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1982년 11월 21일
제목 : 감사보은의 생활
성구 : 시 50 : 23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감사보은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최근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었던 이야기가 지금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한 마리의 개가 옛 주인의 아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가서 그 옷을 물고 끌어내어 구출해 주었다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 일간지에 떠들썩하게 났었습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마음에 무척 감동이 되었었습니다. 이렇게도 몰인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사람보다 나은 개도 있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마음에 떠올라서 대단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이야기는 애들이 꾸며낸 가공적인 이야기 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난 다음 모두 다 허탈한 감정을 피할 수가 없고 쓴웃음을 웃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가 도대체 왜 그렇게 온 신문 일간지에 떠들썩하게 났고 사람들에게 화재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리고 또 이 신문을 읽는 사람마다 그 무언가 가슴에 찡하는 그러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어디있을까요? 그것은 오늘날같이 몰인정하고 냉정한 인간사회 속에 한 마리의 개가 보여준 보은의 정에 그만 압도되고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기 스스로의 무정에 대한 죄책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읽고 모두 다 가슴이 찡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서로 깊이 이해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갚는 삶을 가질려고 노력할 때 비로서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 살고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볼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은혜를 입고도 무관심한 대중이 있습니다.
옛말에 은혜는 물에 적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은혜 받은 것은 너무나 속히 쉽게 잊어버리고 말고 자기가 상처 입은 것은 오래 오래 두고 기억을 하고 원한을 갚을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 한번 붙잡고 자세히 물어보십시오. 부모의 슬하에서 자랄 동안에 받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억은 별로나지 아니하고 부모가 못해준 것은 일일이 기억하고 그것이 오랜 세월을 마음속에 원한이 되어서 남아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모의 슬하에서 받은 그 여러 가지 은혜를 그대로 잊어버리고 평범하게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의 간에 사랑도 똑 한가지인 것입니다. 남편에게 받은 사랑 부인에게 받은 은혜 이러한 것은 그저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이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잖아요? 선생의 은혜를 단순한 월급쟁이로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풍좁니다. 오늘 선생에게 그 은혜를 감사하고 보답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귀를 기울일 학생들이 별로 없습니다. 월급쟁이로서 내가 당연히 등록금 내고 내가 내 돈으로 월급 주고 그가 와서 날 가르치는데 뭘 내가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이 무엇이 있냐고 이렇게 냉정하게 오늘날 내어 뱉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에게 받는 지식을 전수 받는 그 은혜와 사랑은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간에 정도 역시 당연지사로 생각합니다. 받은 사랑은 잊어버리고 형제간에 못 받은 사랑 못 주는 사랑에 대해서 원망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웃간에 진 사랑의 빚은 쉬 없던 것으로 돌려버리고 말고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중사회는 감사하고 그 감사에 대한 은혜를 보답한다는 이것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관심 속에서 그 마음속이 굳어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하고 사는 것 이것만 해줘도 오히려 감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두 번째 사항은 은혜를 입고 그것을 원수로 갚는 비열한 사람들이 오늘날 세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은혜를 갚고 받고 그것을 원수로 갚은 표본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룟유다 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께서 건져내어서 삼년반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열두제자중에 예수께서 가장 깊이 신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연보궤를 가룟유다에게 맡겼었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돈을 맡길 때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깁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뢰를 받은 가룟유다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냥에 팔았었습니다. 은 삼십냥이란 그 당시 종을 거래하는 가격입니다. 그의 선생을 종의 가격으로 팔아 넘겼고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도록 방조를 하고 말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원한으로 보답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요 역사를 통해서 늘 지탄받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고향 사람을 돕고 난 다음 오히려 그 고향 사람에게 심히 물려서 허탈감정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이 사람은 서울에 올라와서 꽤 자기의 생활이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체도 큼직큼직한 사업체를 몇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고향친구가 고향에서 남부연애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살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쪼달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날 어릴 때 같이 뛰어 놀던 그 정을 생각하고 그 친구를 불러다가 자기 사업체 하나를 맡겨 주었었습니다. 