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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16일 주일설교 제목: 희망을 향해 나아가라 성구: 왕하 7:1-9 설교: 조용기 목사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희망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아무리 처절하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찬란한 부활의 영광된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교회는 수많은 핍박과 환난을 통해 왔지만 결코 패망하거나 이 세상에서 교회의 흔적이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가운데 뿌리 박힌 부활의 소망 때문인 것입니다. 고난이 아무리 심해도 희망이 있는 이상 고난은 이미 절망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참고 견디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진실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극복하신 이후는 미래에는 놀라운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미래에 있는 희망, 그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참을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 속에는 부활의 희망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IMF 한파가 아무리 극심해도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부활의 희망이 이 IMF 한파 속에 꽃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눈을 들어 내일에 다가올 희망을 줄기차게 바라보아아 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희망을 통하여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릴 이 역사적인 한 사건은 희망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이 아람 왕 벤하닷의 대군에 포위를 당했습니다. 아람왕 벤하닷은 대군을 거느리고 사마리아성을 첩첩이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군대를 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 안에는 굶주림이 가득찼습니다. 비축한 양식이 다 떨어지고 이제는 물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굶주림이 심했던지 나귀 머리나 심지어는 비둘기 똥까지라도 양식으로 거금에 거래에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임금님이 성위를 걸어가는데 한 여인이 뛰어 나와서 ‘왕이여 왕이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소서’ 그렇게 외쳤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쌀이 있느냐 돈이 있느냐?’ 그런나 그 여인이 말하기를 내 사연은 이러합니다. ‘우리 이웃과 함께 너무 배가 고파서 오늘은 너희 아들을 잡아서 먹고 내일은 우리 아들을 잡아서 먹자 그렇게 약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들을 내어놓아서 잡아서 삶아서 우리 이웃끼리 나누어 먹었습니다. 오늘은 이웃의 아들을 먹을 차례인데 이웃이 그만 그 아들을 감추어 놓고 내어놓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왕이 이 말을 듣자 그는 가슴을 치고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궁에 돌아와서 자기의 신하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이 나라에 선지자가 있느냐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렸음으로 선지자 따위는 필요 없지 않느냐 엘리사를 찾아서 그 목을 베어라’ 왕은 처절하게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사자들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엘리사의 집에 찾아 갔을 때에 엘리사는 이미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해서 그 왕이 사자를 보내어서 자기를 죽이려 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라사가 하는 말이 ‘빨리 대문을 채워라. 저 살인자가 나의 목을 베려고 그의 신하들을 보낸 것이 아닌가’ 얼마 있지 않다가 대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는 왕이 보낸 사자로서 엘리사의 목을 베러 왔노라’ 그때에 엘리사는 절망의 강을 건너 위대한 희망의 메세지를 선포했습니다. 열왕기하 7장 1절에 보면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예를 들어 밀가루 한 말에 천원 하고 보리 두 말에 천원 하리라.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꿈꿀 수 없는 환경입니다. 나귀 머리나 비둘기 똥이 거금으로 거래되는 그 상황에서 밀가루가 또 보리가 그렇게 헐값으로 사마리아 성문에서 팔리리라고 예언한 그 엘리사의 예언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한달 후, 1년 후가 아니라 바로 내일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거대한 희망을 그는 선포를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보낸 왕의 국무총리가 그 엘리사와 사람들 앞에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늘에서 창문을 내신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정상적인 말입니다. 이성적인 인간으로서는 정상적인 말인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 절망의 신앙을 주장한 자에 대해서 엘리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엘리사는 말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 때 엘리사를 통하여 위대한 희망을 전파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바로 희망의 신앙을 전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절망의 신앙을 주장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요 절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요 좌절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5절로 6절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우리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잠잠히 기다리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희망이 넘쳐 나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고난을 찬미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기독교 신앙이란 바로 고난 속에서 아름다워진다고 주장을 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에서 영광으로 들어가면 타락한다고 말을 합니다. 말은 그렇게 쉽습니다. 이번 수해를 통해 보십시요. 고난이 아름답다면 여러분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수해를 당하여 가족을 잃고 혹은 처자를 잃고 가재도구를 다 잃고 집까지 잃은 그 고난이 아름답습니까? 