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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14일 제목: 불행을 만드는 사람 성구: 마 7:12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불행을 만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모두다 똑같이 태어나지를 않습니다. 물질적인 환경이 부요하여 고생하지 않고 모든 은택을 다 누리며 자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누더기를 걸치고 온갖 배고픔과 고생을 다 겪으며 눈물로 자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생이 온전히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 짓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들 중에는 환경이 불행하게 자라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 같은 사람은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비가 세는 곳에서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 어머니에 의해서 성경을 통하여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나중에는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어 남북을 통일하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에디슨 같은 사람도 학교를 중퇴하고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세계적인 발명왕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헬렌 켈러같은 사람은 19개월 때 열병에 걸려서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역사에 이름난 위대한 여성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반드시 불행은 그의 태생이 불행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 부유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마음이 불행한 사람이 더 많고 자살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환경이 어려워도 대단히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자기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불행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 촌락에 현명한 노인이 계셨습니다. 그 촌락의 모든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다 그 노인이 가서 치료의 말을 듣고 문제를 해결을 받았습니다. 장난꾸러기 청년들이 이 노인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한번은 참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꼭 쥐고 가서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손에 잡혀 있는 이 참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이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죽었다고 하면 놓아주어서 푸르르 날아가서 살았잖아요 할아버지 틀렸어요라고 말하기로 하고, 또 살았다고 하면 꼭 쥐어 죽여 버리고 난 다음에 보세요 죽었잖아요 틀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마음을 먹고 노인에게 나왔습니다. 노인이 가만히 보더니만 그래 대답을 해주지. 죽고 사는 권세가 너의 손에 있느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일생의 행복과 불행도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불행을 만드는 사람이 될까요? 첫째로,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율법과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고 항상 남의 결점을 파헤치고 심판하는 이 사람을 주님께서 절대로 복을 내리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를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고 항상 남의 결점을 파헤치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주님은 정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회개하고 자복하고 통회하고 돌아서는 죄인을 정의롭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가슴에 상처를 입힙니다. 용서와 사랑의 훈훈한 기운보다는 늘 가시 있는 장미와 같아서 손만 대면 찔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 생활에도 보면 너무 정의로운 남편 곁에 부인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사사건건이 부인을 율법의 채찍으로 때리고 율법의 자로 재어서 비평하니까 그 앞에 살아 나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너무 정의로운 부인 앞에 남편이 견디지 못합니다. 왜? 항상 남편의 결점만 지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 앞에 설 수가 없어 그 남편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저가 40여년 동안 목회하면서 성도들을 가만히 보니까 성도들 가운데 위선자가 가장 심하게 남을 판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은 오히려 남을 용서하고 남을 끌어안는데 스스로 위선자,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은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가장 동료를 심히 비평하고 판단하고 목회자를 판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이것을 심리적인 반사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가장 비평하고 도둑놈이 도둑놈을 가장 무섭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가 스스로 불의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간음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TV를 통해서 무시무시하게 음란하고 간음한 자를 때렸습니다. TV 앞에서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아예 한기가 듭니다. 그런데 그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서 파멸되었습니다. 왜냐? 위선자가 심리적인 반사작용으로 자기의 위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을 심히 헐뜯고 꾸짖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위선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용서하고 사랑한 그 훈훈한 기운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론과 생각만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일방적으로 남을 매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신앙 상담을 하다보면 부부갈등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견만 주장하는 남편이나 아내 때문인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아무 말도 못하게 합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 전부 옳고 그것이 지고지순한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따르라 그래서 거기에 짓눌린 아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혹은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가 온전히 옳다 그러므로 남편이 하는 것은 다 틀렸다. 