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1일
제목: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성구: 로마서 12:1-2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눈 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늘 흉을 합니다. 그리고 허물을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눈속에 있는 대들보부터 뽑으라. 그런 후에 밝히 보고 네 이웃의 눈의 티를 뽑아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눈에 대들보는 그대로 두고 이웃에 눈 안에 있는 티만 뽑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비평하고 평론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주신 교훈의 말씀은 내 자신부터 변화하고 그 연후에 타인을 변화시키라고 하는 분부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조국은 환골탈태하는 변화를 가져와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다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재벌은 노동자가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고 노동자는 재벌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부는 국민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고 국민은 정부가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변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남이 변화를 받기를 요구하고 또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만 참 변화가 우리 이 땅과 민족에게 다가올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그 본성이 언제나 내 탓을 말하지 않고 남을 비방하는 타락된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다 네 탓이지 내 탓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얼마나 아름답게 지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아담과 하와를 지어서 에덴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먹지 말라는 동산의 중앙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찌하여 먹지 말라는 실과를 먹었느냐고 꾸짖을 때에 그는 두말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하와 탓으로 그랬지 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변명을 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보면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기에 아담은 제일 먼저 하나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그 하와라고 말했습니다. 선악과는 자기가 따먹어 놓고 책임은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내게 안 주셨으면 내가 꾀임도 안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주심으로 제 1차 책임은 하나님이요 제 2차 책임은 하와가 나를 꾀었기 때문에 내가 그 꾀임에 넘어 가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탓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탓이고 하와 탓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였느냐? 하와는 당장 창세기 3장 13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뱀 탓입니다. 내 탓이 아닙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기본 성격은 언제나 잘못을 내 탓으로 정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생각하는 이러한 부패가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서 죽인 이유도 아벨 탓에 자기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인도 제단을 쌓고 아벨도 제단을 쌓고 가인은 자기 손으로 만든 곡식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았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함으로 가인이 분개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제사를 잘못 드린 것이 아니라 아벨 때문에 아벨이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제물을 안 드렸으면 하나님이 별 도리 없이 내 제물을 받아 주셨을텐데 아벨 때문에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벨을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 생각해서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히 마음속에 깨달아야 할 것은 모든 일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지 아니하고 남을 자꾸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에 보니까 미국 씽씽 형무소 사형수 중에서 사형장에 나갈 때에 한 사람도 자기 잘못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정부 때문에 사회 때문에 내 부모 때문에 내 가족 때문이라고 말을 하지 내가 잘못해서 사형 당한다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불행, 사회의 문제, 국가적인 문제가 다 자기는 제외한 타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비수와 같이 들어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 내고 우리 자신이 변화를 받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밝히 바라보고 그것을 뽑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를 받아야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강요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하고 내가 무릎을 꿇을 때에 이웃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네 탓이고 내 탓은 아니라고 해서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이웃에 겨눌 때에 나도 변화 받지 않고 이웃도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두번째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어떠한 차이가 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서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십계명을 주실 때에 하늘이 연기로 둘러 쌓이고 옹기점 같이 구름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고 뇌성벽력이 치고 그 은은한 가운데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거역하는 날에는 너희들은 죽으리라. 