풍수해를 당하여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은 고난 당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값싼 저지대에 집 짓고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풍수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 가난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입니까? 오늘날 당한 이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고 즐긴다면 하나님은 정상적인 하나님이라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고난에서 영광으로 들어가면 타락한다는 말은 쉽게 말을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그 말 하는 사람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온 세계를 등에 진 오늘날 영광스러운 미국 교회는 다 타락한 교회입니까? 미국 교회는 엄청나게 오늘 영광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미국 교회가 다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미국이 온 세계 선교의 거의 전부 책임을 걸머지고 있습니까? 영광이 타락의 길이라면 그러면 천국은 영광 밖에 없는데 그러면 천국은 타락한 곳이라는 말입니까? 고난은 회개와 연단을 통해 더 큰 영광을 주기 위한 수단이지 고난 그 자체가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고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고집이 깨어지고 불순종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믿고 나와서 하나님 곁에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지 고난 그 자체가 아름답거나 미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학이란 고난을 통해서 줄기차게 우리에게 희망과 영광을 주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이것인 것입니다. 고난이란 외적 압력에 의해서만 성장하는 교회는 병적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난을 받아야 교회가 성장한다. 고난을 받아야 교회가 발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솔직한 말로 채찍을 때려야 자식이 공부를 하지 채찍으로 안 때리면 공부를 안한다. 그러면 꼭 채찍에 맞아야 공부를 하는 자식을 병적인 것입니다. 스스로 택해서 열심으로 공부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자라는 그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이지 환난을 당하여 수해를 당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유행병이 돌고 무수한 고통을 당하여 그때에 비로소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교회가 성장한다면 그것은 병적인 성장이지 정상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애가 3장 32절로 33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타락하고 주를 저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돌이키기 위해서 고난도 보내시고 채찍도 보내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무얼 기뻐서 인생으로 근심하고 고난 받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충만한 중에서 말씀과 성령에 충만하여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는 교회가 참으로 건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충만한 중에 말씀과 성령이 넘쳐나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러한 개인 신앙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언제나 얼룩지게 얻어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것은 병적인 신앙이지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미화하거나 고난을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인생에는 고난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만하고 교만하고 오만하며 자행 자재하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을 따라 타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보내사 우리는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데 한 수단으로서 필요한 것이지 그러나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소원인 것입니다. 요한3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더 큰 소망과 영광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우리를 예비시키고 준비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니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의심하고 절망과 좌절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이 아람왕 벤하닷의 군대에 둘러 쌓여 좌절하고 처절한 절망에 처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 사자를 보냈을 지라도 엘리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장쾌한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것도 한달이나 1년후에가 아닌 바로 내일 사마리아성 입구에 음식이 넘쳐나고 양식이 넘쳐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희망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장관에 대해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네 눈으로 보지만 먹지는 못하리라는 준엄한 심판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사마리아성 입구에 문둥이 네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원래 문둥이는 여러분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ㅤㅉㅗㅈ겨납니다. 성한 사람이 오면 외쳐 말합니다.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성안에 들어 가면 돌로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이 문둥이들이 성밖에 앉아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그들은 굶주려 일어날 힘도 없는데 문둥이가 되어서 입술도 다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도 다 문들어지고 발도 문들어지고 온몸 전체가 고름으로 엉켰다 터진, 인생으로 말하면 너무나 좌절과 절망의 사람입니다. 배 고픈 것만 절망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온 몸이 썩어져 들어가 희망이라고는 실낱만큼도 없는 그런 문둥이 네 사람이 사마리아성 문에 앉아서 그들은 서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여기 앉아서 숙명적으로 고난이 우리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우리는 이대로 죽을 것이다. 