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 3일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성구: 요 21:15∼17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달콤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사랑이란 말이 너무나 잘못 사용되고 남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사랑의 의미를 아시나요?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말을 일상 늘 사용은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의미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질문을 받고 나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확하게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입장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가요?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다면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우리가 몇 가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에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이란 말인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성간의 사랑, 육체가 중심이 된 사랑을 바로 에로스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종족을 보존케 하는 힘이요, 남녀가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게 하는 축복이요,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기르게 하는 능력이요, 육체적인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샘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에로스 사랑은 그 속에 대단한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사랑보다도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변화의 기복이 보통 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에로스 사랑, 이성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 본능적인 사랑은 대단히 변화 무쌍합니다. 그뿐 아니라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강하게 구하는 이기주의가 강합니다. 그리고 쉽게 에로스 사랑은 갈등 속에 빠져서 고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가족들이 파괴되고 가정이 고난에 처하게 되는 이유도 이 에로스 사랑의 실패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필레오 사랑입니다. 필레오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이며, 고향이나 직장을 사랑하는 마음도 필레오 사랑입니다. 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필레오 사랑인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이 육체가 중심이 된 본능적 사랑이라면 필레오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요, 친구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필레오 사랑을 가지므로 우리 인생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외롭게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서로 손을 잡고 사는 친구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단결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고 상부상조하며 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필레오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필레오 사랑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간이라도 한가지 목표를 향하여 격렬히 서로 경쟁하게 되면 자연히 필레오 사랑이 깨어지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또 친구라도 서로 계속해서 부담이 되면 필레오 사랑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정신적인 사랑인 필레오 사랑도 완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에 보여주는 사랑은 스톨케의 사랑인 것입니다. 스톨케의 사랑은 바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버금가는 그와 같은 사랑인 것입니다. 스톨케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며 조건이 없는 그러한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6.25사변 때 일어난 이러한 사건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6.25사변 때 저 강원도에서 차를 타고 추운 겨울에 피난을 내려오는데 다리 밑에서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여보! 다리 밑에 내려가 보자! 남편은 아니 지금 적군이 뒤에 쫓아오는데 빨리 가야지 왜 다리 밑에 내려가느냐! 아니야! 어린아이 울음 소리가 다리 밑에서 들린다. 그래서 그 부인의 강요에 못 이겨서 차를 세우고 다리 밑에 내려 가보니까 다리 밑에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피난을 오다가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곳에 가서 어린 아기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설한북풍이 휘몰아치는 겨울에 다리 밑에서 그는 어린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린 애기를 낳고 난 다음 이 애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옷을 다 벗어 가지고서 어린 애기를 그 옷으로 꽁꽁 묶어서 그리고 그 어린 애기 위에 맨몸으로 엎드려서 얼어서 죽어있고 엄마의 옷에 칭칭 감긴 어린아기는 엄마의 마지막 식어가는 체온 밑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이 어린 아기를 데려다가 자기 자식으로 삼고 그 엄마는 그 근처 야산에 빨리빨리 무덤을 파서 묻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 걸려서 이 어린 아이가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양부모에게 늘 묻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부모는 누구였냐고? 그래서 나중에 그 선교사 부부가 이 어린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피난 올 때 다리 밑에서 너희 어머니는 너를 낳고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 온몸의 옷을 다 벗어서 너를 꽁꽁 묶어놓고 난 다음에 그 위에 엎드려서 너희 엄마는 얼어서 죽어 있더라 그래서 그 야산에 너희 엄마를 파묻고 너를 데리고 와서 지금까지 키웠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기어코 자기 양부모에게 자기 엄마가 파묻힌 무덤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한국에 데리고 나왔는데 벌써 6.25 사변이 지난 지가 오래고 그 장소도 많이 변했기 때문에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림잡아 평포장한 그 황토흙 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아마 이 근처가 너희 어머니를 파묻은 무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웃옷도 다 벗고 바지도 벗고 내복도 다 벗고 발가벗어서 그 황토흙 위에 그 자기 옷을 얹어놓고 엄마 얼마나 추웠겠냐? 나를 낳고 모든 옷을 다 벗어서 추위에서 나를 살려준 어머니 이제 내 옷을 덮고 따뜻해지십시오. 그리고 그 황토흙 위에서 땅을 치며 울었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읽어보고 참으로 깊이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톨케의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자식을 살리겠다는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요, 스톨케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에 버금가는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톨케의 사랑도 비이성적인 감정적 사랑에 기울어지기가 쉽고 과보호적인 사랑이 되어서 자녀들을 잘못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스톨케의 사랑은 내 자식만 사랑하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체험하는 에로스 사랑이나, 필레오 사랑이나, 스톨케의 사랑은 비록 좋은 사랑이지만 그러나 그 사랑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를 못합니다.

