되지 않아요. 인생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낙심이나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멈춤의 시간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면 영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저가 말을 잘 못하겠는데 하나님이여 알게 해주시옵소서. 할렐루야!”

<결론>
고통을 즐거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발전과 성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축복의 채찍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장 32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의 크고 적음은 작은 마디일 뿐, 모두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통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주저앉고 어떤 사람은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합니다. 회복탄력성이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의 띠를 몸에 감으면, 굉장히 힘있는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로 39절,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