우리가 억지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도 굶주림이 꽉 들어 차 있어서 얻어먹지도 못할 것이고 우리는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여기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죽음을 숙명으로 삼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희망을 향해서 전진할 것이냐? 희망이라고는 저 아람 군대밖에 없다. 아람 군대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로 간다고 우리를 살려 놓을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죽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희망이 있다. 똑같이 죽음이 있지만 사마리아성 안에 들어가서는 희망이 없다. 그곳은 끝없는 굶주림과 좌절과 절망이다. 아람군인들이 우리들의 적이지만 그 속에는 먹고 입고 마실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앉아서 어찌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 일어나서 희망을 향하여 한번 전진해 나가자’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희망을 붙잡고 나가자고 결정을 내립니다. 큰 희망이 아닙니다. 실낱만한 희망입니다. 문둥이들이 아람군대에 간다고 아람군인들이 살려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양식이 있고 그곳에는 옷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 죽든 희망을 향해서 걸어 가다가 죽더라도 희망 속에 죽자. 그러므로 희망을 향해서 걸어가자.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희망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예레미아서 29장 11절로 13절에 보면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요 평안입니다. 장래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네 사람의 문둥이가 실낱만한 희망이지만 희망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자고 할 때에 하나님은 이 네 사람의 문둥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에 있는 위대한 학자들로 통해서 변설자를 통해서 혹은 군대를 통해서 그렇지 않으면 은이나 금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부여잡고 전진해 나가는 그 문둥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문을 열어 놓으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십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을 지으셨으며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지으신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천지가 진동하지요. 그러나 이 하나님은 실낱만한 희망을 가지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문둥이들을 택해서 사용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고 우리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하나님은 절망한 군인들을 쓰지 않습니다. 절망한 학자들을 쓰지 않습니다. 비관하는 지도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희망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 146편 5절로 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하나님께 희망을 두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사람의 문둥이가 황혼에 서로 일어났습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니 잘 걸을 수가 없지요. 몸에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네 사람이 팔과 팔을 끼고 희망을 향하여 그들은 걸어갑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네 사람이 다 함께 자빠집니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네 사람이 다 주저앉습니다. 넘어지면 서로 격려를 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는 희망을 향해서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가다가 넘어져서 앉으면 ‘야 앉으면 어떻게 하냐 일어 나라 앞으로 전진해 나아야 되지 않겠느가 우리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그 네사람이 팔을 잡고 가는데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한 분이 거기에 같이 팔을 잡고 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네 사람이 행진하는데 실제로 하나님이 보기에는 제 다섯번째 사람 우리 주 예수께서 함께 행하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와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걸어가니 그들이 넘어질 때에 그 넘어지는 소리를 하나님이 증폭시키시매 거대한 전차 바퀴의 굴러가는 소리로 들리게 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격려할 때에 천지를 진동하는 군인들이 서로 격려하며 앞으로 나가자는 소리가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람 사람이 황혼에 저녁을 지어 놓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거대한 전차 바퀴 소리가 들리고 대군대의 진행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둥이들이 자빠지니 그 소리가 완전히 온 군인들이 진격해 오는 소리로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으로 적은 것을 크게 증폭시킨 것입니다. 그들이 그만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고 헷사람이나 애굽사람에게 돈을 주고 용병을 동원했다 저들이 우리를 사면에 포위하고 달려든다 이 요란한 소리를 보라 달아나자 우리 목숨을 위해 달아나자. 그들은 짓던 밥을 그대로 버려 두고 나귀를 묶어 놓은 채로 무기를 내어 던지고 맨발 벗고, 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뛰다가 허리춤이 내려와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의복을 온 길거리에 내 던져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네 사람의 문둥이가 진까지 와보니 천막은 그대로 있고 짐승들은 모두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진 속에 들어가서 희희낙낙하고 배부르게 다 먹고 옷도 갈아입고 금과 은을 훔쳐서 감추고 그러다가 하는 말이 이날은 좋은 날이라 우리가 이날에 우리끼리만 즐거워하다가는 해가 뜨는 날에는 우리에게 벌이 있을 것이다 빨리 가서 우리가 왕궁에 이 사실을 알리자 그들은 뛰어 갔습니다. 왕궁에 가서 그 사실을 알리매 왕궁에서 첩병을 불러서 조사해 본즉 모두 다 달아나 버리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와서 아람진을 공략해서 오매 그 이튿날 아침에 성문에서 얼마나 밀가루와 보리가 넘쳐났던지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의 희망의 선포와 네 문둥이의 희망을 향한 행진이 상상을 초월한 구원과 축복을 가져 왔습니다. 