엄한 계명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그 죄의 탓으로 준엄하게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순종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얘를 썼고 더욱 반항하고 반역하고 그 결과로 죄의 노예가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생을 다스릴 때에는 인간이 율법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항하고 율법을 범하고 그리고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율법은 한 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외부세력에 의해서 강압을 당할 때에 강제로 굴복하고 변화를 받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힘이 아무리 가해져도 그 밖 힘으로는 일시적으로 순종하고 굴복하고 변화 받는 척하지만 실제로 마음속에는 더 무서운 반항과 반역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생을 다스리는 방법의 변화를 가져 오셨습니다. 요번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엄하게 진노와 심판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큰 사랑과 자비로써 인생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한 방법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사람으로 오셔서 죄를 사람에게 탓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죄를 당신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하고 버림을 받아야 함에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죄를 돌리지 않고 당신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며 온갖 고통과 괴로움과 모욕을 다 참으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당한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조건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협박하지 아니하시고 강요하지 아니하시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이 골고다 산정 갈보리 십자가에서 사람으로 오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처참하게 죽어가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가 다가옵니다.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 율법과 심판으로 다가오던 하나님이 스스로를 변화시켜서 큰 희생과 사랑과 용서를 가지고 나타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으로 피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나님의 율법은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앞에 우리는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예수님에게 내 일생을 맡겨서 살겠습니다. 그런 큰 변화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주먹으로 때려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협박과 공갈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 변화가 하나님 속에서 우리 속으로 넘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자연적으로 큰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서 강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자원해서 성수주일하고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전도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마음속에 큰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다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명령하고 심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심판 받으시고 피 흘리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그 태도에 큰 변화가 가져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말하지 않고 거꾸러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세째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우리도 이제 모든 일에 있어서 네 탓이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율법과 계명으로 심판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생각하고 내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변화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변화가 다가오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이 왜 애들 교육을 잘못 시켰느냐! 왜 가계부를 잘못 적느냐! 집안 청소를 잘못 하느냐! 왜 이 모양으로 사느냐! 시시콜콜 캐가면서 자꾸 율법적으로 남편이 심판해서 그 아내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적인 남편에게서 아내는 도망을 칩니다. 반항을 합니다. 저항하고 변화받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키려면 남편이 먼저 변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십자가를 걸머지고 아내의 허물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끌어안고 남편이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그러한 사랑과 자비와 인내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될 때에 그것이 아내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가 내가 정말 잘못 했다 이런 좋은 남편을 내가 잘 섬기지 못하고 내가 잘못 살았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7절에 보면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언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말했습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합니까? 자꾸 바가지 긁고 온갖 조건 내세우고 앙칼 부리고 싸움을 걸면 남편이 변화되고 싶어도 그런 아내 앞에서 남편은 천리 만리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안 달아 나던데요. 몸은 안 달아나도 마음은 이미 달아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남편을 공박함으로 남편이 착한 남편이 되고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적인 남편이 될 것이라고 많은 여성들이 그런 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잘못된 망상입니다. 