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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82년 3월 14일 제목 : 건전한 자존심 성구 : 고후 5 : 17-21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건전한 자존심"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이 정상적이고도 행복하며 쾌활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존경하는 그 자존심이 그들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이미지가 파괴되면 사람은 것잡을수 없는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사람은 반항적이 되고 반사회적이 되며 파괴적인 존재가 되고 그리고 자기자신을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경말씀대로 마귀가 온 것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고 했는데 마귀가 하는 가장 최초의 일은 우리 사람들 속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져서 반항적이고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떠한 사람도 주님이 인간 속에서 자기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이 자존심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꺽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여인을 만나서 그리스도가 대화하신 장면을 보면 이 사실을 잘알수 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대낮에 물을 기르러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물이란 여러분 유대인 사회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지만 아침과 저녁에 기르러 오지 대낮에 물 기르러 우물가에 오진 않습니다. 이 여인이 대낮에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온 것은 온 사마리아 성이 다아는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여인이었었습니다. 그는 벌써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제끼고 지금 살고있는 남자는 여섯 째 남자인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그를 욕하고 모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의 인적이 뜸한 대낮에 그는 물을 길러 오셨는데 그때 예수께서 우물가에 앉아서 기다렸었습니다. 이 여인이 와서 물을 기르려고 할 때 예수께서 대화를 시키셨습니다. 여인이여 내게 물을 좀 주시오. 여자가 흘낏 쳐다보더니만 아니 당신은 유대인의 남자로서 그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극이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남자가 여자보고 대낮에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는 것은 그건 실례였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여자여 내게 물을 좀 달라는 이가 누군줄 알았더라면 오히려 구했을 것이요 그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입이다. 여자가 희한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 좀 돌은 사람 아닌가? 선생이여 당신은 물기를 두레박도 없는데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생수를 길어서 내게 주시겠습니까?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팠고 그 자녀들과 그 짐승들에게 먹였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그 물을 내게도 줘서 내가 마시고 목마르지도 않고 다시 이곳에 물 기르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자여 그러면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주님께서 옳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너는 남편 다섯을 가졌었으나 다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하고 살 지만은 이것은 너의 정식 남편이 아니다. 여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선지자 이시군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상이 다 아는 창녀인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바라보고 이 창녀여 너가 그와 같은 생활을 하면 저주를 받고 심판 받을 것이다. 너는 설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판단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자존심을 꺽어버릴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이 다 아는 창녀인 것을 아시면서도 그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회해서 말씀을 하셔서 자기 입으로 자기는 한 남편하고 살고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셔서 기어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구원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어떻게 하던지 한 사람의 인격도 짓밣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자존심을 살려서 스스로 마음 문을 열고 회개하고 주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적인 존엄성을 짓밣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엄성 이것을 주님께서 언제나 귀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자기의 자존심이 짓밟히게 되면 파괴적인 존재가 되고 것잡을수 없는 그러한 인생이 돼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이 건전한 자존심을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먼저 누가 이 자존심을 파괴합니까? 첫째로 인간의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하는 짓인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성경에 말할 때 그 존귀함을 보십시오. 그 인권의 귀중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으니 하나님과 같은 존귀성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산 에덴을 지으시고 그 낙원에 짐승 이외의 모든 환경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존귀로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온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란히 빛났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와서 그들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반항하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모든 동산의 실과를 먹지 말라더냐? 하와가 말하기를 동산의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 말하자말자 사탄은 대답해서 말하기를 아니라 너희가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그 꿰임을 받은 하와가 그 열매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기도 한지라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는 손을 내밀어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같이한 남편에게 주어 그도 먹어 하나님을 반역하자 말자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자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온 전신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양심도 벌거벗고 육체도 벌거벗었으며 그들에게 자존심을 산산조각으로 짓밟아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양심 앞에서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서로 쳐다보기에 부끄러워서 그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우고 자존심을 건져볼려고 했지만은 자존심을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산산조각이 난 자존심을 주워 모아 볼려고 애를 섰으나 수치와 부끄러움과 그 결과로 다가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깨어진 인생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서 그래서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들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어느 정도까지 회복하게 하셔서 그래서 에덴을 떠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은 자기의 존엄성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왜? 