그러므로 남편이 자기 말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일방적인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고집 불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집 불통의 사람들과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화가 안되고 모든 일에 일방통로인 것입니다. 요사이 가만히 대한민국 국회를 보면 이 고집 불통의 사람들만 모인 것 같습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고집 불통이고 야당은 야당대로 고집 불통이고 대화와 타협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 앞에서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고집 불통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고집 불통으로 사는 사람은 남의 생각을 비웃고 무시합니다. 자기만이 진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 어느 곳에 가서 잘사는 미국에서 성공한 우리 교포의 집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같이 간 분이 조박사님, 조박사님 그러니까 그분이 어느 대학에서 무슨 논문을 써서 박사를 받았어요? 그렇게 묻더라고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나는 대학에서 정식으로 논문을 써서 박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명예 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명예박사가 무슨 박사가 그거 박사란 말 하지 마세요. 창피하게. 나 같이 정식으로 미국에 건너와서 논문을 써서 박사를 받은 그런 사람이 박사지 뭘 명예박사를 받아 놓고 박사라고 합니까?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때문에 진짜로 박사 받은 사람이 빛이 없어진다고. 내가 앉을 자리가 없어요. 도저히 그 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설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돌아 나올 수도 없고 그래서 맞았습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박사로 부를 자격이 없지요. 그러니까 잘못된 일입니다. 날 보고 박사라고 부른 사람에게 날 보고 다시 박사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 사람보고 너 위대한 박사라고 불러주겠는가? 잠언서 16장 18절로 19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고집 불통의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은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 사람은 남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후로 지키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인간은 자존심만 버리면 살인 강도도 될 수 있고 간음자도 될 수 있고 도적질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존경하는 마지막 자존심이 인간의 최후의 보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이 자존심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도 그 자존심은 주님께서 지켜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마라. 주님께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이 창녀가 그렇게 자존심을 짓밟지 않았습니다. 가서 너의 남편을 데려오너라 저는 남편이 없나이다. 맞았어요.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당신 남편이 아닙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집 불통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립니다. 얼마 전에 한 남자가 남보다 학교를 늦게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을 하고 굉장히 고집이 쎈 여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 여자가 늘 남편보고 하는 말이 당신이 나이 늦게 대학 들어가서 졸업했으나 실력이 없어서 회사에서 인정 못 받고 당신하고 사는 내가 부끄럽다 우리 동창들 보면 남편들이 다 출세했는데 동창회에 나갈 수도 없다. 남편이 부인에게 늘 그렇게 짓밟히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하는 말이 이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 수가 없다 좀더 큰 아파트로 가야겠는데 당신이 과장만 된다면 월급이 많아져서 좀더 큰 아파트로 가는데 이게 뭐냐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그런데 과장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죽으라고 밤낮으로 과장 시험을 합격하려고 공부를 합니다. 그 부인은 시험 공부하는데 도와주지 아니하고 당신이 정말 실력이 없는지 이로써 증명하라 이번 과장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당신은 패배자다. 당신은 남자로서의 자격도 없다. 그래서 과장 시험에 너무 몰두하고 공부를 해서 그날 시험장 나가서 시험지를 받아 뭐라고 적었느냐 이로서 나의 인생은 끝났다. 그 시험 답안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나가서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부인이 끊임없이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비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 현상도 많지요. 남편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일 때 부인이 계속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만해도 만족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힘을 내세요. 그래서 그 남편을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부인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편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항상 남과 비교하여 경쟁하는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남보다 나을 때는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얕봅니다. 저도 늘 머리 속에 생각나는 것은 대만에 있는 한 교인입니다. 그 때문에 내가 대만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만에서 초청을 받아도 안가는 것은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 다 함께 회식을 하는데 그 대만에 있는 모 교회 집사님이 나를 보더니 대한민국, 너 현대자동차가 있고 포항제철이 있고 그런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우리 대만 사람은 그런 현대자동차나 포항제철이 없어도 한국 사람보다 GNP 더 높다. 더 잘산다. 한국 놈들 건방지게 그러더라고요. 