큰 사랑으로 그 친구에게 아무 부담도 주지 아니하고 자기 사업체 하나를 완전히 맡겨서 경영하게 해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보니깐 그 고향친구는 자기 사업체를 홀랑 다 등기이전해서 자기 앞으로 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다음에는 무섭게 자기에 대한 무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여러 곳에 무고로서 고발하고 그리고 난 다음 그의 사업을 망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고향 친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고향친구를 찾아서 어떻게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냐고 아무리 타일러 보아도 막무가내 였었습니다. 그는 어찌하던지 자기의 은혜 베푼 친구를 완전히 박살을 낼려고 했었습니다. 이 슬픔을 당한 사람이 내게 찾아와서 그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조목사님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베풀어준 것은 좋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집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고 사업을 주었고 가족들 데리고 살게 해주었고 출세하게 해 주었는데 그래 그 다음 그댓가가 나를 이렇게 무고하고 나를 헐뜯고 나를 물고 찢는 이것을 어떻게 내가 참을 수 있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분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비열한 인간은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반드시 그걸 악으로 갚는 것은 옛날부터 이 세속에는 있어온 이야기입니다. 저가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을 할까요? 비열한 인간은 그 심리상태가 비열합니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았다는 열등의식이 콤플렉스가 되어서 그래서 그 콤플렉스는 자기 도움을 주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급기야 그 미움은 원한으로 변화되어서 자기에게 도움준 사람을 파멸할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 받았다는 부담감을 마음속에 없애기 위해서 그는 도움을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굉장히 비열한 사람인 것입니다. 저가 수년 전에 이태리 로마에 가서 성회를 인도하는데 저녁에 많은 사람이 모였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이태리 목사님이 미국 선교사를 심히 비난하고 모욕을 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 왜 미국 선교사가 로마에 와서 이렇게 수고하면서 돌봐주는데 그렇게 욕을 하시냐고 그러니깐 그가 날보고 싱긋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 이태리 사람은 미국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 목사님이 오늘 설교할 때 미국사람에 대한 비평적인 말을 하면은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설교할 때 하나 잊지 마십시오. 꼭 미국사람에 대한 비평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기에서 심한 충격을 느꼈었습니다. 왜 이태리 사람이 이럴까? 이유가 있습니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이 와서 이태리를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구출해 주었었습니다. 이러므로 국민 전체가 미국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그 생각이 열등의식으로 변화되어서 그래서 미국에 도움을 받았다는 부담감 때문에 이것을 오히려 비난과 공격으로 돌이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코펜하겐에서 저와 우리 교회 실업인 몇 사람하고 호텔에 들어갔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는 중에 만자노 박사님이 같이 들어갔었습니다. 만자노 박사님은 우리 뉴욕 사무실 책임자고 테레비 총책임자로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그 관계 직원인 여직원 한사람이 특별히 우리 동양사람에게는 친절을 베푸는데 이 미국사람 만자노 박사에게는 대단히 허술하게 대합니다. 그 왜 그럴까? 이러고 있는데 나중에 우리 동양사람 우리 저하고 실업인들만 모여서 그 여자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여자가 고개로 이렇게 만자노 박사를 가르키면서 저 코쟁이하고 뭐할려고 같이 댕기느냐 그래요! 그래서 왜 그러냐 하니깐 우리는 미국 코쟁이를 안 좋아한다. 미국 코쟁이들 우리 호텔에 안 들어와도 좋다. 우리는 동양사람 여러분을 사랑하지만은 미국사람 안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었습니다. 여보시오! 왜 당신네들은 미국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경원하오? 미국사람이 안 도와줬으면 온 구라파가 다 나치독일의 말발굽에 짓밟힐 것 아니요? 수많은 미국청년들이 죽어 피를 흘려서 그래서 유럽을 구해내주지 않았소? 그러니깐 그 처녀 하는 말이 그 때문에 우리는 미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었으면 싸워주었지 그것을 가지고서 목에 힘주고 어깨에 힘주고 건방진 소리한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갑자기 미국이 측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도 주고 청년들의 생명도 주고 목숨을 바쳐 싸워놓고 난 다음 도와 준 사람에게 요사이 비난을 받고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온 세계 다니면서 많은 미국 사람들이 어글리 어메리칸이 되어서 너무 목에 힘을 주고 너무 건방진 행동을 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만 그러나 국가적으로 미국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일한 것은 우리가 가히 칭찬하고 감사하고 고마워 해야될것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미워하느냐? 그것은 도움을 받았다는 열등의식의 콤플렉스 도움을 받았다는 부담감을 없애기 위해서 오히려 미워하고 공격하는 비열한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를 입고 그것을 원수로 갚는 이 비열한 심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는 낱낱이 내어 쫓아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때문에 사회가 살기 어려워지고 그리고 인생이 삭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점점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사람들이 용기를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안받은척 무관심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도 이것을 열등의식과 좌절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오히려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으니 오늘날 세계가 얼마나 살기가 어려워지는 세계가 되고 말지 않았었습니까?

