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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27일 제목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성구 : 이사야 53장 1-6절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번 주 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주간동안에 지상 최후의 삶을 사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고난은 영광스러운 메시아로 강림하실 것 을 기대하던 유대 민족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면 적 어도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기대 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서 우 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고 놀라움을 금 치 못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첫 강림은 고난의 징후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실 것을 이사야는 주님 오시 기 600여년 전에 이미 예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고난의 종으로 오 셨습니다. 오늘 이 고난 주간에 특별히 깊이 생각 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 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당할 고난은 단순한 순교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을 위한 대속의 고 난인지를 알아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들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 고난주간에 깊이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이사야가 예언한 그리스도의 모습 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참으로 비 천한 출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의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히브리 서 1:1-3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 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 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 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 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 리스도의 본래의 모습은 창조주인 것입니다. 하나 님과 함께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 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체의 모습입니 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벗어버리고 던져서 비천한 인간으 로 탄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인 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성령은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사람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영광의 하 나님께서 출생한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 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하나님이 다 장성한 나무 같은 영광스런 그리스도 를 심어준 것이 아니라 그는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았다. 여러분, 봄이 다가오면 꽁꽁 얼은 땅에서 노란, 연한 순이 돋아납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 갈 것 같습니다. 짐승만 밟아도 꺾어질 것 같습니 다. 연한 순 같이...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로 나타 난 것이 아니라 그는 한 어린 아기로서 핏덩어리 로서 연한 순 같이 인간으로 탄생할 것을 여기에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기탁해서 연한 순 같이 탄 생한다는 것은 여러분, 여간한 비하가 아니며 겸 손이 아니며 고난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기를 자원했다는 이 사실은 영원히 인간의 지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인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라고 말씀했습니다. 줄기가 땅에 있 어야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땅은 바 로 부모를 칭함인데 그 부모가 마른 땅 같았다. 풍성한 땅이 아니요. 기름진 땅이 아니요. 습기가 풍부한 땅이 아니라 마른 땅 같았다. 마른 땅은 거기에서 줄기가 돋아나자면 여간 고생스럽지 않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모는 마른 땅 같았습 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명망 없는 지극히 평범한 혹은 그 이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조금도 사람들이 보아서 "그 메시아를 낳을 부모 같다." 이렇게 인정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했 습니다. 임금의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귀족의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부자의 집에서 태 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마른땅 같이 가난하고 명망 없고 지극히 평범한 그러한 집에서 예수님이 태어 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이 받들고 모 든 영광이 그 보좌를 둘러싼 그 예수가 이와 같은 처지에 태어난 다는 것. 이 자체가 얼마나 큰 고 난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 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러분, 고 대의 위인은 언제나 그 출생이 전설적인 것이었으 며 비범한 인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전설을 보면 단군은 바로 곰이 여자가 된 그 몸에서 태어났다. 굉장히 전설적입니다. 신라의 조상 박혁거세는 바로 흰 백마가 와서 고함을 치 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보니 알을 낳았고 그 알에 서 태어났다. 이러한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 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그러한 전설적인 것이 없 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평범한 어린 아기로 인간으로 오셨으므로 외면적으로 볼 때 비 범한 특징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은 고은 모양 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볼기에 과연 메시 아구나!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그렇게 할 만 한 것이 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 럼 그리스도는 출생 때부터 벌써 당신 자신을 지 극히 낮추어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고난이 꽉 들 어찬 그러한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이 들어찬 그의 생애를 이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림 바 되었으며' 라고 말 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멸시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유대 땅도 우리 한국과 같이 양반, 상인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곳입니다. 농, 공업을 천하게 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에서 그도 가난한 목수 집 아들로 태어나서 좋은 글방에 가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서당에 가서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요셉 양아버지와 함 께 대패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고 목수 노릇을 했 습니다. 그의 손에 못이 박히고 그의 옷은 초라하 고 그는 귀공자 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도 지나가면 그는 무시당했습니다. "저 목수의 아들 지나가는 구나. 공부도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안, 별 혈통도 좋지 못한 집안에 태어 난 사람이 지나 가는구나." 나사렛 동네 안에서도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림 바 되었는데 장성해서 그가 복음을 증거하러 갔을 때도 비천한 나사렛 출신이라고 천시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나 사렛은 이스라엘 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도박꾼들이 모이고, 술주 정뱅이가 모이고, 혹은 사기꾼, 살인자, 범죄자들 이 많이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 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아예 나사렛 땅에서 출 생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나 천시와 박대를 당했 습니다. 유대인의 정치 지도자, 종교지도자, 사회 의 유력한 인사들에게 미움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성경은 말하기를 '간고를 많이 겪었으 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난했습니다. 보통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두벌 옷도 없었고, 두 벌의 신발도 업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산새 도 집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처 없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삶의 하루 하루가 고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고생하셨습니까? 성경은 바울 선생의 말처 럼 고린도후서 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나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 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 다. 