당장 일어나서 따지고 싶었지만 내가 언제 자랑을 했나 한국이 잘 산다고 말을 했나 자기가 혼자 일어나서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나를 쥐어박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 대답에 한국은 대만보다 물질적으로는 못 살지라도 영적으로는 부유하고 풍성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자기 목숨과 무엇과 바꾸겠느냐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못살아도 우리 국민이 수없이 예수 믿고 주께 나오는 이것이 우리 보배입니다. 그리고 말았습니다. 그랬는데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 한국과 비교해서 우리를 얕잡아 보고 나를 얕잡아 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대만에 초청장을 받아도 나 안가요.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기 때문에 가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입니다. 남도 불행하고 만들고 자기도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경쟁하는 것은 남보다 못할 때는 열등의식과 좌절감으로 항상 번뇌하고 경쟁 상대를 미워합니다. 경쟁상대를 꼬집고 모략하고 미워합니다. 큰 불행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살라 말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분량을 주셨으니 이 분량으로 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경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충실히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적게 주면 믿음을 많이 주시고 또 믿음을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물질을 적게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게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할미꽃이 장미꽃이 안되었다고 늘 불평하면 할미꽃이 장미꽃이 되지도 아니하고 불행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미꽃도 만드시고 무궁화도 만드시고 그리고 공동묘지에 있는 며느리 밥풀꽃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 자기 처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조화 무궁한 능력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남에게 비교해서 살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반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대범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잔소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남편이 아내에게 온갖 잔소리를 잘 합니다. 신발장에 신은 왜 저렇게 놔 놓았느냐 왜 집안 청소를 이렇게 해 놓았느냐 저 부엌에 가서 행주는 왜 깨끗이 빨아서 놓지 않고 저렇게 놓았느냐 쓰레기는 왜 갔다 안 치워놓았느냐. 남자가 집에 들어와서 대범하게 그냥 허하고 가족들을 끌어안고 살아야지 일일이 잔소리하고 시시콜콜 다 캐묻는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여러분 피곤해서 같이 못 삽니다. 이런 사람은 회사에 가도 확대경을 들고 다닙니다. 그저 남의 조그마한 일들도 전부 들추어 가지고서 전부 화제로 삼고 꼬집습니다. 교회도 확대경 집사, 확대경 장로가 많아요. 확대경 집사 확대경 장로가 되어가지고서 자꾸 남을 비평하고 비난하고 남을 꼬집으며 삽니다. 이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불행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대범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잔소리 많이 한다고 일이 되는 것 아닙니다. 잠언서 16장 1절로 2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자기가 하는 일이 다 올바른 것 같아도 그 영혼의 깊이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작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확대경을 가지고 살지 말고 대범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든 일에 간섭을 하면 부인도 못살고 남편도 못살고 이웃도 못살아요.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3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용서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나는 용서받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용서해 주시면 나도 남에게 용서해 줄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을 용서해 주고 대범하게 사랑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자기도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부간에 믿지 못하면 가정 생활에 불행해요. 나는 어떠한 남편이 최근에 내게 신앙 상담을 왔는데 그 부인이 남편을 믿지 못하고 시시콜콜하게 다 따집니다. 집에 들어오면 당신 몇 시에 어디에 있었느냐, 누구하고 밥을 먹었느냐, 어디 갔다 오느냐, 왜 시간이 늦었느냐, 하루 이틀이 아니고 부인이 따지기 때문에 목사님 나는 도저히 이 여자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못살겠으니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결혼했으니 이젠 운명적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부인을 자꾸 교회나 기도원에 데려가서 변화를 시키는 도리밖에 없다. 또 어떤 부인은 말하기를 남편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집으로 전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지? 화장실에 갔다 왔습니다. 뭐하니? 집안 손질했습니다. 뭐하니? 잠시 채소 사러 갔다 왔습니다. 왜 전화 안받아, 잠시 채소 사러 갔습니다. 이게 하루도 아니고 계속해서 부인을 감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이 나중에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친구하고 나갈 수도 없고 시장에 나갈 수도 없고 어디가면 어느 남자하고 차를 마셨느냐, 어느 남자하고 밀회를 했느냐 이러기 때문에 내가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불신의 사회라도 부부간에 서로 믿어야 합니다. 아예 속을 각오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지 그렇게 자꾸만 불신하면 오히려 네가 그렇게 나를 안 믿어 주니 그래 네가 안 믿어 주는대로 내가 살겠다. 내가 잘못해도 안 믿어주고 잘 해도 안 믿어 주니 까짓것 반발하는 것입니다. 서로 깊이 신뢰를 하면 그 신뢰에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합니다. 제가 교회 성장을 늘 강의하는데 대개 작은 교회 목사들은 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느냐 목사님들이 절대 교회 장로님이 집사님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모든 행정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설교도 내가 하고 재정도 다 내가 맡아서 하고 교회 모든 사무도 다 내가 맡아서 하고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가지 눈이 새빨갛게 뜨면 나는 죽을 고생을 한다. 죽을 고생을 한다하면서 뛰어도 교회는 부흥이 안됩니다. 