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999년 1월 17일 제목: 예수님이 만난 죄인들 성구: 요 3:16-18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만난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다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중 특별히 개별적으로 만난 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인들을 어떻게 상대하셨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똑같이 죄인된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첫째 개인적으로 만난 죄인은 바라새인 시몬의 집에서 만난 한 여인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7장 36절로 50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사역을 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고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 집에 들어갈 때에 그 뒤에 따라오면서 눈물로 통곡을 하고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뚝뚝뚝뚝 흘리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예수의 발은 그 여인의 눈물로 적여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죄를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한없이 통회하고 눈물로 자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감격과 경의의 표현으로 자기 머리를 풀어서 머리털로써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유대인의 여인은 머리를 푸는 것이 큰 수치입니다. 오늘날도 여인에게 머리가 굉장히 귀합니다. 그 머리털을 먼지와 흙 묻은 그 발에 눈물로 적신 것을 다 머리로 닦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데 그 발에 엎드려서 입을 맞춥니다. 최상의 복종과 존귀를 표시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가 가져온 향유를 발에다 붓는 것입니다. 향유는 원래 머리에 붓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습관은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주고 그리고 난 다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도록 기름을 주는 것입니다. 이 귀한 향유를 그 여인은 감히 머리에 붓지 못하고 예수님의 발에다 부었습니다. 그럴 때에 바리새인 시몬의 얼굴은 불그락프르락 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만일 예수님이 과연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 동네에서 이 여인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 것을 알고 감히 곁에도 오지 못하게 할 것인데 이 여인이 곁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털로 발을 씻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게 하는 것을 보니 틀렸어 예수님은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야 그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줄을 몰라. 그렇게 실망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한 사람이 두 빚쟁이를 불렀는데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 빚을 지고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 빚을 졌는데 그 사람들이 다 갚을 수가 없어 그래서 채주가 500 데나리온 빚진 자도 탕감해 주고 50 데나리온 빚진 자도 탕감해 주었는데 그 중에 누가 채주에게 더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겠느냐? 그러니까 그 바리새인 시몬이 말하기를 제 생각하기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이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 집에 들어올 때에 너는 발 씻을 물도 떠주지 않았지 않느냐? 그만치 나를 등하니 여기고 네가 나를 무시했는데 이 여인은 눈물로써 나의 발을 씻었다. 내가 여기 들어올 때는 나를 끌어안고 뺨에 입 맞추어 주지도 않았는데 이 여인은 내 발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너는 값싼 감람유도 내 머리에 바르도록 주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비싼 향유를 발에 붓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 누가복음 7장 48절과 50절에 보면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48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절)” 이 말에 아예 바리새인 시몬은 어안이 벙벙 했습니다. 와 예수님이 다 알고 계셨구나! 왜냐하면 죄사함과 사랑의 관계는 깊은 함수 관계가 있습니다. 적게 사함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 받는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의 용서에 대한 그 은혜를 깊이 감사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대개 어릴 때부터 목사나 장로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늘 신앙의 의식 속에 자랐기 때문에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나는 별로 죄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 받은 그 깊은 은혜와 사랑을 느끼지 못함으로 의식적인 사랑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에 방탕하고 죄에 찌들어진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죄가 너무 깊은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사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가슴 저미게 깨닫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며 감사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점점 자랄수록 신앙의 철이 들수록 거듭거듭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깊이를 더욱 느끼게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 신앙 장성하면 장성할수록 자기가 과거에 주님을 반역해서 저지른 죄악의 깊이를 더욱 깨닫게 됩니다. 죄의 깊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용서를 받은 양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500 데나리온 용서 받은 사람과 50 데나리온 용서 받은 사람 중에 500 데나리온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죄의 용서와 사랑은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함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죄가 적어서 적게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큰 죄인입니다.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죄로써 잉태되고 태어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나서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크고 적은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반역한 깊은 죄인인 것을 깨닫는 데에 따라서 용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하시면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가슴을 치고 회개하게 되고 자기의 죄의 깊이를 알게 되고 눈물로 통곡하게 되고 그리고 용서의 큰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크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온 동네가 다 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그 죄를 깊이 회개하고 자복하고 눈물로 통곡하고 머리로 그 발을 씻고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그렇게 컸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을 믿고 그 감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가 주님께 그만한 보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면 내가 얼마나 용서 받은 것을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적게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님께 더 복종합니다. 이 여자처럼 자기의 머리털로써 예수님 발을 닦을 정도로 헌신하고 그 발에 입 맞출 정도로 완전히 종으로 순종하고 그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깨어지고 얼마나 용서 받은 것을 깨닫고 그 반대로 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우리가 느낄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용서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용서는 똑같이 받았지만 그것을 느낌에 따라서 많이 느끼는 사람이 있고 적게 느끼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만난 죄인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요한복음 4장 1절로 30절에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 중심부로 질러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해서 가셨습니다. 