땅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피땀을 흘려야 먹고살게 되고 그리고 몸은 병들고 늙어지고 그리고 미움은 그들 가정에 들어와서 부부간의 논쟁이 그치지 아니하고 맏아들이 둘째 자식을 돌로서 쳐죽이는 살상의 비극이 가정에 생겼었습니다. 이래서 오늘날 우리 인생의 자존심을 짓밟고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악마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려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해쳐버리고 파괴하고 짓밟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이것은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럼 둘째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우리의 자존심을 잃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의 자존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아무도 안 보았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양심이 벌거벗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 앞에 벌거벗어서 양심을 아무리 피하고 도망칠려해도 양심은 죄지은 놈 죄지은 놈 율법을 어긴 놈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양심 앞에서 자기의 존엄성이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존심이 깨어지고 수치로움이 그 가슴속에 꽉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들이 기발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꽉 들어찼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보려고 여러 가지 무화과 나뭇잎을 만들어서 자기의 주위를 둘러보아가 그러나 절대로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되면 인간은 비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도 비굴하게 하고 행동도 비굴하게 하고 대인관계도 비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마음에 우울증에 빠지고 침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괴적이 되고 반항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반항합니다. 범죄는 오늘날 우리의 자존심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마음에 평안도 없고 우울증이 꽉들어차고 범죄로 말미암아 치부하거나 지위를 얻어서 행복할 줄 생각해도 여러분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섹스피어의 맥베스에 보면 너무나 잘알고있는 것입니다. 왕권을 찬탈하고 난 다음에 한시도 그 맥베스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은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생활에 처참하게 실패할 때 자존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활에 실패하면 당장 그 실패를 어디에 연결 하냐 하면 자기의 능력과 연결합니다. 나는 무능한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인식하자 자존심이 깨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나는 무능한 존재다. 나는 실패자다. 그래서 자존심을 상실하고 그 다음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실패하는 것은 그 실패를 통해서 자기 존재 자체가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그 일에 한번쯤 실패했지 그 사람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찰을 오진을 해서 그래서 환자를 죽게 한 의사와 신앙상담한적 있습니다. 이 의사는 완전히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그는 나와 만났을 때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의사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 났습니다. 내가 진찰을 잘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조금만 내가 빨리 올바른 병명을 가르켜주었더라면 건질수 있는 생명이 나중에 나의 오진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결과로 죽었습니다. 그럼 내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은 나의 오진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나는 의사로서의 실패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우울증에 빠져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선 자기 부인을 때리고 자기 몸을 아무케나 처리하고 병원 문도 닫아버리고 그리고 난 다음 얼굴에 그냥 초췌해지고 눈은 충혈이 되고 나중에 처참한 지경에까지 빠졌습니다. 이 사람과 만나서 얘기할 때 그는 완전히 자기는 실패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고 인생의 좌절감에 빠지고 자존심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조소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럴 때 저가 그분에게 한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한사람의 환자를 진료하는데 오진을 했지 수많은 환자들을 올바르게 진료해서 당신은 살려주었다. 그렇다면 열 명의 환자를 돌보는데 그 중의 한사람쯤 당신 실패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자신이 실패자는 아니다. 그 일에 실패했지 당신 자신은 실패자가 아닌데 왜 당신은 일 한 가지를 실패해놓고 난 다음 자기 전 존재를 실패자로 삼느냐?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다. 더구나 당신이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받게되면 당신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당당한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번쩍 뜨고 내게 물어보십디다. 목사님 그럼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까? 당신이 왜 실패자야? 당신은 그 환자 한사람을 진찰하는데 *** 회복되자 그의 옷매무새도 달라지고 면도도하고 이발도 깨끗이 하고 인격이 달라지고 그 다음엔 다시 병원을 개업하게되고 그는 훌륭한 의사로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만 보면 손을 잡고서 생명의 제이 은인자라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만 만나면 그말합니다. 목사님 내가 한가지 일에 실패했지 나는 실패자가 아니지요. 물론이지요. 당신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한가지일 에 실패했지 당신 존재가 실패자는 아닙니다. 사람이 생활에 실패하면 자기를 실패자로 낙인찍고 자존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때부터 파괴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심한 빈곤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존심을 잃게 만들어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사람들은 빈곤은 하나의 축복이라고 말하지만은 빈곤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이것을 극복해서 영광스럽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빈곤 그 자체는 사람의 자존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생활에 빈곤해서 그 결과로 타인들에게 소외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동창생을 만날 때라도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을 만날 때라도 그 사람들이 외면 을하고 또 자기 스스로도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만날려고 하지 않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국민학교 동창 중에서 사십년동안을 만나보지못한 동창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동창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창이 내가 만나고 싶어해도 언제나 나를 피했습니다. 