우리의 가난을 그는 짊어지고 고생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쫓겨나서 얻은 저주의 가 시와 엉겅퀴를 예수님은 친히 몸에 감고 그 가난 을 대속하기 위해서 온갖 가난과 괴로움을 겪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간고를 많이 겪었다 고 했습니다. 가난, 질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질고 를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 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였고 그 병고에서 해방시 키려고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질고를 아는 자입니 다. 주님은 앉으나 서나 병든 사람들의 고통을 머 릿속에 생각하시고 병자를 고쳐야겠다고 마음속에 늘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의 생애의 삼분의 이는 병 고치는 일에 보내셨습 니다. 그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칠십 인의 제자에 게도 복음을 증거하거든 꼭 병 고치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부활해서 승천하시기 전에도 마지막 유언 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너 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얻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 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병든 자를 고치겠다는 관심 은 주님께서 주야로 그 마음속에 두셨습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와 치료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와 치료는 분 리시킬 수가 없는 예수님의 지극한 관심사였습니 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는 간고를 많 이 겪었고 질병을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님은 병든 사람의 고통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그리스도는 사명으로 알고 그는 갈 때도 병 고치러 가시고, 오면 병 고 치고, 앉으면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 하기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 것입니 다. 왜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는 자 같이 멸시를 당하였을까요? 왜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을까요? 그가 제자로 삼은 사람들은 갈릴리의 하층민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귀족 출신이 아 니고 그의 의복도 천민의 옷을 입었습니다. 주님 이 택한 제자라는 것은 교육이 없는 불황무식한 어부들 그리고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이 볼 때는 가장 인간생활에서 하층계급의 너저리 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이 끌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얼굴을 돌리지요. 예수님을 멸시하고, 귀히 여기지 않았습 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집회에 모이는 사 람들은 대게 가난하고 교육이 없는 빈민들이었습 니다. 그러므로 거창스러운 공회에서 집회도 못하 고 산이나 들에서 그냥 모이는데 오직 빈민들만 떼를 지어 모였습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그리스 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 는 삶은 풍찬 노숙을 했습니다. 어디에서 밥을 먹 을지 모르기 때문에 산에서 주무시고, 들에서 주 무시고 혹은 마구간에서도 주무시고, 얻어 잡수시 고 이렇게 했으므로 일반인들조차 예수님을 귀인 으로 여기고 중요시하지 안았습니다. 그저 "희한 하게 병은 잘 고친다. 귀신도 잘 쫓아내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리지마는 그러나 그는 기인이 다."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하층사회 에서 출생하여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으시고 제자 라고 하는 것은 전부 무식하고 하층인사들을 열두 명 데리고 서울 시내에 나타났다면 교통방해로 즉 심에 잡혀서 걸리실 것이고 아무도 그를 귀히 여 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 예수 그리 스도가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복음을 증거하 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심히 어려웠 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외부적 모습을 보고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 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이런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은 여 러분과 나를 위해서 대속하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 니다. 셋째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해서 이사야는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 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실제로, 종교적이 아니고 하나의 예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짊어지고 병든 고 통을 당했다. 여러분, 병든 자가 얼마나 고통스럽 고 슬픈지 압니까? 질병의 고통 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병든 사람의 절망과 그 소외됨과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 라갈 때는 그는 진짜로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 지고 우리의 그 병고로 말미암아 당하는 가슴 쓰 린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예수께서 병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 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병은 고쳐도 좋고 안 고 쳐도 좋다. 복음을 증거할 때 신유에 대한 것을 말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있 을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고치겠다는 절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서 그 병을 그 몸에 걸머지고 그는 우리를 대신하 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겪으신 것입 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과 일 반인들은 중대한 오해를 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 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 을 당한다 하였노라.' 자기의 잘못으로 고난을 당 한다고 생각하고 질병의 대속은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 도의 질병의 대속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장엄한 신학을 말해야지.... 철학을 말해야지.... 무 슨 병을 고치고 그런 것이 무엇이냐?"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망언인 것입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병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대신해서 병고의 슬픔을 당했 는데 이것을 무시해버리는 그러한 신학자도 많고 그러한 목사도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내에서 병 고치는 것을 도외시해 버리고 병 고치는 것을 이단과 사슬이라고 말하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중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옛날 유대 인들과 그 당시의 사람들도 그리스도가 실로 우리 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 으며 고난을 당한 것이지 우리의 질병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마귀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시켜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과 병 고침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병은 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병은 앓아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 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 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앞에 나와 병 고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거대한 영 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병자가 나와서 주 님께 울면서 할렐루야를 할 때 그것이 주님께 큰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 오늘 칠레의 장면을 보셨지요? 사람들마다 병 고침을 받고 난 다음 얼마나 좋아서, 좋아서 울부짖지 않습니까? 안보이는 눈이 보이게 되어서 온 사람들 앞에서 손을 피고 "이제는 보입니다. 저 사람들이 보입니 다."하고 외치는 그 여인을 보십시오. 이마에 혹을 달고 왔다가 순식간에 혹이 떨어지고 붉은 반점만 이 남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휠체어에 앉아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휠체어 에서 일어나서 걷기 시작합니다. 그 일생의 얼마 나 큰 즐거움이며,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인 것 입니까? 전신에 암이 들어서 배가 남산만큼 부른 여인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왔다가 순식간에 배가 꺼져버리고 그 고통에서 해방되었을 때 울부짖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날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 해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 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 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께서 십자 가에 찔린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얻는 허물 때문인 것입니다. 