이 위대한 승리와 축복은 희망을 의한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엘리사의 장엄한 희망에 대한 선포와 문둥이 네 사람의 가장 처절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실낱만한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향하여 전진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셔서 상상을 초월한 구원과 축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IMF 한파로 말미암아 우리 정부나 우리 기업가나 우리 노동자나 농민이나 소시민이나 희망의 등불이 꺼져갑니다. 설상가상으로 풍수해로 말미암아 우리 한국 전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비틀거립니다. 과연 내일에 희망이 있을까? 과연 우리가 살아날까? 우리를 이끌어 나가야할 국회를 늘 쳐다보고 있는 국민들 전체는 가슴을 치고 탄식을 합니다. 정치가들이 저 모양 저 꼴이니 이 민족이 어떻게 살겠는가? 사람들은 국회를 없애 버려라 국회의원들을 다 희망 퇴직시켜라 무노동 무임금인데 일도 안하고 왜 월급을 받아먹느냐? 국민의 원성이 국회를 향하여 비발치듯 합니다. 우리가 국회를 쳐다보고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에게 향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는 기업에 희망을 둘 수 있습니까? 직장을 잃으면 가족과 함께 다 생활의 좌절과 절망에 처한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게 어디에서 희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마치 시들어가는 꽃과 같고 꺼져가는 촛불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만일 좌절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런 역경과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찍질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한 이 모든 것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지금이라도 돌이켜 희망을 향하여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됩니다. 절망의 생각을 마음 속에서 다 ㅤㅉㅗㅈ아 내야 합니다. 절망의 말을 입술에서 던져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어둡고 캄캄한 가운데 아무리 좌절을 해도 네 사람의 문둥이보다는 낫습니다. 네 사람의 문둥이 처지보다 나은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람 군대에 둘러쌓인 사마리아 성에서 나귀 대가리나 비둘기 똥을 먹고 사는 그들보다는 나은 처지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저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대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우리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캄캄한 현실은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고 말 것입니다.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앞에 곧장 이 놀라운 희망의 역사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절망의 신봉자의 결과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7장 17절로 20절에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대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세겔을 하리라 한즉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절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믿은대로 죽음 밖에 다가올 것이 없습니다. 희망에 대한 저항은 곧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4절로 5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편 11절로 12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희망을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큰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과 미래에 영원한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여 주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이 모든 것에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우리 아버지 하나님! 현실 우리 한국이 아람 군대에 둘려쌓인 사마리아 성과 같이 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군상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우리가 이 처절한 상황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희망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자복하고 간절히 찾고 부르짖어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대한 해방과 자유와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IMF로 둘러쌓이고 천재지변으로 둘러쌓여 고난 당하는 우리 민족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소망의 메세지를 주시며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오니 아버지여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유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안수하고 간절히 기도하오니 주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 주셔서 모든 병을 도말시켜 버려 주시옵소서. 모든 질병과 좌절과 절망을 도말시켜 주시고 고통을 주님께서 멸하여 주옵시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은 치료와 건강이 다가오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는 하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심을 믿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의 약속의 말씀대로 치료의 기적을 베풀어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시옵소서. 모든 질병과 고통은 떠나갈지어다. 원수 귀신은 묶음을 놓고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라.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치료함을 받을지어다. 야웨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주 예수 이름으로 이 짐을 옮겨 주시옵시고 저주의 가시채와 엉겅퀴를 옮겨버려 주시옵시고 우리에게 소망으로 채워주시며 기쁨으로 채워주시며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직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업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 주시옵소서. 야웨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