그러나 세 번째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감사보은의 삶을 사는 고상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은혜를 보답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학식이 있던 없던 위대하고 고상한 사람입니다. 저는 저가 어릴 때 진장농원에서 자랄 때 내 어린 심령에 깊은 인상을 준 한 여성이 있습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시골에서 산출되는 귀한 것을 보퉁이에 걸머지고 우리 집에 옵니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한번 여름에 아주 맛있는 홍시 감을 잔뜩 한 보퉁이 머리에 이고 오다가 우리 마당이 비가 와서 찬 이끼가 끼어서 얼마나 미끄러운데 거기에 그만 마당에서 넘어져 가지고서 온 마당 전체가 감으로서 그냥 다 흩어져 버리고 그리고 온몸전체가 그냥 물투성이가 된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러고도 그는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언제나 귀한 물건이 생기면 꼭 가지고서 우리 집에 찾아옵니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그 여성을 보고서 우리가 전부다 고모님 고모님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고모가 아니예요. 그 유래를 물어보니깐 우리 할아버님께서 시골을 가다가 그 가정이 빚이 져 가지고서 집도 다 날리고 농토도 다 잃어버리고 거지가 되어서 길거리에 앉은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할아버지가 그 빚을 갚아주고 그 집에 살게 해 드리고 그 다음 농토를 할아버지가 사서 그 농토를 경작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뭐 옛날에 시골에서 지주가 땅사서 소작에게 주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온 가족 전체가 합쳐서 그저 하루도 걸리지 아니하고 늘 고맙다는 말을하고 언제나 명절 때마다 춘하추동 사시절에 좋은 것을 준비해서 언제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인사하러 우리 집에 와서 함께 한 가족처럼 지낸 것을 난 기억합니다. 그 부인은 공부도 많이 못하고 무식한 여인이었지만은 그러나 그 부인의 한 행동이 저에게 남겨놓은 인상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한 여성이지만은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뭐 사오년 한 십년이 아닌 두고 두고 계속해서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그 심정 이것이야말로 고상한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어떻해야 될까요? 우리는 부모의 은혜에 관해서 보답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물론 부모에게 불만족한 일이 많지요. 이 세상에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녀를 위해서 잘해준다 하더라도 자녀 소원대로 다 해줄 수 있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해준 것을 잊어버리고 잘해준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감사할 뿐 아니라 그 은혜에 내 힘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보답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이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이 고상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부부간에 같은 지붕 밑에서 한 솥에 밥을 먹고 운명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살지만은 그러나 남남끼리 모여서 결혼이란 계약 속에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고마운 일을 해줄 때 거기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보답할 줄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뭐 남편이야 무조건하고 처자를 먹여 살릴 의무가 있으니깐 마땅히 해야지. 아내야 집에서 남편을 돌보고 자녀를 기르는 것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거 당연히 할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같이 살면서 자기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감사한일을 해준 것을 기억하고 그 고마움에 감사를 표시하고 보답을 표시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처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뼈빠지게 일할 때 그 처자들은 남편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감사하다. 여보 당신 감사해. 정말 고마워. 또 그 남편은 아내에게 허구헌날에 자녀를 돌보고 남편 받들고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면서 생활하는 것을 계속해서 당연지사로 생각하지 말고 정말 고마워 정말 감사해 당신이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래서 정 아무 것도 없으면 요사이 가을철에 감이 얼마나 좋습니까? 홍시감 몇 개라도 사와 가지고서 이거 먹어 이거 먹고 힘얻어. 정말 고마워. 사람이 먹어 맛이 아니라 받어 고마움이 아닌 것입니다. 그 배후에 있는 그 알아주는 정성 그것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 코끝이 싱긋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알아줘야 되고 아내도 남편을 알아줘야 되는 것입니다. 고맙게 여기고 감사보은의 생활을 할 때 그 가정이 어떻게 어려운 생활을 하더라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오아시스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선생님의 은덕을 그렇게 쉽게 내던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수업료 내고 등록금 내어서 월급쟁이로 와서 월급 받아먹고 우리 가르치는 것이니 오히려 직장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선생이 노력하고 연구해서 축적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가르켜 줄 때 그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 것입니까? 이러므로 그 선생의 그 노력과 그 은덕에 우리가 감사 보은하는 마음으로 말 한마디라도 선생님에게 격려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라도 고맙다는 편지 하나라도 내고 또 명절 때 한번씩 찾아보고서 고마워할 때 얼마나 후진을 양성하는 선생들의 마음속에 용기와 희망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이런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선생들이나 교수들이 낙심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제자를 가르키는 것보다도 이제는 하나의 직장인으로서 직업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하긴커녕 요 최근에 서강대학 에서는 가르치고 나오는 선생을 칼로서 찔러 죽여버린 학생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누가 이 세상에 후진을 양성하고 제자를 키울려고 하겠었습니까? 우리는 선생의 은덕에 감사할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형제간에 받은 정도 우리는 감사할줄 알아야 됩니다. 그건 뭐 내 형이 해준건 마땅하지 않느냐? 내 동생이 해준 것 마땅하지 않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 피를 같이 나눈 형제라도 형과 아우 서로 나누어준 정에 관해서 고맙게 생각해서 고맙다고 말하고 거기에 대한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보은의 정을 나눌 때 이것이 형제간에 따뜻하게 만들고 이것이 두고 두고 그 형제간에 정을 굳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웃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에서 받은 사랑을 우리는 안받은체 하고 지나가서는 안됩니다. 우린 이웃에서 받은 정성과 사랑을 일일이 기억했다가 그것을 명절날이나 이름 있는 날에 꼭 보답을하고 조그만한 편지 쪽지에다가 내자는 것입니다. 