왜? 그는 국민학교 다닐 때 나하고 늘 일 이등을 다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회 나와서 별로 소위 말하는 출세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결과로 언제나 만나고자해도 온갖 변명을 하고서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십년만에 만났습니다. 어떻게 만났느냐? 최근에 그가 어떤 일에 크게 성공을 해서 그래서 지위도 높아지고 돈도 벌었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만나자 하니깐 당장 와서 만나주는 것입니다. 내 그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가난하고 헐벗고 어렵게되면 스스로 소외감을 가지고 그리고 친구들도 피하고 친척도 피하고 이웃도 피합니다. 또 상대방들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심한 빈곤은 인간의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소외되고 정상적인 의식생활이 안되면 그 빈곤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이 사라지고 그리고 사람이 비굴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로 하여금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자존심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도 춰매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오히려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다음 중병에 걸려서 오래 세월을 지나면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서 자기가 허약해지고 초라해진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그는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지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그리고 난 다음 절망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엄성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정상적이고 활달하고 쾌활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중병에 걸려서 자존심을 다 잃어버리고 그리고 처참한 절망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인간의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은 인격이 무시당할 때 그런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미국에서 어떤 흑인과 함께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상당한 인텔리였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왜 미국흑인 사회가 이렇게 지저분하고 더럽고 그러냐? 좀더 환경을 정리하고 깨끗이 하고 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는 날 보고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백인사회에 들어와서 소수민족으로서 오랫동안 인격적인 무시를 당해왔습니다.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교육을 균등하게 받지도 못하고 생활에서 균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뭐냐?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상처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인격에 존엄성에 대한 상처를 받았으니깐 그 결과로 우리에게 반박적으로 나오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반항 그리고 국가에 대한 반항 그런 반항심이 우리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파괴적이 된다. 아마 조목사 같은 사람은 외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와 처지를 모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적으로 무시당하고 짓밟혀서 상처 입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점점더 파괴적이 되고 반항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말에 어느 정도의 뜻이 있겠지만은 나는 이 사실을 우리 일본 제일동포에게도 내가 절실히 느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일본사람하고 심각하게 토론도 하고 일본에 갔을 때 일본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보고 한국사람들은 왜 그 모양이냐? 그 모양이냐? 여기 한국 제일 교포들 보라. 제일 일본 정부가 미워하는 일은 다한다. 가령 빠찡코로부터 시작해서 빠로부터 술집으로부터 도박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갱단을 조직하고 사회에 저질적인 일은 모두다 그 속에 한국사람들이 끼어있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은 저질이다. 내가 그 말을 듣자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누가 한국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냐? 당신네 정부와 당신네들이 이렇게 만들었지 않느냐?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냐?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여보시오 삼십육년동안 일정학정때 당신들이 우리를 징용으로 끌고 갔다. 가서 이곳에 와서 한국에도 뿌리를 뽑아버리고 일본에도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때는 내선일체라고 해서 성까지 빼앗아 놓고 난 다음 이제와서는 당신들은 이제 해방되고 난 다음 한국사람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 이제는 올데갈데없이 저 중동의 피헬로 같이 여기 육십만 교포가 던져졌습니다. 육십만 교포를 당신 인격적으로 취급해주느냐? 당신은 육십만 교포에게 세금은 다 거두면서도 일본 사람이 누리는 그러한 사회 복지제도에 참여를 시켜주느냐? 한국 학생들이 일류대학에 들어갈수있느냐? 한국사람이 일류직장을 얻을 수가 있느냐? 한국사람들이 공무원 시험을 칠 수가 있느냐? 당신들에게 한국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다 막아버렸다. 좋은 직장도 공무원도 될 수 없고 전부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다 쫓아버린다. 그러니 한국 사람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 버림받은 직장밖에 구할 수 없게 당신 만들어 놓고 그리고 한국 사람이 반항적이라는 것은 한국 사람의 인격을 이처럼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피투성이된 자존심밖에 없다. 상한 자존심 이것을 가지고서 반항적이고 이제는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당신들이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한국 사람이 이렇고 저렇고 하느냐? 나는 일본에 가 기만하면 일본 목사들과 일본의 지도자들과 일본사람들과 끝없는 논쟁을 합니다. 당신들의 책임이다. 당신들이 회개하라. 한국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사람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 중동의 피헬로가 바로 그렇지 않느냐? 왜 피헬로가 다니면서 비행기 폭발이나 하고 폭탄이나 던지고 하느냐? 그거 그들이 하고 싶어하느냐? 그들은 갈곳이 없는 울한 민족이 되어서 어느 곳에 가도 인간적인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반항적이 되고 말은 것이 아니냐? 