왜 남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은 성도들을 믿지를 않고 신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안 맡깁니다. 또 회사도 마찬가지요. 사업을 하면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일을 맡겨 놓고 믿어야 합니다. 실수할 때가지 잘못할 때까지는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일일이 시시콜콜 자꾸 의심을 갖고 캐묻고 형사처럼 따라다니면 아무도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믿어 주지 않는데 자신이 없으니까 일을 못하지 않아요. 이러므로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면 남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여섯째로,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개인 이외에 이웃을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청년이 내가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복도 못받고 몸이 병든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병이 들어서 기도 받으러 왔는데 그가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우리 아버지를 사랑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왜 그러냐? 일평생에 우리 아버지는 자기만 생각하고 우리 어머니나 우리 자식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맛있는 것도 자기 혼자 다 먹고 좋은 옷도 자기가 옷만 입고 자기 평안만 생각하고 그리고 아내나 자식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우리 아버지를 내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괴로운 고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나 과거에 아버지가 자기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쓰디쓴 경험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럽다는 것을 내게 고백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오직 이용 가치로서의 이웃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지 저 사람은 내가 친구가 되면 내 밥을 늘 사주겠지? 저 사람을 데리고 사귀면 내 골프장에 가면 내 골프 값을 다 지불해 주겠지. 그럼 저 사람 친구로 삼아야 되겠다 저 사람하고 가면 여행할 때 저 사람이 경비를 저 사람이 다 대 주겠지 그럼 저 사람 친구 삼아야겠다. 모든 것을 이용 가치로만 생각하면 절대로 여러분 순수한 친구를 사귈 수 없고 오랫동안 친구로 남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한두 번 이용 당하면 그는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웃을 순수히 사랑하고 이웃에 도움을 주는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어떠한 자매님이 학교도 좋은 학교 나오고 교회도 열심히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늘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늘 무엇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 하기 대학생 해외 단기 선교에 나갔습니다. 나가서 그곳에 너무나 못 살고 어려운 사람에게 열심히 애를 쓰고 전도를 하고 그러고 돌아오는데 어떻게 마음이 흡족하고 만족한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여태까지 교회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 세례도 받고 하나님을 믿어도 늘 마음에 무엇이 늘 부족한 것으로 느꼈는데 단기 선교에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나니까 그렇게 마음에 흡족해지고 내 부족한 것이 무엇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제가 들어보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로 19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웃에 도움을 줄 때 참된 기쁨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짐을 나누어 질머져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도 기억하십니다. 고넬료의 구제와 사랑을 기억하고 온 가족을 구원하고 성령을 주었으며 도르가의 선행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죽었을 때 베드로를 보내서 그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행하며 진실함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이용가치로만 생각하고 자기 개인의 이익만 도모하기 위해서 산다면 이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이웃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남과 비교하여 경쟁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고 대범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되고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내 옆에 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저것은 아무개 목사보고 하는 말이구나 저것은 아무개 장로 들으라고 하는 말이구나. 나는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고치지 못할 고질병에 들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면서 내 스스로의 가슴에 찔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내가 가슴을 열어 놓고 이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는 주님 안에서 변화 받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와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을 창조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도 불행하고 이웃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와같은 인격적인 결함은 주님 앞에서 반드시 기도하고 회개하고 고치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변화 받으면 남이 변화 받습니다. 남을 자꾸 변화되라고 하지 말고 자기가 변화 받는 노력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요한1서 3장 21절로 2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누구를 불구하고 허물진 인생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만신창이요 걸레와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옵시고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아버지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어 아버지도 행복하게 만들고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이웃도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인격자가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가는 곳마다 불행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