도와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린 늘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 가족은 감사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고 따사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이것이 우리 한국사회에 또 전세계에 얼마나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므로 감사보은의 삶을 사는 이 생활이 그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고 그 가족을 고상하게 만들고 이 세상을 살기에 아름답고 부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 마땅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살아왔었습니다. 우린 하루살이 같이 살다가 급기야 세월이 지나고 나면은 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비운에 처한 인간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아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고 만다고 했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것은 얼마나 그 종말을 생각하면 비극적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인간은 영화로우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대신하여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받아 찢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것도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매달려서 그 영혼이 지옥불에 불타는 고통가운데도 우리를 져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 끝없는 사랑과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내가 오늘날에 와서는 거듭나는 은혜를 얻게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채찍에 맞은 공로로 병고침을 받게되고 그리고 저주에서 해방되고 가난에서 놓여남 받아 범사에 잘되는 축복을 받게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부활해서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죽음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천국에서 살 수 있는 위대하고 크신 은총을 우리가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해동안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면서 살아왔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마음속에 깊이 감사하고 살고있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당연지사로 받고서 교회 와주는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라 이런 태도로 예수 믿어주는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라. 이와 같은 태도로 사는 사람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는 살아갈수록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죄책과 정죄에서 허덕이며 허무와 무의미의 인생 가운데 벽에 부딪혀 발버둥치며 죽음과 절대의무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가운데서 죄를 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든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서 주의 품에 안기게 되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이 되고 복받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이 되고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나는 아무 한일도 없는데 내가 내 스스로를 깨달아 보니깐 예수 안에서 나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지금 사랑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계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사랑 받기를 원하는데 여기에 우리를 값없이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나는 내 스스로의 운명과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되고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 나를 존경할 수 있게 되고 나를 존경할 수 있게 될 때 나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질 때 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고 이웃사람에게 웃음을 던져줄 수 있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받은 그 용납과 그 사랑 이외에 우리를 항구적으로 변치 않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자가 누가 있는 것입니까? 찬송에도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온다고 말했었습니다. 진실로 여러분과 내 영혼 속에 찬란한 기쁨을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해지고 내가 사랑 받고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이래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인 것을 알게될 때 마음속에 화창해지고 기뻐지고 밝고 맑고 환해지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생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우리 여호와께 감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보입니다. 우린 입술로서 감사하고 우리는 찬양함으로 감사하고 우리는 몸드려서 감사하고 우리는 시간 내어서 감사하고 우리는 나아가서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물질을 드려서 감사합시다. 우리의 감사가 희생의 대가가 아니면은 그것은 아무 감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감사보은의 행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믿음에 하나님께서 빈손들고 보내겠어요?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보이리라. 영혼의 구원 육체의 구원 생활의 구원 영원한 구원을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을 고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위대한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은 감사에 대한 보은하는 그 아름다운 심정입니다. 감사에 대한 완성입니다. 은혜 받은 것을 원수로 갚는 비열한 인간이 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께 로든지 이웃에 우리가 받은 은혜에 매일같이 보답하고 감사보은의 삶을 사는 이것을 우리의 생활에 목표로 삼으십시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이 감사절에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번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감사하여야 될 일들을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수많은 은혜와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 험악하고 요란한 세상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불평을 말하려면은 한이 없겠지만은 감사할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한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 부모의 축복과 도움 우리의 이웃의 축복과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었습니다. 내 스스로 살아온 것은 아니옵니다.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보은의 생활을 할 것을 각오하게 도와주시옵시고 무관심으로 살았든지 혹은 은혜 받은 것을 원수로 갚는 비열한 심정을 가지고 살았었으면 오늘 이것을 모두다 회개하게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땅을 치고 회개하고 이것을 다 버리고 감사보은의 생활을 하는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