주님은 마치 사람에게 쫓기듯이 열심히 걸어가서 제자들이 따라가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한 낮이 되자 사마리아 동리 바깥 길에 있는 수가성 우물가에 주님께서 앉으셨습니다. 그 우물은 깊이가 약32m 정도 되는 깊은 우물입니다. 그 계단에 걸쳐 앉아서 주님은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상하다 주님이 누구를 기다릴까? 그런데 한낮에 햇빛이 쨍쨍 비취는데 누가 나옵니까? 우물에 물 길러 오는 것은 이른 새벽이나 오후에 물 길러 나오지 대낮에 물 길러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배가 출출한지라 사마리아 시내로 음식을 사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대낮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걸머지고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여인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은 아침에 저녁에 많은 사람이 우물가에 오는 것을 피하는 여자입니다. 사연이 있는 여자입니다. 왜냐? 많은 사람하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안 나오는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사연이 있는 여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여자를 만나시려고 강행군으로 오셔서 사마리아 수가성까지 오신 것입니다. 이 여자는 동서남북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그냥 종종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서 우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시요 내게 물을 좀 주시요. 그러자 소스라쳐 놀라면서 아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로 취급하는데 개 같은 여자에게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고하였을 것이요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 그러자 이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가로된 주여 물 기를 그릇도 없고 이 우물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도 더 큽니까?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그 자손들과 그 짐승들이 다 마셨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핵심을 찔러서 말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자의 심금을 무의식적으로 울리는 것입니다. 이 물은 또 마셔도 목마르고 또 마셔도 목마르고.. 세상의 쾌락을 찾아서 나가는 사람은 지위, 명예, 권세, 쾌락을 또 얻고 또 얻고 또 얻어도 그것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계속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목마름을 채우려고 할수록 목마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이것은 마시면 마실 수록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가 되어서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 그 말을 듣자 그 여자에게 수긍이 갑니다. 그는 이 우물물을 계속해서 와서 마셔주면 늘 목마른데 주님이 한번 마시면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가 된다고 하시니까 이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그 물은 영생의 샘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유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첫번 결혼해서 이혼하고 두번째 결혼해서 남편을 버리고 세번째 결혼해서 남편을 발로 차 버리고 네번째 결혼해서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다섯번째 결혼해서 남편에게 굿바이하고 지금 여섯번째는 결혼도 안하고 오다가다 만나서 삽니다. 굉장히 힘이 있는 여자인 것 같습니다. 남편을 마음대로 버린 여자 같으면 굉장히 힘있는 여자입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유도해서 회개시키는데 주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을 씁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 더러운 여자여 이 죄인이여 이 창녀여 음심이 가득한 여자여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불에 불탈 것이다.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존심이 있습니다. 자존심은 인간이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존심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존심의 문을 열도록 하지 주님께서 두들겨서 자존심을 열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쉽게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립니다. 그래서 깊은 상처를 줍니다. 사람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사람 되기를 거부합니다.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혼하는 것은 부부간에 하챦은 것으로 싸움이 붙었으나 남편이 부인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고 부인이 남편의 자존심을 할퀴어 버리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힙니다. 그때는 만정이 떨어집니다.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킬지라도 비록 더러운 죄인이지만 주님은 자존심을 존경하십니다. 주께서 그 자존심을 짓밟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할퀴기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마음에 자존심을 열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이 여자가 다섯 남편을 바꾸고 여섯째 남편하고 사는 것을 알면서 주님은 스스로가 고백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이 생수를 줄 것인데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요. 여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남편이 없는데요. 예수님이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와! 이 말은 이 여자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선지자이구나. 내가 살아온 대로 환히 들여다보고 있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하신 것은 이 여자의 자존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 스스로가 남편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여자를 칭찬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네 남편이 없다. 다섯이 있었으나 다 버리고 여섯째도 오다가다 사는 사람이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여자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분쟁으로 이끌어 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기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도 아니고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고 어느 곳이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니까 야! 너무나 탁월한 말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가만히 보시고 네게 말하는 내가 그 메시야다. 여자가 그만 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인도를 통해서 그 마음 문을 다 열어 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시 예수를 믿고 물 긷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동이도 버려두고 그는 시내로 뛰어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여 와 보라. 나의 삶을 다 알아낸 그가 바로 메시야가 아니냐. 그가 수가성 우물가에서 기다린다. 와 보라. 온 사마리아 사람들이 통털어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서 복음을 듣고 사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활짝 변화 받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십시요.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을 다룰 때라도 극히 귀하게 다루십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최후까지 지키려 하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짐승이 되고 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심에 손상을 끼치지 않으시고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예수님이 유도하신 것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라도 그 인격을 얼마나 존중하고 그 인격을 짓밟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부흥사들은 강단에 서서 형편없는 말을 씁니다. 