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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24일 제목: 갈등 그리고 용서와 사랑 성구: 마태복음 18:21-35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등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현실의 삶과 세계는 갈등의 삶, 갈등의 세계입니다. 우리 나라의 사회 현실을 보면 가히 폭발적인 갈등이 정치계에 경제계에 사상계에 그리고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노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 큰 문제로 대두된 청소년 문제도 첨예한 갈등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서 우리들의 가정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도 갈등과 고통이 가득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삶을 들여다보아도 자신이 자신에 대한 갈등으로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갈등의 문제를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 가야만 할까요? 갈등의 문제를 풀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과 기쁨이란 허황한 낱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이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했을까요? 이 갈등은 바로 에덴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깨어지고 거기에서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을 상함도 해함도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낙원인 에덴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조화와 일치가 있어 큰 평안과 행복이 넘쳐 났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갈등이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탐욕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대신에 하나님처럼 되어서 경쟁자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과 경쟁하려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이 파헤쳐지고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심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미움과 심판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자 하나님의 마음의 갈등이 어떻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려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는데 미워하셔야 하고 복을 주시려고 그들을 지었는데 심판하셔야 되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속에도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이런 갈등이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등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보내서 성민으로 삼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430년 동안 길러서 300만 이스라엘을 모세를 시켜 인도해 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가서 제사장의 국가로 삼아 세계를 다시 한번 하나님 품으로 이끌려고 하셨습니다만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저항하고 불순종하고 불신앙해지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한 성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갈등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불신앙, 불순종, 불평, 원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사랑하려고 하나 미워할 수 밖에 없고 축복하려고 하나 심판할 수 밖에 없고 어루만져 주고자 하나 채찍을 때릴 수 밖에 없어 깊은 갈등 속에서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가테스파네아에 왔을 때에 하나님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동산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하는데 그들은 가나안 땅을 40주 40야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산은 높고 골은 깊고 땅은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산은 높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장부라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우리 장관을 세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과의 대립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갈등이 생겨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탐군인 10 사람을 죽이고 그 모든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대신에 광야로 돌려보내서 40년 동안 그곳에 거하면서 그들이 다 멸하기를 기다리셨으니 하나님의 마음속에 갈등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다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갈등의 요소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불신앙, 불순종, 우상 숭배, 제 악행을 다 행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큰 분노와 상처를 일으켰습니다. 사사기 2장 11절로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사사기 2장 14절로 15절에 "여화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에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의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와 갈등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과도 끊임없는 깊은 갈등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해서도 선민에 대해서도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멸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가지고 온 원인을 심판하고 그 위에 용서와 사랑으로 화해하고 하나 되는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갈등의 원인은 인간의 반역죄인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했는데 인류의 죄를 심판해 버리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멸망을 받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갈등의 원인인 죄도 심판하시고 인류에 대한 용서와 사랑과 화해도 가져오시기 위해서 그 방법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보내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반역한 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게 하시고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품에 품어 화해와 일치를 가져오려는 이 위대한 일을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갈등의 원인인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심으로 죄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요한 1서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십시요. 그 십자가 그 자체가 갈등입니다. 수평의 나무에 수직의 나무를 걸었습니다. 하나는 평면이요 하나는 수직입니다. 갈등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형용할 수 없는 그 갈등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혔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을 반역한 죄악을 그는 온 몸에 걸머지시고 그가 못 박혀 심판 받아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맥없이 늘어져 있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또 십자가의 구원의 메세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예수를 대신해서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갈등을 해소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일치를 부어 주어서 갈등의 문제를 해소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갈등의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심판을 해야 됩니다. 인간은 심판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 참 사람으로 오셔서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인류와 화해하시고 일치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내적 갈등과 이웃간의 갈등도 심각한 갈등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과 미움의 갈등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되겠는데 내 마음속에 미움이 있습니다. 내 남편을 사랑해야 되겠는데 마음속에 미움이 있습니다. 