오늘 두번째,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아가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이며, 비차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속에서 도저히 흉내낼 수 없고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 이 사랑은 우리에게 깊은 실감이 오지 않습니다.
내 제자 중 목사 한사람이 내게 와서 울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그 말씀을 나는 늘 익히 알고 외우고 있었지만 뼈저리게 가슴속에 부딪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장가를 가고 첫아들을 낳았는데 이 첫아들이 방실방실 웃고 정말 아름다울 때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내 첫아들이 죽어서 그 아들의 시체를 안고 그를 파묻으러 갈 때 내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릴 때 하나님의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었는가 나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지 일이라도 느낄 수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반역하는 인생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5장 7∼9절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며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남녀노유 빈부귀천 종족의 차별 없이 모두 다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 이 사랑 없이는 여러분! 우리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웨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켰다는 것은 바로 아가페 사랑이 근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 죄짓고 도망가는 우리를 끝까지 따라와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큰 은총인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이 근본이 되지 않고는 에로스 사랑도, 필레오 사랑도, 스톨케의 사랑도 결코 완전한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이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되기 쉬운데 여기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밑받침이 되면 비로소 이 모자라는 에로스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구간의 사랑도 예수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친구 사랑이 될 수 있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밑바탕이 되어야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이성간의 문제, 친구간의 갈등, 부모 자식간의 문제들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은 바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에로스 사랑도, 필레오 사랑도, 스톨케의 사랑도 활동할 때 비로소 그것이 참된 사랑으로 역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진실로 이 아가페 사랑으로 무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연구해서 얻을 없습니다. 배워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아가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받으면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남녀간에 서로 사랑하며, 친구간에 사랑하며, 부모 자식간에 사랑하고, 그 모든 부족한 것을 극복하고 원만하고 풍족한 사랑의 삶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세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물으시는 질문인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갈릴리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갈릴리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와서 기다리는데 언제 예수님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 저녁에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하고서 옛 배를 끄집어내어 옛 그물을 다시 기워서 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안개가 가득히 낀 해변에서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얘들아! 거기에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 그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하는 말이 "저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베드로는 즉시로 겉옷을 걸쳐 입고 물 속에 뛰어들어가서 헤엄을 쳐 나왔습니다. 그냥 배를 저어 나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들고 주를 볼 수가 없어서 찬물에 헤엄이라도 치고 나와야 체면이 설 수 있을 것 같아서 찬물에 헤엄을 치고 벌벌 떨면서 나왔습니다. 주님 곁에 와보니 주님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미 떡과 고기를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둘러 서 있는데 예수님께서 떡을 나눠주고 고기를 주는데 베드로는 받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닥불 가에 서 있으니 그날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도 그와 같은 모닥불 곁에 자기가 서 있었고 그곳에 예수님이 서 있었는데 그는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기억나기 때문에 베드로는 안절부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너무 고통 당하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야 가서 방금 잡은 고기를 좀 가져오너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여! 그렇게 하겠나이다! 뛰어나가서 아이고! 이제 살았다. 그러고는 그는 그물에서 새로 잡은 생선을 헤아려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그 생선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드리니 주님이 그것도 구워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식사를 다 하시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때 예수님이 사용한 말은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네가 희생적으로 무조건하고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그 말은 베드로는 나는 주여! 아가페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이제 희생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은 못하고 나는 친구로 사랑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잠시 후에 주님께서 또 말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도 주님이 아가페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나이다 한 그 아가페 사랑,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고개를 숙이고 나는 주님! 필레오 친구로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냐? 그러면 내 양을 치라! 그 다음 세번째 또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그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에 그만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에 내내 주님께 아가페 사랑한다고 했다가 주님을 배반했는데 이젠 주님께서 친구로서 나를 사랑하냐고 물을 때, 아! 주님이 또 내가 어떻게 하다가 친구로서도 배반할 줄 미리 알고 말씀하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나서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나는 몰라요!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언제 또 모른다고 배반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몰라요! 주님이 아시나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은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서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든, 필레오 사랑을 하든, 희생적으로 사랑하든 친구로서 사랑하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증거로서 주의 양떼를 치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여 전도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보호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일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서 주여!