남편을 여러분 율법으로 휘어잡지 못합니다. 앙칼한다고 남편이 변화받지 않습니다. 바가지 긁으면 더 마음속으로 악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을 변화시키느냐! 십자가를 걸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여간 잘못 하고 또 남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알면서 눈감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이니까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오히려 전보다도 사랑해 주고 더 격려해 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면 그 아내의 속에 다가오는 변화가 남편에게 변화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내 아내가 참 착하다. 내가 이렇게 잘못 살아도 알면서 모른 체하며 십자가를 걸머지고 더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니 내가 다른 사람이 되야겠다. 사람인 이상 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절로 2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자매님의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대단히 율법적이고 무섭고 까다로운 남편입니다. 돈 한푼 쓰는 것까지 전부 다 조사를 하는 남편입니다. 그래도 이럭저럭 살면서 내내 남편하고 서로 다투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이 한번 마음속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않고 남편의 티만 자꾸 뽑으려고 하다가 남편하고 이렇게 사는구나. 이젠 내가 변화를 받아야겠다. 그런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있는데 하루는 동창회에 갔다가 동창들하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동창 중에 한 사람이 교통 수단이 없습니다. 마침 자기는 자가용을 가져왔기에 그럼 집에 태워주겠다. 동창의 집까지 가는데 그만 차가 너무 막혀서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밤 12시가 넘고 한시쯤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창을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이젠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3차 전쟁이 아니라 4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분기충천해서 그냥 방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집에 들어가자마자 병력같은 고함을 치면서 어느 여편네가 밤 1시까지 돌아다니냐고, 당장 자동차 열쇠를 내어놓아라. 속으로는 부글부글 끌어 올라도 변명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 다음 모든 카드를 다 내어놓아라. 크레디트 카드 다 내놓았습니다. 이젠 골방에 가서 자라. 그날 같이 싸웠으면 터졌을 것인데 그 부인 하는 말이 자기도 변명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만치 올라오더랍니다. 뭐 내가 놀러 다녔나 동창에게 차 좀 태워다 주고 교통이 막히니까 좀 1시쯤 늦게 왔기로서니 오히려 사고 안 나고 왔다고 격려를 해 주지 않을 망정 이렇게 협박을 할 수 있냐! 그리고 온갖 협박 공갈을 하면서 당장 그 자리에서 가계부를 가져와라 이 돈은 어디에 썼느냐! 왜 돈을 많이 썼느냐! 뭐 혼이 났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나서 남편에게 아주 따뜻한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그 다음 오후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보통 때는 뭐 자기 생각에 어림도 없이 전화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남편에게 전화하니까 남편이 왜 전화했어! 여보! 어제 저녁에 당신에게 너무 내가 성나게 만들어서 너무너무 미안해요. 정말 죄송해요. 한번 용서해 주세요. 그 다음 남편 말이 봄바람 같이 달라지더랍니다. 알았어 됐어. 그래 저녁에 오는데 식사를 잘 대접하고 나니까 자동차 키 가져가. 카드도 가져가. 어제 내가 너무 화를 내서 미안해. 자기 같으면 화 안 나겠냐! 그럼요 화가 나지요. 그 다음부터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간증하기를 우리 남편을 내가 변화시키려고 그렇게 논쟁도 하고 이론도 세우고 싸웠지만 결단코 변화되지 않는 그 양반이 내가 변화를 받고 나니까 그가 점점 그 봄바람에 변화를 받아 이제는 양같이 온순하고 좋은 남편이 되었다. 남편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남편에게 율법적인 강요를 했으나 점점 반항하던 그 남편이 결국 아내가 변화되고 나니까 남편이 변화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뉴욕의 유명한 깡패 두목 니키 크루스는 뉴욕 경찰이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니키 크루스 깡패 집단이 다니면서 온갖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을 해도 뉴욕 경찰이 겁을 내어서 손을 댈 수가 없었요. 이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저 시골에 있는 월커슨 목사라는 아주 촌놈 목사가 하루는 촌에서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 뉴욕에 가서 할렘가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뉴욕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는 비행기표를 사서 뉴욕에 가서 할렘가에 갔습니다. 그곳은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길거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증거하라고 하니까 그곳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 하니까 이 니키 크루스란 깡패가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서 뭐 이런 게 남의 지역에 와서 야단이냐 저거 좀 손 좀 봐라. 그러니까 부하들이 가서 월커슨 목사님을 때리고 눕혀서 짓밟아 버리고 그러다가 팔이 부러지고 온 코가 다 비뚤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니까 사랑 좋아하네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날도 니키 크루스가 거리를 지나가니까 이제는 팔을 붕대에다가 말아서 걸치고 코가 비뚤어지고 얼굴이 이렇게 터져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그러니까 니키 크루스는 뭐 이런 게 있어. 팔 다리 다 뿌러지고 싶냐고 와서 발로 차니까 한 쪽 손으로 그 니키 크루스 바지 가랑이를 잡으면서 선생님 하나님은 당신을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해요. 그 말에 니키 크루스는 상당히 찡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지간히 저렇게 얻어맞았으면 욕이라도 한 마디 할 것 같은데 저렇게 얻어맞고 터져가지고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니 저 것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그런데 그날 집에 가서 자려고 하는데 그 마음속에 윌커슨 목사님이 자꾸 떠오르는 것입니다. 