내 아내를 사랑해야 되겠는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해야 되겠는데 자식에 대한 미움이 있고 부모를 사랑해야 되겠는데 부모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이 숨은 갈등으로 마음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시기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웃이 잘되면 축복을 해야 되겠는데 우리 마음으로 잘 되었다고 축복을 해야 되겠는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축복을 해야 되겠는데 입으로는 축복을 하며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이 갈등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에 갈등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웃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100%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갈등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의 갈등도 있어요 내일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가지려고 애를 쓰지만 또 현실의 세계 속에 많은 절망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고 나면 모든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가득 안고 집에 돌아오면 절망이 구름떼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희망해야 할 것이냐! 절망해야 할 것이냐! 갈등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의 갈등에 있습니다. 하나님 믿고 모든 것을 밝고 맑고 환하게 보라고 늘 말을 하는데 그 실제 생활에는 밝고 맑고 화하게는 안 보이고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죽는다 부정적인 마음이 가슴속에 파도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나갈 것이냐! 언제까지 부정적이 될 것이냐! 선을 그을 수 없는 마음속의 갈등이 우리 마음속을 부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저 마음속에 갈등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항상 죄가 마음속에 끌어 오르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악이 늘 같이 하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부정한 마음이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로 24절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탄식은 바로 여러분과 나의 탄식이며 바울의 마음의 갈등은 여러분과 나의 마음의 갈등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자신을 심판하고 그리고 내가 스스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해서 나를 용서하고 나를 끌어안아 사랑하고 내 자신과 화해하는 것 밖에는 내 스스로의 내적 갈등을 이길 도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내 죄를 다 청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나와 내 자신과 화목하고 그래서 예수 안에서 내 마음속의 갈등이 사라지고 내 마음속이 통일되고 화평하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은혜를 받지 않고는 내적인 갈등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마음에 평안하고 마음이 기뻐지고 행복해지는 이유는 마음의 갈등에서 해방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때문이 아닙니다. 더럽고 못나고 부정적인 내 자신도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그 고통으로 벌을 청산하고 그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나를 끌어안았고 내가 내 자신으로 화해함으로 내 마음에 큰 화평과 기쁨과 행복으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 간의 갈등도 한 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은 늘 있습니다. 오늘날 더욱 우리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은 세대 차로 말미암아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은 형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유, 자식이 웬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낳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안 해 본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세대 간의 차이의 갈등이 너무나 심합니다. 부부 간의 갈등은 없나요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됩니까?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고 결혼 서약을 하고 난 다음 얼마 있지 아니하며 그렇게 뜨겁던 사랑이 시베리아 벌판 같이 차가워지고 갈등으로 말미암아 서로 찢고 찢기고 서로 상처를 입히고 나중에는 갈라서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도 더욱 심합니다. 옛날에 농경 사회에는 부모 밑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지내기 때문에 더 대화가 많고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오늘 산업화 사회에 여러분 형제라고 하더라고 1년에 한 두번 만날까 말까 합니다. 전부 다 핵가족이 되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부딪치면 대립이 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그런 갈등 속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웃간의 갈등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지요 모든 사람이 다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기주의적이 되고 그래서 나 아니면 전부 원수입니다. 사랑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웃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계층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연년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모든 구조를 보면 대결과 갈등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여러분 이런 문제는 그 모든 갈등의 원인을 심판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끌어안는 길 이외에는 화해와 일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통하여 심판 받은 것을 바라보고 용서와 사랑을 하도록 마음을 고쳐먹고 입으로 시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라고 갈등이 없나요? 저도 이웃과 갈등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이 내게 잘못한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짊어지고 다 값았으니 내가 스스로 내가 말을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그 사람이 미워질 때면 아니야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마음속에 자꾸 나를 보고 말을 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마음속에 용서하고 사랑하고 만나면 얼굴에 긴장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이놈 하고 미워하면 얼굴에 긴장이 꽉 들어 찹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그러면 대화가 되고 타협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로 28절에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와 같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저 사람을 위해서 저 원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죄를 대신 짊어지셨는데, 예수님이 용서하시니 내가 뭐길래 용서 안 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사랑하시니 나도 사랑해야 되겠다. 예수님이 화해하시니 나도 화해해야 되겠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는 여러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는 힘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한번은 주님께 나왔습니다. '주님 내 이웃이 내게 잘못하면 일곱번 용서하면 됩니까! 베드로는 큰 마음 먹고 한 것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니야, 죄를 짓고 너에게 와서 잘못하거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490번을 용서하면 하루종일 용서하다가 볼일 다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18장 23절레 35절에 보면 한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와서 빚을 탕감해 달라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왜 임금님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졌으니 그 빚을 못 갚음으로 처자를 다 종으로 잡아 팔고 재산을 몰수해서 빚을 갚으라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할 힘이 없기 때문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이 임금이 보니 너무 불쌍합니다. 그러면 좋다. 1만 달란트의 빚을 다 용서해 주었다. 