온갖 욕짓거리를 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이 아는 창녀라도 그 자존심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이 부드럽게 유도해서 스스로가 마음 문을 열고 회개하게 하는 큰 사랑의 주님인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존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을 귀하게 여기고 여러분의 자존심을 귀하게 여기고 여러분을 짓밟지 않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아니하고 회개시키는 위대한 우리 구주인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로 13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제사 즉 종교를 집행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종교 의식이고 율법과 종교입니다. 내가 온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오셨다. 불쌍히 여기러 왔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고 회개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려는 그 집념, 구원을 시키려는 그 간절한 마음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주님을 더욱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직접 만난 죄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11절에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에 들어오셔서 말씀을 증거하니 백성들이 다 모여서 예수님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금속성의 여자의 음성이 납니다. 고함치는 남자 소리들이 나고 보니 바리새인 교인이나 사두개인 교인이나 율법사들이 한 여인을 발길로 차고 밀어 제키고 끌고 오는데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옷은 흐뜨러지고 맨발 벗고 얼굴은 할퀴어지고 이렇게 왔습니다. 이 여자를 끌어와서 주님 앞에 짐승처럼 내 던졌습니다. 온 사람들이 놀래서 그것을 봅니다. 그러자 모세의 제자들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교법사들은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사실을 볼 때에 한가지 벌써 시작부터 틀린 것이 있습니다. 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면 남자는 안 끌고 오고 여자만 끌고 옵니까? 그런 불공평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는 가게 내버려두고 연약한 여자는 끌고 와 가지고서 그를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법은 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여기지 않는 이상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돼’ 그러면 당신은 율법을 무시하는 자이니까 메시아가 아니다. 당신은 이단이다.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진퇴유곡에 빠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로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썼습니다. 다 볼 것 아닙니까? 성경은 뭘 썼다고 말은 안했지만 뭘 썼는지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제자요 모세의 율법을 주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세의 십계명을 손가락으로 적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이 모세의 제자들이 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것 보세요. 당신이 지금 손가락으로 적는 그 십계명 그대로 집행하시요.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시요. 손에 손에 돌을 들고 몽둥이를 들고 있고 이 여자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서 글을 쓰기 전에 쳐다보시고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자를 치시요. 그리고 예수님이 글을 적습니다. 보니까 큰 자로부터 작은 자 까지 자기들이 생애에 지은 엄청난 죄들이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막 적어져 나갑니다. 자기는 홀로 감추어 놓고 자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 죄들이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막 적혀 나갑니다. 그들은 감격을 했습니다. 만일 내가 돌을 들어서 이 여자를 쳤다가는 그 다음 차례는 예수님이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다. 잘못 걸렸다. 달아나자.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돌맹이와 몽둥이를 들고 살며시 빠져 나갑니다. 나는 지금 집에 바쁜 일이 있어서 가 봐야 되겠어. 자네들이 돌로 쳐. 또 다른 사람은 오늘 아침에 회의가 있는 것을 모르고 내가 여기 와서 시간이 너무 늦었어 자네가 돌로 쳐 나는 가야 되겠어. 전부 도망쳐 나갑니다. 그 주위에는 돌만 흩어져 있고 몽둥이만 있고, 사시나무 떨듯이 엎드려 떠는 여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 주위를 살펴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아! 놀랬습니다. 그렇게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돌맹이와 몽둥이만 남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나를 정죄하는 자가 없나이다. 오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간음한 여자의 죄를 타당화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를 구출한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비참한 죄인이라도 주님은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을 변호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율법주의자를 미워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의 죄는 다 감추어 놓고 위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는 칩니다.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고서 정죄합니다. 심판합니다. 지금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국회에 나타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당 야당 서로 치고 박고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하는데 예수님이 틀림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적으면 국회가 텅 비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당 야당 다 달아나 버리고 예수님 혼자 남을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남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죄를 지으면 나도 그것을 경계 삼아 회개하고 그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써야 하고 남이 죄를 짓거들랑 어찌하든지 기도해 주고 그들을 이끌어서 회개시키려고 해야지 정죄해서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한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고소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서로 격려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님 품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죄인도 둘째 죄인도 셋째 죄인도 우리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 죄를 걸머지고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갖은 고통과 모욕을 다 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생 크럽에 우리를 가입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댓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죄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죄인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 원함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회개하게 인도하시고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는 다 죽이려고 하는 죄인이라도 용서해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8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 때문에 죄인을 호되게 꾸짖거나 욕하시지 않으시고 죄인의 자존심을 지켜 주시면서 회개시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든지 온 세상이 다 죽이려고 하는 죄인이라도 끝까지 정죄하여 버리시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용서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알고 예수님 더 깊이 사랑하고 감사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주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주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드럽게 인도하여 회개시키시고 모든 사람이 다 정죄해서 죽이려고 해도 주님이 가로막고 그를 살려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는 주님이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나를 낳은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영접하여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구원하시는 너무나 위대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으니 더 감사하고 우리 죄를 회개시키신 것을 깊이 깊이 더 느끼고 더 감사하게 해 주시고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