허물이 많은 인생이 얼마나 많 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은 뒤 주머니에 달 고 남의 허물은 목 밑의 앞 주머니에 달아서 자기 의 허물은 보지 않고 남의 허물만 보고 남만 비평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기 눈의 대들 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있는 티끌은 보고 자 꾸 뽑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허물없는 인생이 누가 있습니 까? 우리의 일생의 허물을 예수님은 짊어지고 못 박힌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죄악 이란? 원죄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쫓겨난 그 원죄 말입니다. 영원히 버림 받은 죄. 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 영혼이 원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원죄 때문에 하나님 께 완전히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 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은 버 림을 받는 그 비참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를 그의 몸 으로 모두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 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만한 선한 행위는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도 자기의 죄악은 청 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일 생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원죄와 자범죄를 십자가 에 걸머지고 그는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이 모든 죄악을 다 청산했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우리의 죄악은 다 청산되고 죄악이 없 으니 죄를 잡으려는 율법은 철폐되어 버리고 누구 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은 혜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남녀노유, 빈부귀 천 할 것 없이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 면 용서받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을 얻고 구원을 받는 위대한 역사를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루기 위 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 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했습니다. 징계가 무엇 입니까? 징계를 받으면 직분이 정지되는 것이요. 징계 받아서 회사에서 쫓겨나고 정부에서 쫓겨나 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 고 징계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원수의 담이 가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하나님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습 니다.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은 징계를 받아 쫓겨 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쫓겨난 인생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징계 받는 그 징계를 당신이 짊어지셨 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창세 이후로 하나님과 분열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생애에서 비로소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아 쫓겨났을 때 주님 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님 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쫓겨나 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졌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처음으로 "하나님이 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징계를 받아 쫓겨나는 그 고통을 당하 므로 쫓겨나는 우리 인생과 하나님을 화해시켜 주 신 것입니다. 그 피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원수 된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따사로운 햇볕처럼 우리 마음속에 비추어 들어오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나서 쫓겨난 우리 가 다시 하나님 품으로 찾아 들어가게 되었으며, 탕자처럼 멀리 멀리 떠났던 우리가 병들고 고통스 럽고 헐벗은 가운데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 분이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할 때, 아버지 가 응답해 주게 되어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향 해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서 눈으로 보지 못 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예비해 주게 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 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되었으니 이 어찌 놀라 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하나님 의 축복을 받아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우리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게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징계 받은 그 고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강조해서 또다시 치료를 말합니다. 주 님과 치료는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과 치료 는 하나입니다. 주님은 치료해야겠다는 일념을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성경은 말하 기를 그가 빌라도의 뜰에서 갈기갈기 등이 찢어지 게 매를 맞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피를 흘린 것은 너희를 치료하기 위함이라. 영이 치료받고, 마음이 치료받고, 육체가 치료받고, 생활이 치료받 기 위함이라. 치료는 복음의 근본입니다. 치료 없 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는 곳마다 치료하는 역사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상이요. 종교이상입니다. 윤리와 도 덕적인 훈련 그 이상인 것입니다. 치료의 복음입 니다. 그리스도는 치료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가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 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은 순 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라는 것 을 확실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 스도의 고난이 한낱 종교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의 전 존재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법적인 대리 권한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단호히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주간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께서 날 대신해서 나의 모든 그릇 행한 것 나의 잘못 걸어간 인생을 짊어지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쓴즉 나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 님께 돌아와서 그 모든 저주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 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 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오늘 이 고난주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악 의 멍에를 꺾어버려야 되겠습니다. 모든 부정과 부패의 멍에를 꺾어버리고, 질병의 멍에를 꺾어버 리고, 저주의 멍에도 꺾어버리고, 사망과 음부의 멍에도 꺾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해방 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 니다. 예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해서 이처럼 위대 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찢어진 몸 과 흘리신 피가 오늘 우리에게 외칩니다. "내가 너 를 위해서 고난을 당한 것은 너로 하여금 고통에 서 해방을 주기 위함이라." 오늘 이 그리스도의 이 고통 당한 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 고난주간 동 안에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것을 깊이 생각 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멍에를 꺾 고 일어나서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머지 여생을 힘차게 영광 돌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 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이 아프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천번 만번 죄 때문에 죽어야할 우리들이 웬 말인지, 웬 일인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으로 꽉 들어찬 삶 을 사시고 최후의 극한 상황의 고난을 십자가에서 당하시고 자신을 찢어 우리를 살려주신 것을 감사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은혜를 오늘 기억하고 이 고난 주간에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경배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 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