탕감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마음에 공포와 고통과 괴로움의 갈등이 다 해소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변화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기와 같은 친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에 달하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입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의 소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임금에게 진 빚보다는 60만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빚을 진 동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야, 너 나의 빚을 갚아라 나에게 말미를 좀 주게 내가 너무 생활이 어려우니 내게 시간만 주면 내가 어찌 하던지 갚겠네' 잔소리 말아라 지금 갚아라. 지금 갚을 수가 없네. 그러니까 멱살을 잡아다가 끌어다가 관에 고발해 가지고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본 친구들이 너무 야박한 마음에 임금님에게 가서 고했습니다. 임금님이 일만 달란트 사해준 그 사람이 60만분의 1밖에 안 되는 일백 데나리온를 빚을 지은 친구를 잡아다가 그 빚을 안 갚는다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임금님이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그놈 당장 잡아오너라.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잡아왔습니다. 네 이놈아 네가 사정하고 간구하기에 내가 너의 일만 달란트 빚을 다 용서 해 주었는데 내게 그만한 용서를 받았으면 너는 용서에 빚진 자라. 일백 데나리온 빚 진 너의 친구의 빚을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거늘 네가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처넣었으니 이 놈을 잡아서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처넣어라.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 온갖 고충을 겪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도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어마어마한 용서를 받고 난 다음에 네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것은 뭡니까? 우리가 오늘날 가난에 감옥에 갇히고 질병의 감옥에 갇히고 고통의 감옥에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많은 것들이 용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는데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우리를 감옥에 넣을 것입니다. 산 감옥이 아닙니다. 질병의 감옥, 경제적인 고통의 감옥, 시련과 환난의 감옥에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치도록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한없이 불완전하고 이 불완전 때문에 갈등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도 완전하지 못해서 스스로 내적 갈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완전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파멸치 않고 계속되는 것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실천하지 않는 개인과 가정과 집단은 이 사회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하지 않는 가정은 이혼하고 파괴됩니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실천하지 않는 사회는 분열하고 분쟁을 하고 망합니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하지 않는 정치단체 서로 물고 찢으면 둘 다 망해 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불완전하면서도 살아서 존재하는 이유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 때문입니다. 자연을 보십시요. 전쟁이 나서 온 산천을 태워도 자연은 그것을 용서하고 그 다음에 다시 푸른 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 맺도록 만들어 줍니다. 천지지변이 나서 천지가 뒤엎어져도 자연은 다시 그것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다시 풀이 나고 꽃이 피고 살 수 있는 처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화해, 이것이 우리로 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완전하지만 계속하고 실천하는 자는 발전하고 성장하고 향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가장 위대한 길은 십자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과 사람 사이에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다 감당하여 청산케 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은 죄도 다 청산해 주고 예수님이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물이 되어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용서를 가져오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화해하고 사람과 사람과 화해하여 일치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놀라운 힘이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넘쳐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우리가 엎드리지 않고는 우리는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고 우리 가정이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우리의 생활이 지속적으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 길을 버리면 자기 동관을 감옥에 가두고 자기도 감옥에 가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파멸의 감옥에 가두어서 우리를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 같이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도 용서 받았으니 남도 용서하고 나도 사랑 받았으니 남을 사랑하고 나도 화해했으니 나도 남과 화해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은 마귀와 죄 때문에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벌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갈등의 골을 깊이 하고 하나님께서도 갈등하시고 인간도 갈등하고 삶 전체가 갈등으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갈등의 죄악을 당신의 몸으로 다 맡아서 처형 당하고 그를 통해서 용서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사랑과 화해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일치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와 사랑과 화해, 이 길이 우리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국가가 살고 세계가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을 버린 개인이나 가정, 사회나 국가나 민족은 역사상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스스로 싸우는 집마다 망하고 스스로 나누어 싸우는 나라마다 망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일치가 아닌 미움과 분노와 투쟁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여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해서 사는 길을 택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유기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다 해소하여 주시옵시고 한없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이제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살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 드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그 화해를 이루신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이 나타나서 모든 질병을 멸하여 주시옵소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질병을 도말시켜 버려 주시옵소서. 마귀의 일을 멸하여 주시옵소서. 너희 원수 질병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각자의 몸에서 사라질지어다.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 이름으로 치료와 생기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온 사람들, 우리 아버지의 품에서 그 문제가 다 녹아지게 도와 주시옵소서. 해결되게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가 웃으면서 복을 내려 주옵소서. 등을 두들겨 주심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함이 다가오게 도와 주시옵소서. 슬픔 대신에 기쁨이, 절망 대신에 소망이, 죽음 대신에 부활이 다가오게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이 모든 사람 속에 넘쳐나게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여 성령으로 충만 충만 충만 충만 충만 충만 충만케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