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아가페 하느냐! 필레오 하느냐! 그러면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을 하든 필레오 사랑을 하든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전도해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기도해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성도들을 돌보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성도들을 사랑하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교회를 부흥케 하라.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무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신 그 이유를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랑하며 주의 몸된 교회를 부흥하게 하고 향상하게 하고 발전하게 할 때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전도하지 아니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오히려 흩어지고 파괴하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주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아무리 외쳐보았자 그것은 사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다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렇다면 너는 내 양을 먹여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쳐라! 네가 내 사랑
을 안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멀리했지만 예수는 베드로를 오히려 사랑하셔서 다시 그 품에 안아주시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라 사랑하는 증거로써 내 양을 돌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한사람의 영혼을 사랑해서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하면 바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연약한 신도를 심방하고 격려하고 그 신앙을 살찌게 만들어 주면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잘 보도룩 여러분이 힘쓰고 애쓰고 시간을 내어 돌보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없이 아무리 예수를 사랑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에 결심을 하고 예수님의 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시간을 내고 몸 드리고 물질 드리고 열심으로 헌신 봉사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여러분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12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처럼 양을 사랑하십니다. 양된 우리를 주님께서 목숨을 걸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가 양들을 돌보고 양들을 먹이고 양들을 치고 양들을 잘 살찌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면서 베드로 보고 말하기를 나를 따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분 또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도 예수님을 으뜸으로 삼고 우리 가정을 예수님 중심으로 이끌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도 예수님을 사업장에 으뜸으로 삼고 예수님 중심으로 그 사업을 경영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예수님을 으뜸으로 삼고 그리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갈 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주와 함께 영원한 천국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여러 가지 어려운 난관이 많이 다가옵니다.
마가복음 8장 34∼35절에 기록한 말씀대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자면 사람들에게 비난도 받고 핍박도 받고 손가락질도 받고 그러고 소외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그 사람만이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양무리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우리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에 열심을 다할 때, 그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증거를 뚜렷이 보여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삶을 무의미한 삶이요,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좋다해도 그 근본이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서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랑은 부족하고 불안하고 불안전하고 또 쉽게 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의 부족한 모든 인생의 사랑을 완전케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해도 그 결과는 비참하게 됩니다. 권력을 사랑해도 그 결과는 허무맹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이 계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궁국적인 우리 삶의 의미요, 가치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 공명을 아무리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 순간적인 것이요,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물거품을 손에 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중에 마지막 이 땅을 떠날 때 너무나 허무맹랑하고 처절한 절망에 처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는 삶은 한시간도 잃어버린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영원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 질문에 우리는 분명히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렇다면 내 양무리를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사랑하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이러므로 우리는 열심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찾아서 전도하고 교회로 이끌고 성도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그런 삶 속에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러한 삶은 모든 시간마다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될 때 우리의 발걸음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의 삶 속에 평안과 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잘 모르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인간의 모든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가페 사랑, 희생적인 사랑, 무차별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 이러한 사랑만이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구원하사 천국으로 이끌어주실 수 있사오니 감사 드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사랑을 베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깨어서 우리에게 주시고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희생적이고 영원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옵니다. 오늘 성찬의 이 떡을 손에 들고 성찬의 잔을 손에 들 때 주님께서 이 물으시는 질문에 우리가 분명히 대답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가 그러므로 오늘 성찬을 떼면서 더욱 전도하고 더욱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더욱 교회를 위해서 섬기며 봉사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