얼굴이 터져서 코가 삐뚤어지고 눈이 붓고 팔이 부러지면서도 자기 바지 가랑이를 잡고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데 누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구원받으라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깡패를 죽이지 않으면 비난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누구기에 이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보복하지 않고 욕 한마디하지 아니하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또 일어나서 그 촌놈 목사가 있나 하고 가보니까 그 날 또 길거리에 서 가지고 이제는 맞은 것이 부어가지고 눈도 못 뜨고 길거리에 서 가지고서 또 다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니키 크루스가 자기 부하들을 보고 너희들 다 오너라 꿇어앉아라. 그 길거리에서 윌크슨 목사 앞에 전부 꿇어앉아 가지고 전부 회개하고 총하고 칼 다 내어놓고 그 깡패단을 해체하고 니키 크루스는 그 다음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어 오늘날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 연방 법원이나 FBI나 뉴욕 경찰이 온갖 국가 법을 총 동원해서 이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해도 변화도 못 시키고 잡지도 못했는데 한 사람의 시골 목사가 와서 많이 얻어맞고도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아니하고 변화된 그 심정으로 사랑을 베풀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이 국가의 힘보다 더 강하게 이 사람을 변화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일 윌크슨 목사님이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셨으면 이 니키 크루스 같은 사람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나부터 변화를 받으면 남이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남이 변화되면 내가 변화 받겠다는 이것은 순서가 잘못 되었습니다. 아내가 변화 받으면 내가 남편이 변화 받겠다. 남편이 변화 받으면 나도 변화 받겠다. 이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나부터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밑에서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그래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위해서 격려하고 내가 십자가를 걸머지면 그 변화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무슨 능력과 권세가 없습니까? 전지 전능하신 권능을 가진 하나님도 율법과 외부적인 폭력으로써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사랑을 베풀 때에 이를 통하여 사람들이 변화된 것을 아십시요. 하나님도 폭력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율법과 심판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십자가를 걸머지고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사랑을 베풀 때에 전부 네 탓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 다 내 탓으로 끌어안고 내가 십자가를 걸머질 때 세계가 그 십자가 밑에서 변화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도 아닌데 우리의 율법이나 폭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으로만 변화시킬 수가 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십자가를 걸머지게 됩니다. 사랑 받는 자가 십자가를 걸머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십자가를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십자가를 걸머져야 아내가 변화 받고 아내가 십자가를 걸머져야 남편이 변화를 받습니다. 부모가 십자가를 걸머져야 자식이 변화 받습니다. 국가가 십자가를 걸머질 때에 국민이 변화를 받습니다. 노동자가 십자가를 걸머지면 사용자가 변화를 받고 사용자가 십자가를 걸머지면 노동자가 변화를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모두 다 내 탓은 아니고 네 탓이라고 할 때 그래서 율법과 심판을 계속할 때에 아무도 변화 받지 못하고 오지 그 곳에서는 갈등과 알력과 심판만이 있을 것입니다. 크고 적은 일에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알고 내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내가 고난을 당하면 나로 말미암아 큰 변화가 다가옵니다. 이 IMF 한파에 이 나라에 나 같은 조그마한 사람이 무슨 변화를 가져오겠느냐! 아니올시다. 내 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변화를 받아 수돗물도 아껴 쓰고 전기도 아껴 쓰고 코드도 뽑아놓고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것이 나로 말미암아서부터 시작해서 그 변화는 온 국민에게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거대한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변화 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부터 변화 받는 오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위는 모두 다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혹은 좋게 혹은 나쁘게 그러나 그 변화의 원동력은 내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8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걸머지고 성령으로 심으면서 살아나가는 우리 각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기주의적으로 자기 중심으로 살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서로 딱딱하고 혼탁한 것도 아무도 십자가를 걸머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다 남이 십자가를 걸머지기를 기다리고 나는 안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큰 변화도 지극히 적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도 몰라 줘도 내가 십자가를 걸머지면 그 변화는 끊임없이 파장이 되어 이웃으로 넘쳐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아버지여 네 탓으로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하고 내가 고난을 참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사랑과 희생을 베풀므로 변화의 거대한 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