여러분 인격적으로 짓밟히고 무시당할 때 사람들은 자존심을 상처 입게 되고 그리고 난 다음 파괴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잃게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범죄의 부끄러움에서 해방 얻고 생활의 실패에서 해방을 얻으며 심한 빈곤에서 자유를 얻으며 중병에서 치료를 받고 인격으로서 무시당하지 않고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인정을 살게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 번째 오늘 확실히 알아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자존심을 보십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에게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주셔서 우리를 한사람도 남김없이 건져주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 왕궁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세도가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곳은 나사렛에서 인정받지 않는 비천한 나사렛의 목수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었으며 그들의 태어난곳은 어떠한 여관에도 태어나지 못하고 짐승들이 사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예수님의 일평생이란 곳은 산새도 들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은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는 걸식과 방랑의 생활을 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생활을 했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그런 생활을 한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수많은 가난하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과 동류의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를 볼 때 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나와 처지가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도 천민이었었으며 예수님도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방랑의 생활을 했는데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수 있으니 나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인간이 아니구나! 나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존재이구나. 예수님은 나와 함께 되었다. 예수님은 나의 거지 대장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동류의식 속에서 우리들은 무한한 마음속에 위로를 얻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된 이러한 것들이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 이와 같은 마음에 자신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든 사회의 버림받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건지기 위해서 당신자신이 자기를 내어 던져 버려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서 우리 주 예수께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주 예수님 께서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저주와 절망을 대신 십자가에 걸머지고 가시관 쓰시고 처참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피의 대가로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든 그대로를 부르셔서 보혈로 씻어서 주님이 구원을 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이 나를 다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자각이 생겨날 때 이 얼마나 놀라운 자존심이 생기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래봬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당신이 나를 인정해줘도 좋고 안해도 좋다.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걸쳤다 해도 좋다. 이래봬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 용납을 받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자각이 마음속에 눈을뜰 때 우리들은 절대로 비굴하지 아니하고 좌절되지 아니하고 어깨를 펴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늘을 향하여 우렁차게 외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미래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과 새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를 상속으로 받을 때 누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을 입고 이 약한 몸이 강한몸을입고 이 육의 몸이 신령한몸을입고 이 죽을 몸이 영원한 몸을 입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죽음과 곡하는 것이나 이별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산다는 이 찬란한 소망을 갖고 여기에 소속된 시민이요 여기에 소속된 나라의 백성된 것을 알게될 때 우리 마음속에 죄절감이나 열등의식이나 비굴감이 일체 사라지고 영광으로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치 아니하리라 잠시 잠깐 후에 행인과 나그네길이 끝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 비굴함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그가 십자가에 저주받음으로 우리에게 저주를 제하여 주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질병을 제하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문을 열었으니 예수님안에 바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위대한 믿음을 얻을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현재 눈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어코 주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 죄악에서 놓여남 받고 이 저주와 가난에서 벗어남을 받고 이 질병에서 치료함 받으며 이 먼지와 티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확신을 얻게될 때 우리에게 열등의식과 좌절감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존심이 살아나고 인간의 존귀함이 마음을 부여잡게 될 때 그때 우리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마음의 자세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존심은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건전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행복이란 결코 얻어지지 않습니다. 자존심의 쿠션이 빼앗길 때 인간은 비굴하게 되고 낙심하며 반항적이 되며 파괴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인간에게 영원한 그리고 무한한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존엄성 자존심이 있을 때 건전한 인격자가 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세상에서 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지라도 예수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 품에 안기면 무궁무한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하나님께서 갖고 어깨를 펴고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게 웃음을 가지고서 세상을 이기고 창조하며 정복하고 승리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래봬도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이 이상 무엇을 더 우리가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않겠느뇨! 나는 이래봬도 하나님의 자녀다. 높이 외치고 여러분 구김살 없이 자존심을 가지고 승리의 영광된 삶을 살게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지만 하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더 풍성히 주기 위한 것이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세상은 살아갈 때 끊임없이 우리의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찢어지고 맙니다. 사탄과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면 무한한 인간 존엄성과 자존심이 살아나고 이 속에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고 밝고 맑고 환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까지 들어가게 되는 우리들이 된 것을 감사하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